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린

성경린

[ 成慶麟 ]

요약 거문고 연주가. 국립국악원장(國立國樂院長).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의 예능보유자.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아악수장(雅樂手長). 전공은 거문고.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 제3기 졸업생. 호는 관재(寬齋).
출생 - 사망 1911년 ~ 2008년
성경린

1932년 11월 4일 이습회(肄習會)의 제2회 공연 때 "중광지곡"의 하현과 염불을 독주한 이후부터 1941년 2월 6일 제100회 공연 때 편종으로 "수연장지곡"을 합주할 때까지 공연활동에 출연하였다.

1933~1941년 이왕직아악부 시절 그는 거문고·공후(箜후운라(雲鑼)·좌고(座鼓)·편경·편종으로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봉황음"(鳳凰吟)·"서일화지곡"(瑞日和之曲) 등을 포함한 조선아악·편종독주·현금독주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1945년 8·15광복 직후 이왕직아악부를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개칭했을 때, 총무부원인 그는 구왕궁아악부의 부장인 장인식, 총무부원인 봉해룡·서상운·이덕환·홍원기, 장악부원인 이재천·김보남·김성진, 그리고 교양부원인 이주환·이재천·이덕환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7년 문교부 편수국의 장사훈 및 서울중앙방송국의 이혜구·이계원·이덕근·송영호의 도움으로 구왕궁아악부원들을 중심으로 전속조선음악회(專屬朝鮮音樂會)를 구성하여 대표직을 맡아 매달 정기적으로 방송활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음악술어의 제정 때 참여했고, 1949년 한국음악가협회(韓國音樂家協會)의 중앙위원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때 국군장병을 위문하기 위하여 군예대(軍藝隊) 국악소대의 대장직을 맡아 활동했으며, 12월 25일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의 인사발표 때 악사장(樂士長)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1호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국립국악원 초대 악사장(1950~1961)을 거쳐 제2대 국립국악원장(1951~1972)과 국악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1972년 가곡·가사·시조의 보존과 육성을 위해 사단법인 가곡보존회(歌曲保存會)를 설립했다. 1976년 12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보호협회가 공동 제작한 『한국의 음악』에 종묘제례악을 취입하였다.

1977년 국립국악원 정례발표회 때 "국립국악원의 어제와 오늘"을 발표했고, 10월 9일 제2회 대한민국음악제 때 출연했다. 1979년 10월 15일 제10회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발표공연 때 출연하였다. 1980년 3월 10일 국립국악원의 제1회 전통음악연주회 때 집박했고, 11월 25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거문고50주년 기념연주회를 열었다.

1981년 10월 23일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때 출연했고, 1982년 당시 국립국악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1월 1일 제13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때 출연하였다. 1998년 10월 14일 대악회 제25회 중요무형문화재 대제전 때 출연하였다.

1956년 국악진흥회의 제1회 국악상(공로상)을 수상했고, 1959년 제9회 서울시문화상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예술원상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방송을 통한 국악강좌의 공로자로 서울특별시가 제정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1990년 제22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시상식 때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했으며, 1998년 11월 19일 제5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조선의 민요』(1949)·『조선의 아악』(1947)·『조선음악독본』(1947)·『한국의 악기』(1958). 『노을에 띈 가락』(1978)·『아악: 수상집』(1972)·『아악: 성경린수상집』(1975)·『한국음악논고』(1976)·『한국의무용』(1976)·『국악감상』(1976 및 1994)이 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4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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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