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

함흥차사

(머금을 함, 일어날 흥, 어긋날 차, 시킬 사)

[ 咸興差使 ]

요약 한번 가면 아무런 소식이 없음.
심부름을 보낸 사람도 돌아오지 않고 어떠한 소식도 전해오지 않는 상황.

조선의 건국조인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다섯째아들인 이방원 덕분에 혁명에 성공을 거두어 왕위에 오르지만 후에는 그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들을 잃기도 합니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때문이었죠. 이에 조정 생활에 회의를 품은 태조는 왕위를 넘겨준 후 함흥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합니다. 형식적으로 형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가 불과 2년 만에 조선 3대 왕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지요. 그러나 태종에 대한 원망과 분이 풀리지 않은 이성계는 태종이 보낸 사신을 죽이기도 하고 잡아 가두기도 하면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나온 표현이 함흥차사입니다. 함흥에 파견된 사신은 가면 아무 소식이 없다는 데서 나온 것이죠.
그럼 두 차례 일어난 왕자의 난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까요.
우선 왕자의 난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성계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방우(芳雨)·방과(芳果)1)·방원(芳遠)2) 등 여섯 형제를 두었고,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와의 사이에 방번(芳蕃)·방석(芳碩)을 두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후계자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였죠.

태조는 처음에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을 세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개국공신들은 방번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반대하자 막내인 방석을 후계자로 선정하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는 세자를 누구로 하느냐는 문제 외에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보다 중요한 문제가 담겨 있었습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들은 왕실 중심의 정부가 아니라 관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던 이방원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방석을 후계자로 선정했던 것이죠.
그러자 나이가 많은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특히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방원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도 소외되고 세자 책봉에서도 밀리면서 불만을 품은 것은 물론 정치적 입지마저 곤란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방원 일파를 밀어붙이던 정도전 계열 관리들은 1398년 진법 훈련 실시를 계기로 권력의 마지막 기반인 사병(私兵)마저 혁파하고자 했습니다. 사병이란 정부군이 아니라 권세가에서 개인적으로 양성하던 군대를 말합니다. 그해 8월 진법 훈련에 불참한 왕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정도전 일파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정도전 계열에 대한 반격을 꾀하던 방원은 이 기회를 틈타 이숙번 등의 휘하 인물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 일파를 불의에 기습하여 살해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에 대항하는 세자 방석과 방번 또한 함께 살해했지요. 이로써 방원 일파는 정도전과 그 계열을 모두 없애고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靖社), 방원의 난이라고도 하지요.
한편 정도전 계열이 사라진 후 무인정사에 성공한 일파는 방원을 세자로 옹립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상황을 고려하여 태조의 둘째아들인 방과를 세자로 옹립하는데, 그가 바로 조선 제 2대 왕인 정종입니다. 그런데 정종은 즉위 초부터 동생 방원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며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정종은 정비인 정안왕후 김씨와의 사이에 소생을 갖지 못했고, 이는 후계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한편 개국공신인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일등공신에 책봉되지 못하여 방원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후계자 문제로 동생 방원과 반목하고 있던 방간에게 접근한 박포는 그를 선동, 1400년 1월 방원에 대한 공격에 나서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간(芳幹)의 난 또는 박포(朴苞)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이 싸움에서 형 진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방원은 우세한 세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방원의 지위는 확고해졌고 마침내 세제로 책봉된 후 그 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제3대 왕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태종입니다.

함흥차사 본문 이미지 1

그럼 난을 일으킨 방간과 박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난에 실패한 후 붙잡힌 두 사람은 토산과 이산으로 귀양 보내졌습니다. 얼마 후 박포는 참수되었고, 방간은 주위에서 반역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태종은 끝까지 이를 거부, 귀양지에서 늙어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