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남

김보남

[ 金寶男 ]

요약 피리 연주가·무용수(정재). 서울 출생. 호는 신곡(新谷).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판교리 출생.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아악사(雅樂師). 전공은 피리.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 제3기 졸업생.
출생 - 사망 1912년 ~ 1964년
김보남

1926년 4월 아악부원양성소아악생(雅樂生)으로 입학하여 1931년 졸업 후 아악부의 아악수(雅樂手)·아악수장(雅樂手長)·아악사를 지냈다. 아악생 시절 배운 정재 이외 한성준(韓成俊)의 무용연구소에서 승무·살풀이 등 민속무용을 배웠다.

1933~1941년 이왕직아악부 시절 가곡·평시조 및 "서일화지곡"(瑞日和之曲)·"요천순일지곡"(堯天舜日之曲) 등의 조선아악, 그리고 피리독주·양금독주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1933년 2월 2일 이습회(肄習會)의 제5회 공연 때 출연한 이후 1941년 2월 6일 제100회 공연 때까지 지속적으로 출연하였다.

1945년 8·15광복 직후 이왕직아악부를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개칭했을 때, 장악부원인 그는 구왕궁아악부의 부장인 장인식, 총무부원인 성경린·봉해룡·서상운·이덕환·홍원기, 장악부원인 이재천·김성진, 그리고 교양부원인 이주환·이재천·이덕환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7년 12월에 서울중앙방송국의 이혜구·이계원·이덕근·송영호의 도움으로 구왕궁아악부원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전속조선음악회(專屬朝鮮音樂會) 소속으로 방송활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설립된 한국교육무용소(韓國敎育舞踊所)에서 함귀봉·조택원·장추화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49년 초등교육계의 무용교육을 위해 조동식·김봉식·김신실 등과 함께 중앙교육무용협회(中央敎育舞踊協會)를 창립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국군장병을 위문하기 위해 군예대(軍藝隊) 국악소대 소속으로 활동했다.

1951년 4월 9일 부산에서 이주환이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의 초대 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이병성·김만흥·박영복·김영윤·김기수·김성진·이덕환·김준현·홍원기·김태섭·이창배·김상기와 함께 예술사(藝術士)로 임명되었다. 국립국악원 장악과장(1951~1952)을 거쳐 1955년부터 1964년까지 국악사양성소(國樂士養成所)의 무용 강사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64년 4월 15일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126~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