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아시아 예술

중앙 아시아 예술

다른 표기 언어 Central Asian arts

요약 투르키스탄 지방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일대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예술.

목차

펼치기
  1. 중앙 아시아의 미술
  2. 중앙 아시아의 회화
  3. 중앙 아시아의 조각
  4. 중앙 아시아의 공예
  5. 중앙 아시아의 건축
  6. 중앙 아시아 미술과 한국 미술과의 관계
  7. 중앙 아시아의 음악
    1. 개요
    2. 아프가니스탄과 중앙 아시아 정착민의 음악
    3. 중앙 아시아 유목민의 음악
    4. 히말라야 산맥 주변 국가들의 음악
  8. 중앙 아시아의 무용

중앙 아시아의 회화는 구석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제작된, 사냥 장면 위주의 암각화로 시작되었다. 조각에서는 토속을 주제로 한 테라코타와 종교를 주제로 한 불상조각이 있고, 공예품으로는 토기가 많이 발굴되었다.

중앙 아시아 공예의 특징인 금속 장식은 장신구에서 많이 나타났다.

건축에 있어서는 사산 왕조의 건축물에서 보듯이 기본구조가 이슬람 사원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 많다. 동서문화교류의 요충지였던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중앙 아시아는 음악에서도 이동이 극심했는데, 주로 궁중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전음악과 서민계층의 민속음악으로 나뉘어 발전했다.

중앙 아시아의 무용은 샤머니즘이나 불교 등의 종교의식과 관련된 것이 많고, 이러한 무용은 지역 주민들의 정신적·사회적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앙 아시아의 미술

중앙 아시아 예술은 역사적인 고대미술에 속하며 그 관계지역도 오늘날의 정치적인 국경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이 지역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동투르키스탄과 서투르키스탄으로 갈라지는데, 전자는 고대 중국인들이 서역(西域)이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오늘날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일대를 말하고, 후자는 남러시아, 시베리아 일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인도 북부, 몽골, 티베트, 네팔, 이란 등지를 말한다.

그런데 사실상 미술에 나타난 연관성을 살펴본다면, 동부지역의 테두리는 북중국 일대를 거쳐 한반도에까지 연장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동부지역은 인도와 중국 미술이 지배적이었고, 서부지역은 고대 이란 미술의 바탕 위에 그리스·로마 미술이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러한 미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상호 양지역을 넘나듦으로써 각 지역에 변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중앙 아시아인들이 이러한 새로운 미적 체험을 통해 자기의 독자적인 미술을 발전시킬 기회를 맞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막지대로 구성되어 있는 이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던 종족은 구석기·신석기시대인을 포함하여 매우 다양하나, 구체적인 미술품을 남긴 민족은 많은 편이 아니다. 청동기시대 이후의 경우로는 서투르키스탄의 스키타이·소그디아나·이란과 동투르키스탄의 흉노·위구르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이 남긴 작품들은 공예·조각·회화·건축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이 지역의 미술품들은 대체로 불교를 주제로 하고 있으나, 사원건축은 8세기 이후에 점차 확산된 이슬람교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다. 유품들의 많은 부분도 20세기 초엽 서양의 고고학자와 탐험가, 예컨대 오렐 스타인(영국), 폴 펠리오(프랑스), 알베르트 그륀베델(독일), 오타니 고즈이(일본)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되었으며 오늘날 영국박물관, 기메 박물관, 베를린 민속박물관, 뉴델리 박물관, 도쿄 박물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의 영묘 (Mausoleum of Khoja Ahmed Yasawi)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의 영묘 (Mausoleum of Khoja Ahmed Yasawi)

중앙 아시아의 회화

중앙 아시아의 회화는 암각화·벽화·모자이크·세밀화·두루마리그림 등의 형식으로 구분되며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회화는 역시 암각화이다.

구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제작된 이들 암각화는 남러시아 일대,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등의 분포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사냥 장면의 인물상과 동물상 등이 주요 주제를 이룬다.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메스에서 약 60㎞ 떨어진 바바탁 산에서 발견된 후기 구석기의 암각화에는 무엇보다도 황소를 향해 활을 쏘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어 주목되고 있다.

한편 벽화는 사원(석굴)벽화·궁전벽화·무덤벽화 등으로 나뉘는데, 그 중 불교문화를 반영한 사원벽화가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현상은 중앙 아시아가 불교 전파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불교 자체가 강력한 예술적 표현을 동반하고 있는 데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사원벽화들은 대체로 1세기 이후의 것들이며 늦은 시기의 것으로는 둔황 벽화의 마지막 작품이 제작된 14세기까지 연장된다.

중앙 아시아를 통틀어 초기의 불교 벽화로는 카라테페에서 1㎞ 떨어진 파야스테페 사원에서 발굴된 1~3세기경의 〈여래상〉(타슈켄트 역사박물관)을 들 수 있다.

불상의 안면과 그 주변에 서 있는 작은 인물들로 구성된 이 벽화는 사실적 표현의 기초 위에 명암법을 써서 채색을 가한 흔적이 뚜렷하여 어느 정도 로마 벽화의 영향을 감지하게 한다. 이와 같은 사원벽화 외에도 서투르키스탄에서의 벽화는 매우 다양하다. 이란의 고대왕국인 파르티아(BC 4세기~AD 3세기)의 쿠이초차 지방의 궁전벽화는 1세기경의 작품으로서 인물 중심의 종교적인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인물 주변에는 그리스의 메안더 문양, 아칸서스 문양 등 서방적인 모티프와 함께 날개 달린 에로스와 같은 순수 헬레니즘적인 근원도 엿보인다.

2세기의 두라유로포스 고분벽화는 기마인물이 활을 쏘며 짐승을 추격하는 전형적인 사냥 장면인데, 동작 표현에 비해 운동감이 없고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 벽화는 일종의 서원화(誓願畵)로서 그리스풍의 모델을 따르고 있지만, 그 표현은 전형적인 이란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이란의 회화는 사산조(226~651)의 모자이크 바닥 장식화로 대표된다. 이 모자이크 그림은 로마 미술의 영향으로 시작된 것이다.

3세기 후반의 비샤푸르의 모자이크는 그 모티프를 안티오크의 모자이크 제작소에서 따온 것인데도 세부표현은 분명한 이란풍을 보여준다. 또한 이 모자이크의 명암표현은 후에 동투르키스탄 석굴벽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비샤푸르(Bishapur)
비샤푸르(Bishapur)

소그디아나의 회화는 그들 문화의 전성기인 7~8세기에 제작된 벽화가 대종을 이룬다(소그디아나 예술). 이것들은 당시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를 비롯해 근교의 아프라시아브, 펜치켄트, 서부의 바라흐샤 등의 도시들에 남아 있는 사원, 궁전, 주거 건물 등의 벽면을 장식한 그림들이다.

소그디아나(Sogdia) 회화
소그디아나(Sogdia) 회화

펜치켄트 주거 벽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영웅 루스탐의 전설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벽화에서 말을 타고 있는 인물들은 묘사의 평면성에도 불구하고, 배경을 라피스 라즐리의 푸른색으로 칠함으로써 대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1965년에 발굴된 아프라시아브의 궁전벽화에는 7세기말 당시 주변국가의 사절단이 묘사되어 있는데, 특히 조우관(鳥羽冠)을 쓴 2명의 한국인 사절이 등장하여 흥미를 끈다. 카불의 서북쪽으로 177㎞ 떨어진 곳에 있는 바미안은 힌두쿠시 산맥의 한 줄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인도·이란·서아시아 등 주변지역의 문화를 섭취하면서 독자적인 불교미술을 탄생시켰다. 이 지방의 4~5세기경의 석굴 중에 동대입불(東大立佛)이 서 있는 석굴 천장에는 태양신을 그린 것이 보인다. 이는 불교가 이란의 토속신인 미트라와 습합된 사례로서 바미안 회화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투르키스탄의 석굴사원은 기원후의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특히 인도 아잔타 석굴의 영향을 받으면서 개착되기 시작하여 큰 규모로 발전했다.

쿠처[庫車] 지구에 있는 석굴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키질 석굴이다. 쿠처에서 67km 떨어진 밍구택 산을 깎아 만든 이 석굴 가운데 현재 편호가 된 석굴만도 236개나 되는데 그 중 75개가량은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키질 벽화는 석굴의 형식과 위치, 벽화의 주제와 양식 등을 기초로 하여 3단계로 나누어진다. 제1단계(3세기말~4세기 중엽)에서는 주로 석가불, 교각좌(交脚坐)의 미륵보살의 도솔천설법도가 표현되고 있으며, 색채는 주로 차가운 남색이 지배적이다.

제2단계(4세기말~5세기 중엽)는 절정기로서 내용은 큰 차이가 없으나, 표현에서 세부묘사가 도식화되는 점과 채색에서 밝은 부분을 강조한 하이라이트 수법을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제3단계(6세기 중엽~8세기 중엽)에서는 천불(千佛)이 유행하는 주제상의 변화와 함께 연대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연주문(連珠文) 장식이 등장한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키질 벽화는 초기에 소승유부(小乘有部) 사상을 반영하는 반면, 말기에 이르면 대승적(大乘的) 내용을 가미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불교주제 외에도 악무(樂舞) 장면과 민속적 요소가 등장하는 점을 키질 벽화의 특징으로 덧붙일 수 있다. 쿠처 지역의 석굴군 중에는 쿰투라 석굴이 있는데, 이것은 쿠처에서 서쪽으로 21㎞ 떨어진 무자르트 협곡에 위치해 있다. 석굴은 총 112개소로서 벽화의 주제나 양식도 기본적으로 키질 벽화의 유형을 따르고 있으나, 다만 후기로 가면 당(唐)의 영향으로 중국식 소재와 양식이 지배적이다.

중앙 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인후지역(咽喉地域)에 있는 둔황의 석굴사원은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둔황(Tunhuang)
둔황(Tunhuang)

이 석굴은 366년에 개착된 이래 1,000여 년 간 지속적으로 조영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것만 해도 492개소나 된다. 그러나 현재의 초기 석굴은 이보다 조금 후인 북량(北凉:397~439)시대에 속한다. 둔황 벽화의 주제는 다른 석굴사원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중심이 되나, 여기에 한(漢) 문화 특유의 전통이 가미되어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대체로 이와 같은 주제내용은 7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존상화(尊像畵)로서 각종 여래의 형상과 여래 주위의 협시(脇侍)와 8부중(八部衆) 등을 말한다. ② 불교경전에 의한 설화도(說話圖)가 나타난다.

이것을 세분하면 불전도(佛傳圖), 본생(本生) 설화도, 인연(因緣) 설화도로 나뉜다.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불전도는 초기에는 탁태(托胎)·출가유성(出家踰城) 등 단편적인 내용을 표현하다가 북주(北周)에 이르면 석굴 290호에서와 같이 불전 전체를 묘사하기에 이른다. ③ 전통적인 신화를 주제로 하는데, 여기에서 동왕공(東王公)·서왕모(西王母)·복희(伏羲)·여와(女媧)·사신(四神)·우인(羽人)·개명·방사(方士) 등 불교와 도가가 습합된 현상을 보인다.

④ 경변(經變) 중 특히 대승경전의 변상도는 수대(隋代)부터 시작된다. 당대의 경변은 20종에 달하는데, 법화경변·유마경변·아미타경변 등이 유행했다. ⑤ 불교사적화는 수대에 처음으로 출현했다. 이것은 불교의 역사, 감응설화, 고승의 고사 등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약 40종이나 된다. ⑥ 공양자상으로서 석굴 조성에 공덕을 베푼 시주의 초상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조상숭배사상과 결합된 것으로서 급속히 발전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각 민족의 초상이 표현되어 있어 중요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⑦ 장식의장은 천장·의복·보관·기물 등에 묘사된 장식과 문양 등을 말한다. 초기에는 연화·팔메트·운문·용무늬·봉황문이 유행했고 수대부터는 페르시아 문양을 흡수하여 연주문·페가소스·수렵문 등이 보이다가 당 이후에는 포도문·석류문·당초문 등의 식물문양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벽화의 주제를 통해 중앙 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지닌 사상과 미적 이상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다양한 외래의 영향에서도 초기 벽화에서처럼 둔황 양식이라 할 만한 독자적인 영역이 형성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역남도의 미란 지방에서 발굴된 벽화 단편들은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불교주제의 내용을 헬레니즘적인 이란풍의 표현법을 바탕으로 묘사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이 벽화에 보이는 '티타'라는 화가의 명칭이 로마식 이름인 티투스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이 일군의 벽화가 서양문화의 영향 속에서 제작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벽화들의 중요성은 그것들이 동투르키스탄의 어느 벽화보다도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하여 이 벽화들이 아무다리야 강 북쪽의 파야스테페와 카라테페의 초기 불교벽화와 비슷한 연대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볼 때, 미란의 미술문화의 특성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투르키스탄 석굴 가운데 마지막 시기에 속하는 곳은 베제클리크이다.

서역북도에 있는 투르판에서 48㎞ 떨어진 곳의 화염산(火焰山) 협곡에 자리잡은 베제클리크 석굴은 총 83개소이고, 그 중 40개소가 벽화를 남기고 있다. 이 석굴들은 국씨고창시대(麴氏高昌時代 : 500경~643)에 개창되었고 13세기까지 이어진다. 유존된 대부분의 벽화들은 9세기말 이후 타림 분지를 장악했던 위구르족에 의해 완성된 것들이다. 벽화의 주제는 불교적 내용인데 예외적인 것도 존재한다. 38호 석굴 벽화에는 나무 밑에 백의(白衣)를 입은 마니교 신도들이 보인다.

이는 위구르족이 고창으로 이주했던 직후만 해도 그들 대부분이 마니교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베제클리크 벽화의 불교주제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 서원화와 천불도가 주류를 이룬다. 그밖의 베제클리크 벽화의 명품으로는 위구르 공양자와 왕자·왕녀 상을 들 수 있다. 이 투르판 지방의 회화 가운데는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복희·여와·수하미인(樹下美人) 등을 주제로 한 두루마리 그림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그림은 기본 도상이 중국적인 것에 근거하면서도 중앙 아시아적인 자신의 지역성을 강력히 표출하는 그런 유형에 속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인물의 인상이 서양인도 중국인도 아닌 바로 서역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밀화는 서투르키스탄의 경우, 이란 사산조의 마니교 경전에 들어 있는 삽화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이 세밀화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유행하여 초기의 바그다드 유파는 12세기경에서부터 몽골 침략(1258) 사이에 생겨났다.

이 시대의 세밀화는 장식성이 없는 간결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몽골 침입 이후에는 원대(元代) 화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몽골파가 성립되어, 윤곽선에 강약의 태세(太細)를 표현하는 필선과 부감(俯瞰) 구도가 나타나는 변화를 보인다. 중앙 아시아에서 세밀화의 전통은 서투르키스탄에만 머물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16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기작품의 예로는 15~16세기에 헤라트·부하라 등지에서 알리셰르·나보이의 시집에 그린 세밀화를 들 수 있다. 한편 중국회화가 서투르키스탄 회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좀더 살펴본다면 사실상 원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이 아랍 군대에 대패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전쟁의 포로였던 두환(杜環)의 〈경행기 經行記〉에 의하면 중국화가들이 고대 이라크 왕국인 아바스의 수도 쿠파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이보다 후인 10세기초에는 부하라에 시집온 중국 공주를 수행했던 화가들이 현지에서 활약했던 사실이 기록에 남아 중국회화의 서양파급의 정황을 짐작하게 된다.

중앙 아시아의 조각

중앙 아시아의 조각은 소형 인물·동물 등 토속을 주제로 한 테라코타와 종교를 주제로 한 불상조각으로 구별된다.

먼저 토속 조각으로는 서투르키스탄의 '페르시아 형상토기'를 들 수 있다. BC 9~8세기경에 제작된 여성상인 지모신상(地母神像)은 이란 고원, 특히 기란 주에서 출토되었는데, 둔부를 강조하고 주술을 담은 일종의 비너스 형태를 방불케 하고 있다. 또한 곧게 직립한 굵은 두 다리는 풍만한 이란계 여성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더욱이 이 조각에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는 모양은 신라 토우를 연상시켜 앞으로 연구할 과제이다. 한편 이러한 토속 조각 외에도 서투르키스탄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그리스풍의 조각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타지키스탄의 아무다리야 강 상류, 타흐티·상긴에서 발굴된 BC 3세기의 테라코타 인물두상(에르미타슈 박물관)은 전형적인 서양인 지배계층을 표현하고 있어 이런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지역 특성을 나타내는 이러한 조각들은 동투르키스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장웨이우얼 서역남도에 위치한 호탄 지방에서 출토된 5㎝ 내외의 테라코타 소형 인물·동물상(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목민들의 주술 세계를 적나라하게 재현한 작품들이다. 이것들은 대체로 2~3세기에 부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투르판 고분군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명기(明器) 인물상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인물상에 종이를 꼬아 팔을 만들어 붙인 것이 있어 소박한 토속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와 함께 나무로 만든 가면, 오리 인형 등의 소품들도 이 고장의 소탈한 미감을 표현해주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불상조각의 시원은 마투라 지방과 간다라 지방에서 비롯된 것이다(간다라 미술). 그런데 여기에서는 중앙 아시아 미술의 성격과 관련하여 후자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불상의 탄생은 예배 대상이 불탑(佛塔)에서 불상으로 이전된 것을 의미하며, 그 시기는 대체로 1세기경에 속한다.

석가의 현세 생애에 의미를 두었던 불교사상의 발흥과 더불어 서양 조각의 파급으로 촉발된 이 불상조각은 불전도(佛傳圖)에 관심을 보이면서 처음에는 부조형(浮彫形)으로 출발했으며, 2세기경에 이르러서부터 환조형(丸彫形)의 독립된 존상으로 나타났다. 이 초기의 불상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로마 조각의 형태를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불상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오뚝한 콧날을 비롯하여, 특히 옷주름의 표현은 서양조각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간다라에서 시작된 이러한 불상은 근처의 하다로 옮아가 하나의 지역양식을 이루었고, 이것은 점차 중앙 아시아의 동쪽으로 파급되어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간다라 불상의 전기에는 그 고장 석재인 편암(片岩)이 이용되다가 후기인 4~6세기에는 재료가 스투코로 바뀌었다.

대리석 가루, 모래, 석회 등의 혼합물을 이용한 이 스투코 조각법은 이후 중앙 아시아 전역에 중요한 조각매체로 발전했다. 바미안의 유명한 동·서 대불(大佛)은 4~5세기의 작품으로서 그 높이가 각각 38m, 51.8m에 달하는 중앙 아시아 최대의 불상으로 스투코로 제작되었다. 이 불상은 2001년초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집권세력이었던 탈리반이 국제사회의 보존 요구를 거부하고 우상숭배를 금한다는 이유로 파괴했다. 이 불상은 체구와 의습에서 간다라·마투라 양식과 쿠샨 왕조의 세계관을 반영했다.

이 불상에 대해 현장(玄裝)은 〈대당서역기〉에서 "금빛이 찬란하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전통은 동투르키스탄까지 이어져 둔황 석굴의 불상조각에서도 스투코 기법을 사용했다. 특히 둔황의 초기 석굴인 275호의 〈미륵보살상〉(5세기 전반)에 나타난 의습 표현은 서투르키스탄의 불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서역북도의 키질·쿰투라 등 투르키스탄의 각 지역은 독특한 용모, 머리 모양, 복식 등에서 개성적인 조각을 창출하여 그들의 예술성을 과시하고 있다.

중앙 아시아의 공예

중앙 아시아에서 공예품의 출발은 정주문화(定住文化)의 성격을 반영하는 토기에서 비롯된다.

이 토기들은 카자흐스탄 지방을 포함한 남러시아의 실크 로드 지역과 시베리아 남부 등지에서 발굴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BC 3000년경의 제작품으로 추정되는 서시베리아(보스네세노프카) 출토의 〈여인문토기편 女人紋土器片〉을 들 수 있는데, 토기표면에 음각선으로 타원형 안면의 윤곽과 둥근 눈을 분명하게 나타냈고, 특히 코와 입은 부조 형태로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청동기시대의 공예는 무엇보다도 스키타이 금세공품으로 대표되고 있다(스키타이 미술). 스키타이는 BC 7세기경 흑해 연안에서 발흥하여 활동했던 유목민족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적 성격은 오히려 정주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의 이오니아 문화와 접촉하여 독자적인 양식의 금세공법을 개발했다. 솔로카 지방의 구르간 묘에서 출토된 금제 빗(에르미타슈 박물관)에 장식된 조각물들은 그리스와 스키타이 두 문화가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투장면을 주제로 한 인물표현의 사실성이 그리스적인 것이라고 하면, 거기에 부착된 사자상은 유목세계의 상징성을 나타낸 스키타이 취향의 표출임이 분명하다.

나아가 이러한 조형성의 바탕에서 스키타이의 '동물 미술'양식이 창안되었다. 이 양식에 표현된 동물형태에서 관절 마디의 과장은 주술효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카프카스 북서부의 켈레르메스 출토의 호형(虎形) 금판부조(BC 6세기초)를 들 수 있다. 그리하여 스키타이 공예품은 야만적 생동성과 문명적 호화성의 결합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동·서 투르키스탄에서 비교적 넓게 파급된 공예품은 각배(角杯) 형식에 근거한 리톤이다.

이것은 흑해 연안에서 발달하여 동쪽으로 확산되었다. 파르티아 왕국의 옛 도시였던 폴타바·니사 등지에서 출토된 리톤은 BC 3~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서 말머리, 서양기원의 괴수 '그리핀' 따위를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붙여 헬레니즘 영향의 공예전통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지방의 리톤이 금속·상아 등의 고급 재료를 이용하는 반면, 이보다 후인 5세기경의 고대 이란의 리톤은 주로 토기로 만든 것뿐이다.

그러나 형태는 매우 다양하여 양·염소·말 등의 동물뿐 아니라 어떤 것은 인물상을 부착한 것까지 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고대 이란의 공예에서 중요한 품목은 사산조 때 크게 유행했던 유리제품과 은제 그릇 종류이다. 유리는 로마 시대에 이르러 생활용기로 개발되어 동쪽으로 보급되었던 것인데, 특히 이란에서는 유리면을 각지게 한 '컷 글라스'와 독일 쾰른에서 시작된 전통적인 점박이 잔 등이 유행했다(유리공예). 은제 접시는 이란 특유의 공예품으로서, 접시 바닥에는 말을 탄 제왕의 사냥장면(때로는 말이 달리는 것과는 반대방향으로 활을 쏘는 전통적인 방식의 '파르티안 슛' 문양을 묘사하기도 함)을 타출법(打出法)으로 표현한 것이 일반적이었다(은세공품). 또한 오이노코에 형의 주전자를 금속으로 만들고, 그 몸통에 전통적인 풍요의 여신 아나히타를 부조로 장식한 것이 사산 왕조 말기의 작품으로 출토되었다.

오이노코에 주전자는 당에 수입되어 당삼채(唐三彩)의 중국식 봉수형(鳳首形) 병으로 변모되기도 했다.

사산 왕조 시대의 공예품에 활용되었던 문양으로는 연주문과 쌍조문(雙鳥紋)이 유명하다. 이것들은 동전(東傳)되어 수대의 둔황 벽화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또한 연주문만은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북제(北薺:550~577) 때의 〈성문형(城門形) 돌 장식〉(독일 쾰른 동양박물관)에도 나타나고 있어서 6세기 후반의 이 문양의 분포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 문양의 대유행은 8세기 당의 공예품 가운데 숫막새 기와에서 비롯된다. 둥근 기와 마구리에 연주문을 둘러 장식하고 그 내부에는 봉황이 서로 마주보는 문양을 넣고 있다. 이런 문양은 곧 한국에까지도 전파되어 그당시 신라인들에게 크게 애호되었다.

중앙 아시아 금속 장식의 특징적인 공예미는 북중국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흉노의 활약지역이었던 내몽골 지방 항친치(杭錦旗)의 전국시대 말기 고분에서 1972년에 출토된 일괄 유물 가운데 특히 금관식(金冠飾)은 흉노족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머리에 얹는 둥근 테에는 다양한 동물문양을 부조로 새기고, 그 가운데에 4마리의 양이 새겨진 반구형 받침을 딛고 서 있는 환조형의 독수리는 웅비의 기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오르도스 지방의 금속공예에는 투각기법이 발달하여 많은 청동제 장신구에 응용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씨름하는 장면의 장신구(BC 3세기,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를 들 수 있다. 흉노 고분의 출토품 중에 비단·칠기·젓가락·동인(銅印) 등의 공예품들은 중국적인 영향의 산물이라 하겠으나, 〈사슴을 공격하는 괴수〉(노인울라, 쿠르간 6호분)의 카펫 디자인에서와 같은 '동물의 싸우는 장면'의 주제와 표현은 역동적인 유목민족 특유의 것이다.

서역남로의 호탄 지방은 기원전부터 옥을 동서에 수출하여 부를 축적했고, 일찍이 쿠샨 세력과 접촉하여 서방문화를 흡수했다. 지금 남아 있는 암포라 형태의 토기는 이러한 성격이 잘 반영되었다. 양쪽으로 귀를 단 손잡이 모양과 그릇 동부에 붙은 화첩 장식 등은 전형적인 서방의 형태이다.

중앙 아시아의 건축

서투르키스탄에서 사산 왕조의 건축은 그 기본구조가 이슬람 사원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어서, 이슬람 전통을 유지한 근세의 중앙 아시아 건축에 있어서조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산 왕조 건축의 특색은 건축의 기본 가구가 돔, 또는 궁륭형 천장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정방형의 평면을 가진 방에 돔 형태의 덮개를 씌우는 방식인데, 이것이 후에 이슬람 건축에 계승되어 기본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슬람 건축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모스크(예배당), 마도라세(학원), 대상의 숙소 등의 공공건물인데, 이것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돔과 아치이다. 특히 이슬람 시대의 돔 건축은 반구형이 뾰족하게 신장된 형식으로 발전했다. 또한 이슬람 건축 가운데 특이한 것은 '미나레트'라 불리는 고탑(高塔)이다. 이것은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부터 시작되어 이슬람 말기까지 유행했다. 그밖에도 이슬람 건축의 특징적인 면으로는 아라베스크 문양의 벽면장식을 들 수 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유형으로 타일 장식을 모스크 벽면에 부착하는 것은 12~13세기 이후부터 나타났다. 이와 같은 전통의 모스크 건축물로서 동투르키스탄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카슈가르의 이드카 모스크(1442)를 꼽을 수 있는데, 사원의 남북 길이가 140m에 달하는 동투르키스탄 최대의 규모이다. 또한 동투르키스탄에서 가장 높은 미나레트를 가진 것으로 투르판의 소공탑(1778)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햇볕에 건조시킨 흙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점이 매우 이채롭다.

동투르키스탄의 불교 건축은 기본적으로 중국 건축의 틀을 따르고 있는데 사원건축으로서 특기할 것은 석굴 구조이다. 석굴의 평면은 직사각형이며 돔 또는 원통형의 둥근 천장, 서방기원의 '모줄임천장' 등으로 되어 있고, 측실을 배치한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석굴은 예배의 장소와 승도가 거처하는 승방의 기능을 병행하고 있다.

키질 석굴의 예를 들면, 예배처로서의 중심주굴(中心柱窟)의 형식은 굴 내부 중앙에 기둥을 두어 기둥 좌우편으로 통로를 두고, 기둥 뒤에 좁은 후실을 형성하는 구조이다. 또한 대상굴(大像窟)은 중심주굴과 비슷한 형식인데, 다만 대형의 불상이 중심 전벽, 즉 주실 정벽 중앙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또한 승방굴에 중심주가 없을 때도 있으나, 특징적인 것은 주실 측면에 소실을 설치한 것이며, 주실 입구에는 원래 문이 달려 있으며, 부뚜막과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둔황 석굴의 승방굴은 후에 복두식(伏斗式) 천장의 방형굴로 바뀌었다. 이것은 천장부를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으로 덮는 방식인데, 전통건축 방식을 석굴에 옮겨놓은 것이다. 이러한 것 대신 궁륭형·모줄임 천장으로 변형·복합시킨 모양도 많이 있다. 그밖에 탑묘굴(塔廟窟)이 있는데, 이것은 중심주굴과 흡사한 형식으로서 북위시대의 석굴이 여기에 속한다. 이 탑형의 방주 역시 한대 건축의 고루(高樓)가 발전한 것이다. 그밖에 열반굴·대불굴(大佛窟)·배병식(背屛式) 등이 있다.

중앙 아시아 미술과 한국 미술과의 관계

한국에서도 청동기시대 이래 호형·마형대구(虎形馬形帶鉤)를 비롯해 에 관계된 유물들이 대체로 중앙 아시아의 스키타이 오르도스적인 성격을 반영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또한 신라시대의 〈천마도〉(천마총)에서도 말의 몸체 내부에 중앙 아시아의 특징인 감옥(嵌玉) 흔적의 반달형 무늬가 그려져 있어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경주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굴된 순금제 보검장식(→ 금제 감장보검)은 신라가 삼국 중에서도 중앙 아시아 문화에 가장 깊은 관련을 가진 국가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주는 유물이다(금제 감장보검). 전체의 조형과 여기에 이용된 누금법(鏤金法)·감옥법 등은 전형적인 중앙 아시아적 기법이다.

천마도
천마도

이와 유사한 작품이 러시아의 보로웨어에서 발굴되었을 뿐인 그 이동(以東)에는 이 작품 이외에 단 한 점도 없는 세계적 보물이다.

공예품으로는 사산 왕조 계통의 은제사발(황남대총 북분)을 빼놓을 수 없다. 더욱이 이 작품은 풍요의 여신 아나히타를 주제로 한 소략한 표현방식이라든가 그릇 안쪽에 타출법으로 인한 요철을 그대로 노출시킨 점 등으로 미루어 신라인의 제작이 아닌가 여겨져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부산 복촌동 고분에서 발굴된 마두장식 리톤(동아대학교 박물관) 역시 중앙 아시아에서 들여온 것을 바탕으로 해서 신라식으로 재창조해낸 조형물이다. 거친 듯한 솜씨로 웃음기 섞인 표정의 말머리를 조각하여 소박미와 해학미의 한국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리톤을 모델로 제작했음이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신라고분 출토품으로서 유리제품들은 중앙 아시아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보증하는 강력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미추왕릉지구 출토의 유리구슬(영남대학교 박물관)은 지름이 1.5㎝인 작은 구슬인데, 이 속에 눈썹이 짙은 서역계의 인물과 나무·새 등을 모자이크 방식을 써서 천연색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기법은 그당시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권에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밖에도 오이노고에 형태의 봉수형(鳳首形) 유리병(황남대총), 사산조 계통의 컷글라스(황남대총), 독일 쾰른 계통의 점박이 유리잔(금령총) 등은 그 성분과 기형에 있어서 전형적인 로만 글라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이 점박이 잔은 유럽을 기점으로 시베리아 남쪽의 스텝을 통해 전달된 것으로 상정되어 한국 고대 미술문화의 다지성(多枝性)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보듯이, 5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고신라가 직접 중앙 아시아와 교류했던 사실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든 후에는 주로 중국의 당(唐)을 통해 중앙 아시아 문화와 연결되고 있다.

원성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주 괘릉(掛陵)의 무인석상이 이란계 호인(胡人)을 닮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며 문인석상 역시 중앙 아시아의 위구르계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둔황 벽화의 산수 표현도 한국 불화와 무관하지 않다. 둔황 기원의 뇌형토파(雷形土坡)가 한국 불화에 나타나고 있는가 하면 둔황에서 활용되었던 운산문(雲山紋) 등이 통일신라시대의 도전(陶塼)에 묘사되었다.

더욱이 전자의 경우는 조선시대 후기 작품에까지도 그 유례를 남겨 우리를 놀라게 한다. 더 나아가 고대 한국 문화가 둔황 벽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근래에 밝혀져 양 지역의 교섭사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둔황 석굴 220호(642경)와 335호(686경)의 양 벽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묘사가 그것이다. 유마경 변상(變相)의 이 벽화에는 각국의 왕자·사절들이 주제가 되고 있는데, 그중에 조우 관식을 쓴 한국인이 들어 있다.

이것은 사마르칸트 벽화에 나오는 한국인 사절로 연결되는 징검다리일 뿐 아니라, 고대 한국이 중앙 아시아 문화의 당사국이었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중앙 아시아의 음악

개요

중앙 아시아는 일찍이 대상로 또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서문화교류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음악의 이동 또한 극심했기 때문에 단순한 방위개념이나 지형여건에 따라 구획하는 방법은 실제 음악과 거리가 멀어질 확률이 높다.

아프가니스탄과 중앙 아시아 정착민의 음악

첫번째 부류에 속하는 정착민들의 지역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하여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타지키스탄 공화국,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등이 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페르시아(이란) 문화권에 속해 있고 따라서 음악용어나 악기 등이 페르시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근동지방의 전통 이슬람 문화가 이 지역을 지배해온 결과, 다른 중앙 아시아 지역과는 달리 음악인의 사회적 신분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 지방의 음악은 궁중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전음악과 서민계층의 민속음악으로 대별해볼 수 있으며 최근에는 매스컴을 통한 대중음악의 확산도 새로운 조류로 대두되고 있다.

민속음악 분야에서는 무엇보다도 이에 종사하는 음악가가 드물다는 것과 악기 역시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음악은 주로 기악독주와 소규모 합주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기보법이나 체계화된 이론은 전혀 없으며 악기는 탄부르(또는 두타르)와 같은 페르시아계 악기의 변종이 많고 한국의 해금과 비슷한 현악기도 널리 쓰인다. 이밖에 오보에·플루트·양금·북 종류의 악기들도 사용된다.

탄부르(tanbur)
탄부르(tanbur)

노래는 거의 단성음악이며 기악음악은 종종 2성부 다성음악인데 드론 위에 선율이 연주되는 형식이나 일반적으로 제2성부가 제1성부의 4도나 5도 위 또는 아래에서 제1성부와 동일한 선율을 연주하는 오르가눔 형식을 취한다(드론, 오르가눔). 악곡구조는 주로 2부분형식이나 3부분형식의 소곡형태이며 짧은 선율형이 약간의 수식을 더해가며 계속 반복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선율 악구의 반복과 리듬의 강조가 흔한데 이것은 음악이 주로 무용 반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민속음악은 주로 남성 위주로 이루어지며 찻집이나 잔치가 있는 집에서는 이들의 연주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여성들의 음악활동은 주로 폐쇄된 장소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는 데 비해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 계곡 지방의 여성들의 강렬한 음악전통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보편적인 틀 안에서도 다양성은 존재하는데, 심지어 같은 종족이라도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음악이 달라지며 같은 악기를 가지고도 사람과 장소에 따라서 음악이 달라지기도 한다.

민속음악과는 달리 부하라사마르칸트의 궁정에서 전개된 고전음악들은 비교적 체계적이고 논리정연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 범세계적인 음악전통을 상징한다. 중세의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를 통해 널리 전파되었으며 중국 나라의 궁정음악과도 관련되어 있다.

당시의 음악을 비롯한 악기의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가는 다음과 같은 어느 궁중사관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황금목을 가진 가수와 훌륭한 연주가들은 페르시아풍의 모티프를 가지고 터키식 기법에 아랍의 선율을 따르며 중국식 창법과 알타이적 박자를 몽골풍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연주한다."

17세기경에 와서 궁중음악은 기악과 성악이 어우러지는 하나의 모음곡으로 정착되었는데 부하라의 궁중에서는 6개의 마캄이라는 의미의 샤스마캄으로 알려졌다.

아랍어에서 기원한 마캄은 다양하게 해석되며 이로부터 궁중에서는 각기 나름대로 마캄을 정착시켜 갔는데 그 예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서는 무카무라고 하는 12곡을 기초로 하고 있다. 신라시대 우륵의 가야금곡이 12곡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중에는 사자기라는 중앙 아시아 전통오락의 이름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 중앙 아시아 마캄이 동진(東進)해서 신라의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

중앙 아시아 유목민의 음악

여기에는 더욱 광대한 지역의 음악이 포함된다.

카자흐 초원의 서남부인 투르크멘의 사막에서부터 몽골 평원까지, 그리고 고비 사막에서 태평양과 북극에 근접하는 시베리아의 상록수림이나 타이가 지대와 툰드라 지대에 걸쳐 광활하게 펼쳐진 지역 전체가 유목민들의 생활무대였다. 유목민의 생활 자체가 그러했듯이 이들 지역의 거주자들은 서로 빈번하게 이동했으므로 언어뿐만 아니라 음악용어나 악기 등에서 많은 공통점을 볼 수 있다.

유목민들의 음악은 그 사회적 기능에 따라 대개 의식에 쓰이는 주술적 기능과 종족의 화합과 단결을 고취시키는 기능, 오락적인 기능의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샤머니즘에 따른 각종 의식의 경우가 주술적 기능에 속하는데 여기서 음악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음악은 샤먼이 최면상태에 몰입하는 것을 도울 뿐 아니라 그가 보이지 않는 혼백과 접촉하는 일을 부추기기도 한다. 또한 샤먼의 악기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특히 커다란 탬버린처럼 생긴 시베리아 샤먼의 은 그가 저승으로 여행할 때 타고 갈 말로 간주하여 대단히 소중히 다루어진다.

키르기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서는 활과 말총현으로 이루어진 피들인 마두금(馬頭琴)이 시베리아의 북과 같은 기능을 갖는데 마두금의 머리에는 금속고리를 달기도 하고 움푹 팬 곳에는 혼백의 모습이 비치도록 거울을 달았다. 부족의 역사를 내용으로 하는 서사적 낭송음악은 부족의 단결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중앙 아시아 투르크계 유목민에서는 박시라고 하는 샤먼 겸 음유시인이 그 역할을 맡았다(서사시). 우리의 박수무당을 연상시키는 단어이기도 한 그곳의 박시들은 대개 피들이나 류트 같은 현악기 반주에 맞춰 서사시를 노래하는데 어떤 음악은 며칠에 걸쳐 공연되는 것도 있다.

이처럼 긴 줄거리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데 사용되는 음악은 대개 고정된 짧은 선율을 반복 사용한다. 서사시를 낭송하고 다니는 박시들의 전문성은 대단해서 키르기스스탄의 어느 박시는 그들 고유의 서사시인 마나스를 30만 행이나 암송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오락기능으로서의 음악은 각 종족의 풍습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전 지역을 통한 공통된 오락행사로는 음악경연대회가 있다.

주로 민스트럴들이 참여하는 이들 경연대회는 엄격한 규칙하에 치러지는데 각기 난숙한 기교와 재치로 시를 짓거나 음악성을 과시하며 승부를 겨룬다(민스트럴).

히말라야 산맥 주변 국가들의 음악

이곳은 티베트·부탄·네팔·시킴 등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중요한 고장이다.

이들의 음악에서는 7세기경 이후 도입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종교예술). 특히 티베트 불교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티베트의 종교음악은 그 인근지역은 물론 멀리 몽골에까지 퍼져나갔다. 티베트의 음악은 중앙 아시아의 음악 가운데 유일하게 악보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 기보법은 대략의 선율 진행만을 암시하는 네우마식의 기보법이다(네우마). 또한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인 속성이 농후하다.

네우마(neuma)
네우마(neuma)

특히 사원의 악단의 개별악기와 성가의 길게 끄는 음은 그 자체로 진언, 즉 견실한 명상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육신의 소리의 구현임에 분명하다(진언). 사원의 악기는 이곳이 문화이동의 교차로임을 충분히 드러내 보이는데 중국에서 유래한 심벌즈가 있는가 하면 인도의 영향이 엿보이는 소라 껍질로 만든 나팔 등이 있다.

심벌즈(cymbals)
심벌즈(cymbals)

대형 오보에나 3m가 넘는 금속나팔은 근동지방에서 전해진 듯하며 사람의 다리뼈로 만든 짧은 나팔 1가지만이 이 지역 고유의 발명품임에 분명하다. 한편 히말라야 국가들의 음악 중에서 티베트를 제외한 지방의 음악들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네팔에는 유랑음악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분(caste)에 따라 부류가 구분되며 사용하는 악기나 음악내용도 그룹에 따라 각각 다르다.

중앙 아시아의 무용

종교의식 등 특정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중앙 아시아의 무용은 이 지역 사람들의 정신적·사회적 생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앙 아시아의 무용은 크게 2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샤머니즘과 관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와 연관된 것이다. 다만 이슬람권 중앙 아시아의 무용은 이와 사정이 다르다. 중앙 아시아의 무용은 종교적 행사와 관계가 깊을 뿐 아니라 그 자체의 미적 가치가 결코 적지 않다. 청중까지 동참하는 공연에서의 신체적 혹은 육성의 표현은 대단히 우아하고 율동적이며 특히 손과 발의 동작, 몸의 움직임 등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적 감각은 의상·가면·분장 등에서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샤먼의 역할은 신탁을 대행하는 역할에서부터 질병의 치료, 희생의 공양, 영혼의 인도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동부 중앙 아시아의 알타이족 가운데 말을 제물로 올리는 의식이 있었다. 이때 샤먼은 말에게 최면을 걸어 서서히 죽인 후 그 고기를 바친다. 그후 샤먼은 북을 울리고 소리를 하며 말의 영혼을 타고 하늘을 오르듯 눈금이 새겨진 장대 위를 한칸 한칸 높이 오른다. 그리고 거기서 샤먼은 청중들에게 한 해의 풍작·길흉·전염병 등에 대해 공수를 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즐거운 여흥과 주석이 이어진다. 이처럼 중앙 아시아 샤먼의 의식은 한국의 굿판처럼 원시적이나마 춤과 연극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의식에서는 보다 진전된 공연예술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는데 (Cham)이 그 좋은 예이다. 불교사원에서 거행되는 참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티베트의 샤머니즘적 의식무용에서 출발한 것으로 시대와 더불어 점차 불교교리에 부합되는 내용으로 변모했다. 참은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몽골이나 그밖의 소련권 중앙 아시아 국가로 전파되었고 결국은 동부 중앙 아시아의 중요한 종교적 여흥으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불교의 확산은 중앙 아시아에 많은 종단을 낳았고 이들 종단의 사원에서는 참의 공연을 정례화했다.

무대는 사원의 뜰에 설치했고 라마 같은 귀족을 제외한 청중은 춤판의 가장자리 또는 맨바닥에 앉거나 서서 공연을 관람했다. 북과 호른을 가진 음악인들이 반주를 시작하면 무용수들이 건물이나 막 뒤에서 나와 춤을 춘다. 이처럼 참의 공연에서는 무용이 주요한 기능을 한다. 이밖에도 중앙 아시아의 무용으로는 여러 종류의 민속무용이 있는데, 주로 축제나 결혼 같은 행사 때 오락적인 기능으로 공연된다. 춤과 음악은 항상 연결되어 있지만 때로는 악기의 반주 없이 즉흥적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초원이나 사막지대의 유목민들은 양식화된 무용이 없지만 히말라야 지방의 정착농민들은 제법 양식화된 무용이 있어서 몇몇 아마추어 무용단들이 오락행사 때 활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춤은 남녀혼성의 원무이고 어떤 것은 서로 마주보며 줄지어 추는 내무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춤의 스텝이나 동작은 고도로 규격화되었고 그 율동의 절도는 일정하게 구르는 발동작에 의해 강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