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귀리 유적

공귀리 유적

[ 江界 公貴里 遺蹟 ]

지역 강계
강계 공귀리 유적 유구 배치도

강계 공귀리 유적 유구 배치도

자강도 강계시 공귀리에 위치한다. 강계 시내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독로강가의 회천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5㎞ 지점인 독로강 우안의 하안단구지대인 장자강 기슭에 있다. 유적에서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200m에는 사진천이라는 작은 냇물이 동쪽으로 흘러 독로강으로 합류한다.

1954년 공장 건설과정에서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도끼〔石斧〕 등 유물이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1955년 5월 과학원(현재의 사회과학원) 물질문화사 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하여, 집자리〔住居址〕 6기와 돌널무덤〔石棺墓〕 2기를 확인하였고 1957년에도 유적을 정리하면서 돌널무덤 1기를 새로 발굴조사하였다.

집자리는 층위 관계와 구조, 그리고 출토유물의 특징에 따라 아래문화층(2, 3, 6호)과 윗문화층(1, 4, 5호)으로 나뉜다. 아래문화층에는 2호 집자리를 가운데 두고 남쪽으로 5m 거리에 6호, 북쪽으로 10m 거리에 3호가 있는데, 2호와 6호는 교통호(交通濠)로 이어져 있다. 구조는 장방형의 반움집이며 움벽 밖으로 작은 움〔竪穴〕을 덧내어 도구를 넣어둘 수 있게 한 창고(倉庫)와 출입구(出入口) 시설이 있다.

2호의 크기는 950×730(남벽)∼780(북벽)×55㎝로 내부에는 돌 4매를 두른 화덕〔圍石式 爐址〕이 있으나 기둥구멍〔柱穴〕은 없다. 3호는 크기 900×630(남벽)∼700(북벽)×40㎝이며, 내부에 구덩식〔竪穴式〕 화덕이 있다. 윗문화층에는 교통호로 연결된 3기의 집자리가 있다. 4호, 5호는 평면 장방형으로 화덕자리를 갖추고 있다. 가운데 큰 기둥을 세우고 네 면을 기둥으로 받치고 면을 따라 경사지게 지붕을 이은 사각추 지붕으로 복원할 수 있다. 4호는 크기 600(동벽)∼660(서벽)×600×50㎝로 벽을 따라 기둥구멍을 배치하고, 판돌〔板石〕을 밑에 깔고 둘레를 돌로 돌린 화덕이 있다. 5호는 670(동벽)∼650(서벽)×570∼600×50㎝ 크기로 내부는 4호와 유사하다.

집자리 출토유물은 돌도끼, 대팻날도끼〔扁平偏刃石斧〕, 간돌화살촉, 물고기모양〔魚形〕·빗모양〔櫛形〕의 반달돌칼, 돌낫〔石鎌〕, 바퀴날도끼〔環狀石斧〕, 톱니날도끼〔星形石斧〕, 숫돌〔砥石〕, 매부리형석기석기류와 돌과 흙으로 만든 그물추〔漁網錘〕, 가락바퀴〔紡錘車〕와 치레걸이〔裝身具〕들이 있고 기형을 알 수 없는 청동연모 편이 나왔다. 질그릇은 보시기, 단지, 항아리 등이 있는데 고리손잡이, 꼭지손잡이가 마주 달려 있는 것이 많고 질그릇 입술에 구멍무늬〔孔列文〕를 장식을 한 것, 두터운 덧띠〔突帶〕에 무늬를 새긴 것과 무늬 없는 것이 있다. 출토유물의 특징을 보면 우리나라 동북지방과 서북지방의 청동기시대 문화 요소를 함께 갖추고 있어 두 지역 사이의 문화 교류를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돌널무덤은 점판암(粘板岩) 판돌을 이용하여 무덤방〔墓室〕을 만들고 옆에 작은 무덤방이 딸린 구조이다. 무덤방 크기는 125×40(서벽)∼57(동벽)㎝로서 머리쪽이 넓은 것으로 나타난다. 옆에 딸린 작은 무덤방은 길이 80×30㎝ 안팎이며, 바닥에는 판돌을 깔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안에서는 사람뼈〔人骨〕는 나오지 않았고 토기편 2점, 흑요석(黑曜石)편 1점, 대롱옥〔管玉〕 1점이 나왔다. 무덤 구조로 보면 굽혀묻기〔屈身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덤 구조와 껴묻거리〔副葬品〕들은 강계 풍룡리에서 발견된 돌널무덤과 같은 것들이다. (장호수)

참고문헌

  • 강계시 공귀리 원시유적에 대하여(김용간, 문화유산4, 1958년)
  • 강계시 공귀리 원시유적 발굴보고(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유적발굴보고 6집, 195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