곡사

곡사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절.
주소 : 경북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산23-1

일반정보

곡사(鵠寺)는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이전에 김원량(金元良)이 세운 것으로, 원성왕이 죽자 곡사의 위치에 능을 만들고 절은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으로 옮겼다. 제48대 경문왕(景文王) 대에 중창하였으며, 제49대 헌강왕(憲康王) 대에 숭복사(崇福寺)라 이름을 바꾸었다. 최치원(崔致遠)이 쓴 비명이 전하고 있다. 현재 금당지(金堂址), 석단(石壇)을 비롯하여 동서로 삼층석탑 2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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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곡사(鵠寺)는 원래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대 이전에 원성왕(元聖王)의 외삼촌이자, 원성왕의 비인 숙정왕후의 외조부되는 김원량(金元良)이 세운 것으로, 제38대 원성왕이 죽자 풍수설에 의해 곡사의 위치에 능을 만들고 절은 지금의 위치인 경주시 외동읍으로 옮겼다. 그 후 이 절은 원성왕의 추복원찰(追福願刹)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헌강왕 11년(885)에는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다.

신라 하대는 왕위계승 과정에서 진골귀족 간에 끊임없는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이에 경문왕은 즉위 후 자신의 왕위에 도전하는 다른 왕실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원성왕계 내에서의 각 분파관념을 없애고 자신의 정권으로 귀속시키려는 회유연합책을 폈다. 그러한 노력의 표현으로 가장 먼저 행한 것이 바로 곡사의 중창이었다. 원성왕은 신라하대 왕위계승에 있어 중시조(中始祖)가 된다. 그러므로 원성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분열된 왕실을 통합하고자 그동안 황폐하게 방치되었던 원성왕의 원찰인 곡사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웅장하게 중창하는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김창겸, 1988)

이러한 곡사의 중창에 대해 당시 경문왕이 통제권에서 벗어난 불교계를 다시금 정비하기 위한 작업에 관심을 두었고, 정법전(政法典)을 정비하고 불교계를 통제하고자 하였던 원성왕에 주목하여 원성왕을 위한 곡사 중창이 이루어 졌다고 보기도 한다.(조범환, 1999)

헌강왕 11년(885)에는 곡사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다.「대숭복사비명」에는 이러한 개명을 두고 중국의 예를 들고 있다. 진(陳)나라의 보덕사(報德寺)가 수(隨)나라에 와서 흥국사라(興國寺)라 한 것과 같아, “보덕(報德)”이라는 말보다 “흥덕(興德)”이라는 말이 국가를 단위로 할 때 더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곡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이해된다. 절 뒤에 고니 모양의 바위로 이름 붙여져 한 지역만을 의미하던 “곡사(鵠寺)” 대신에 포괄적 의미로 국가를 단위로 하는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최치원으로 하여금 「대숭복사비명」을 짓게 하였다.(이구의, 2004)

「대숭복사비명」은 서문(序文)과 명문(名文)으로 이루어졌는데, 서문은 다시 도입부와 전개부로 나누어 진다. 서문의 도입부분은 숭복사를 중창한 임금의 덕과 나라의 태평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승려 비명에서 맨 앞부분에 승려의 업적을 기리고 찬양하는 내용과 비슷한 구성이다. 전개 부분에는 숭복사의 중창과정이 담겨있는데, 숭복사의 유래와 기원, 경문왕(景文王)과 곡사의 중수,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등극와 숭복사 개칭(改稱), 제50대 정강왕(定康王)의 비명 찬술 명령 계승, 제51대 진성왕(眞聖王)의 비문 찬술 독려, 그리고 최치원의 비명 찬술 동기 등 여섯부 분으로 되어 있다. 특히 사찰의 창건과 중수과정은 시대에 따라 소상히 정리되어 있음에 따라「대숭복사비명」에는 숭복사에 대한 경문왕계 왕실의 입장과 당시 시대 상황이 잘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장일규, 2006)

숭복사지(崇福寺址)에는 현재 금당지(金堂址), 석단(石壇)을 비롯하여 동서로 삼층석탑 2기가 남아있다. 특히 서탑(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4호)은 기단부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양각되어 있으며, 각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다. 동탑은 서탑과 같은 크기와 양식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부 파괴된 기단부와 1층의 옥신(屋身), 2개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숭복사지에 위치해 있던 쌍귀부와 “국사대웅(國寺大雄)”과 “개와대웅(蓋瓦大雄)” 등의 문자가 새겨진 평기와 등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김창겸, 1988,「新羅景文王代 「修造役事」의 政治史的 考察-王權强化策과 관련하여-」『溪村 閔丙河敎授 停年紀念史學論叢』.
조범환, 1999, 「新羅 下代 景文王의 佛敎政策」『新羅文化』16.
이구의, 2004, 「崔致遠의 ‘大崇福寺碑銘’攷」『東方漢文學』26.
장일규, 2006, 「숭복사비명과 경문왕계 왕실」『歷史學報』192.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十八 元聖王[金氏 名敬愼 一作敬信 唐書云敬則 父孝讓大阿干 追封明德大王 母仁□ 一云知<烏>夫人 諡昭文王后 昌近伊己之女 妃淑貞夫人 神述角干之女 乙丑立 理十四年 陵在鵠寺 今崇福寺<也> <有致>遠所立碑]
제38 원성왕[김씨로 이름은 경신(敬愼)으로 또는 경신(敬信)이라고도 하며 당서에는 경칙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효양대아간이며 명덕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어머니는 인□ 또는 지오부인이라고 하며, 시호는 소문왕후로 창근이기의 딸이다. 왕비는 숙정부인으로 신술 각간의 딸이다. 을축년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 능은 곡사에 있으니 지금의 숭복사이며, 최치원이 세운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