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공예

유리공예

다른 표기 언어 glasswork , 琉璃工藝

요약 유리를 재료로 하여 만든 제품과 그 제작기술.

목차

접기
  1. 유리 성형과 장식
    1. 유리불기
  2. 서양의 유리공예
    1. 고대
    2. 중세
    3. 15~19세기 중반
    4. 19세기 중반과 20세기
  3. 중국의 유리공예
  4. 한국의 유리공예

유리는 규석(또는 규사, SiO2)·석회(CaCo3)·소다회(Na2CO3) 등을 조합하고 색을 내기 위하여 산화구리(CuO 또는 CuO2)·산화코발트(CoCO3) 등의 금속산화물을 첨가한 뒤에 1,400~1,500℃의 용해로에서 녹인 인공의 재료이다.

그 결과물은 뜨거운 액체로, 식으면 결정되지 않고 단단한 상태로 냉각된 무기질 용융물로 비결정고체로 불린다. 유리는 주요성분에 의해 소다석회유리, 산화납(PbO)이 첨가된 납유리, 붕규산유리(boro-silicate glass) 등으로 구분되며, 용도에 따라 판유리와 용기유리 등에 속하는 보통유리와 조명유리, 이화학용 유리 등에 속하는 특질유리로 나눌 수 있다. 유리는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것이 있으며 내화학성이 크고 불연재이며 녹이 슬지 않고 강도가 높아 흠이 잘 나지 않는다.

현대유리공예
현대유리공예

유리 성형과 장식

유리불기

액화상태의 유리를 쇠로 만든 대롱 끝에 묻힌 다음 입김을 불어넣어 성형하는 기법으로 나무, 가위 같은 도구를 이용해 자유롭게 만드는 것(free blowing)과 거푸집에 불어넣어 형태를 만드는 것(mold blowing)이 있다.

젖은 모래에 형태를 찍어낸 후 액화상태의 유리를 말아넣는 방법인 샌드 캐스팅(sand casting)과 유리가루를 내화석고에 녹이는 방법인 파트 드 베르(pate de verre)가 있다. 이외에도 판유리를 잘라 실리콘 에폭시, 자외선풀 등으로 접합하여 구조적 형태를 만드는 방법, 거푸집에 유리를 용융·접합시켜 내려앉히는 방법(fusing slumping), 채색유리를 잘라 납선에 끼워 연결시키는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 그리고 유리봉이나 유리관을 녹여가며 기물을 만드는 램프 워킹(lamp working) 등이 있다.

장식기법으로는 작은 그라인더로 표면을 긁어내는 인그레이빙(engraving), 돌연마기에 갈아내어 면이나 선 등으로 문양을 만들어내는 커팅(cutting), 플루오르화수소산(HF)과 황산(H2SO4)으로 유리 표면을 부식시키는 에칭(etching), 모래를 뿜어내 표면을 깎아내는 모래분사(sand blasting), 저융점 유리질의 안료로 표면을 채색하는 에나멜링(enameling) 등이 있다.

서양의 유리공예

고대

근동지방의 문명 중 어느 곳에서 유리가 처음 만들어졌는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집트에서 BC 2500년경에 제작된 유리구슬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BC 1490년 이후에 정교한 유리그릇이 이집트에서 제작되었는데 이것은 거름을 섞은 점토로 기초형태를 만들어 금속봉에 고정시킨 다음 불투명 청색유리로 덮어 씌우고, 그 위에 대조되는 노랑색·흰색·녹색의 유리실로 감다가 빗 등의 도구로 깃털이나 지그재그형의 문양을 놓은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대개 작으며 향수병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미케네 문명시대(BC 1400~1200경)부터 만들어진 그리스 유리는 이집트 기법을 빌려 소형의 건축 세부형태나 용기 등이 만들어졌다. BC 6세기에 들어 그리스 유리는 대대적으로 생산되었고 이탈리아와 서방국가로 점점 퍼져나갔다. 유리장식은 이집트 제18왕조의 것과 비슷한 청색 바탕에 밝은색조의 유리띠를 두른 용기들도 있었으나 그리스 특유의 백색 바탕 보라색 유리띠 장식도 만들어졌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채색유리공예품으로 유명했는데, 다양한 색의 유리봉을 섞어 복합유리막대를 만드는 기술과 이것을 잘라서 반복되는 문양 등을 나타내는 모자이크 디자인이 발달했고 별이나 꽃 모양의 모자이크 디자인을 '밀레피오리(Millefiori:'1,000개의 꽃') 유리'라고 불렀다(→ 색인:밀레피오리 유리). 또한 유리를 거푸집에 압형하는 것과 유리가루를 거푸집에 녹이는 기법이 발달했는데, 이것은 후대에 널리 쓰였으며 밀레피오리 기법과 혼용되어 유리그릇에 무수히 많은 형태의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밀레피오리(Millefiori)
밀레피오리(Millefiori)

유리공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은 BC 1세기경 시리아인에 의해 개발된 유리불기이며, 이로 인해 로마제국의 유리산업은 경이적으로 성장했다. 이 기법이 발달하면서 다른 도구가 필요없이 유리방울만으로도 손잡이·굽·장식 등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리불기 (glassblowing)
유리불기 (glassblowing)

시리아 유리공예가들은 유리제품의 수요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이주했는데, 1세기 중반 이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하면서 이탈리아는 유리제품의 주요생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특히 인그레이빙이 유행했으며, 선조들의 기술을 능가하는 '새장 컵'(diatreta)은 이탈리아 유리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색인:인그레이브드 글라스). 로마 시대 후반에는 시리아인의 트레일링(trailing)이 연성(延性) 유리에 적합했으며, 그릇의 몸통 또는 목을 유리실로 감거나 환상적인 형태의 손잡이를 만드는 데 적합했다.

중세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리제작은 세계 여러 곳에서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동방에서는 유리제작 기술이 이슬람으로 계승되어 발전한 반면, 북쪽에서는 연료가 풍부한 숲속의 작은 공장에서 불순물이 섞인 녹색 또는 노란색을 띤 단순한 형태의 유리그릇이 만들어졌다. 두드러진 특징이 없는 비잔틴 유리는 커팅이 그 주요 장식기법이었으며,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로마와 비교될 정도로 독특한 이슬람 양식의 유리공예를 발전시켰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그레이빙이 활기를 띠면서 이전부터 행해졌던 파셋(facet 磨面)과 보스 커팅(boss cutting:돌출장식깎음)기법이 계속되면서 라이니어 인태글리오(linear intaglio 線刻)와 릴리프 커팅(relief cutting:부조장식깎음)에 의해 더욱 화려하며 새로운 형태의 유리공예로 발전했다(→ 색인:컷 글라스). 이집트에서는 새로운 기법의 개발과 전통기법의 고수를 동시에 유지하는 추세였다.

인태글리오(linear intaglio)
인태글리오(linear intaglio)
파셋(facet)
파셋(facet)

새 기법으로는 한 면의 끝에 무늬가 새겨진 집게로 유리를 찍어내는 것이다(→ 색인:스탬핑). 무엇보다도 금속성 광택 색상의 발명이 뛰어난데, 이것은 은을 포함한 물감으로 색칠해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소성(燒成)할 경우 연노랑색에서부터 갈색까지 다양한 얇은 금속막이 생긴 것을 활용하여 장식하는 것이다(→ 색인:광택유리). 시리아에서 이집트의 파티마(Fāṭmid) 왕조 멸망 이후 시리아로 건너간 유리공예가들에 의해 도금유리와 에나멜 유리 공예의 기초가 세워졌다.

13세기 시리아 유리는 크게 알레포에서 제작된 두껍고 보석 같은 에나멜 장식유리와 다마스쿠스에서 제작된 아주 정교한 그림이 있는 장식유리로 나눌 수 있다. 1300년경에는 몽골과 타타르족에 의해 중국의 유리공예는 이슬람 유리에 그 영향을 미친다.

15~19세기 중반

7세기에 들어 유리산업이 정착된 베네치아는 10세기에 베슬(vessel) 유리를 만들고 15세기 후반에 에나멜 유리를 선보였는데, 이는 시리아의 유리공예와 비슷한 면을 보이지만 자체적으로 기술개발된 것이다.

베네치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투명·무색유리의 생산인데, 이것은 중세에는 이탈리아에서만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수정과 유사하기 때문에 '크리스탈로'(cristallo)라고도 불렸다(→ 색인:베네치아 유리). 이중 소다 크리스탈로는 매우 무르고 빨리 식어 장인들의 뛰어난 속도감과 재주를 필요로 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베네치아 유리(Venetian glass)
베네치아 유리(Venetian glass)

16세기초에는 단순한 형태에서 점차 정교하고 환상적인 모양의 유리제품으로 발달했다(→ 색인:라티치니오 유리). 특히 불투명한 하얀실로 장식하는 기법이 유행했는데, 후에 이것이 점차 더 복잡하게 발달하여 하얀 레이스 형태의 유리, 거푸집에 넣어 불어서 만든 유리, 뜨거울 때 얼음이나 평면에 굴려 깨진 듯한 표면을 가진 유리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가들은 베네치아를 떠나거나 외부사람에게 비법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었는데, 16세기경 베네치아 유리공예가들이 제노바 근처 알타레 지방으로 도망을 가면서 이곳은 제2의 유리생산지가 되었다(→ 색인:알타레 유리). 도망간 베네치아인과 의욕적인 알타레인은 이탈리아의 유리기술을 스페인·포르투갈·오스트리아·독일로 전파했고, 이탈리아 공예가는 북쪽으로 영국·덴마크·스웨덴으로 전파시켰다.

16세기말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각 나라마다 유리공예의 변형 발달이 이루어지고 그 국제적인 양식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는데, 베네치아 양식이 그 근원이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다이아몬드 침(針)으로 새긴 인그레이빙이 발달되면서 더욱 유리공예의 장식기법이 발달했다(→ 색인:다이아몬드 포인트 인그레이빙).

독일에서는 17세기말에 접어들면서 베네치아 유리공예 양식에 대한 반동이 자리잡았다.

로마 제국시대 후반기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온 지방 타입의 초록색 유리가 있었는데, 이것은 식물을 태워 얻은 칼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발트유리'(Waldglas:숲속유리)라고도 불렸다. 이 재료를 이용하여 아름다운 색상의 원통에 돋을새김 장식이 박혀 있는 맥주잔과 컵 모양 또는 달걀형 사발 모양의 포도주잔 등이 다양하게 제작되었는데 이는 독일의 고전적인 포도주잔이 되었고 18세기까지 사용되다가 약간의 변형을 거쳐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색인:뢰머). 17세기 후반에는 베네치아 타입의 크리스탈로가 독일형으로 개발되었다.

특히 1605년 프라하의 루돌프 2세의 보석세공가인 카스파르 레만이 만든 비커는 보석에서 사용한 인그레이빙 기법을 적용한 것으로 육중하고 수정같이 맑은 탄산칼슘-석회유리를 보다 깊게 깎아 가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17세기말에는 크리스탈 투명유리나 칼륨 라임 유리에 장식된 보헤미아-슐레지엔 지방의 부조 인그레이빙이 뛰어났으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음각 인그레이빙도 사용되었고 점차 더많이 쓰이게 되었다.

독일의 유리장식기법에서 인그레이빙만큼 중요한 것은 에나멜링이었는데, 이것은 16세기말 보헤미아에서 실용화되었다. 1650~75년에 뉘른베르크에서는 에나멜 그림을 좀더 세련된 양식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스테인드 글라스 기법에서 빌려온 것으로 검정색과 암갈색의 그림을 조그만 원통형의 비커(입이 넓은 큰 잔)를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또한 18세기 보헤미아에서 발달한 '금장식 샌드위치 유리'(gold sandwich glasses)는 비커나 잔을 2겹의 유리로 만들어 철침(鐵針)으로 원하는 디자인을 부식한 다음 금박을 사이에 끼워 넣어서 장식한 것이다(→ 색인:츠비셴골트글레저).

영국에서는 중세 후반부터 대부분의 유리공예품이 교회용품으로 만들어졌다.

영국의 유리는 16세기 후반에 들어 독일의 발트 유리 양식과 이탈리아 이주민들이 들고 온 국제적인 베네치아 양식으로 크게 나뉘어 발달했는데, 1615년 유리를 굽는 가마의 주연료인 나무 사용이 금지되자 나무에 의존하는 발트 유리 양식이 베네치아 양식으로 대체되었다. 1650년경이 되면서 유리산업은 왕에 의해 부여되는 독점사업형태의 하나였으며, 독립사업가인 로버트 만셀 경의 뛰어난 유리산업 경영으로 유리는 영국 산업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외국의 자원과 기술에 많이 의존해왔던 영국의 유리산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오르그 레이븐즈크로프트는 1675년경 자국에서 생산되는 재료에 산화납을 첨가하여 베네치아 유리보다 단단하고, 무겁고, 내구적인 납유리를 만들었다(→ 색인:레이븐즈크로프트). 이 납유리는 음료수잔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17세기말과 18세기초 영국 유리공예를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레이븐즈크로프트(George Ravenscroft)의 유리공예품
레이븐즈크로프트(George Ravenscroft)의 유리공예품

18세기 중반에는 한때 모든 유리제품에 인그레이빙이 유행으로 사용되었다가 후에 커팅 기법이 널리 사용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 사용된 에나멜 기법은 중국풍을 띤 흰색의 불투명 유리에 장식되었고, 금도금도 포도나무 줄기와 같은 단순한 디자인과 함께 사용되었다. 18, 19세기를 통해 영국의 컷 유리는 유럽 전역에서 널리 모방되었다.

미국의 유리산업은 유럽의 것이 들어온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608년 런던회사(社)가 '유리'와 구슬생산을 위해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유리공장을 세웠고, 1739년 카스파 위스타가 뉴저지 주의 살렘 군(郡)에 실용 유리그릇을 만드는 공장을 세워 최초로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유리공예에 길이 남을 헨리 윌리엄 스티겔은 1763년 병과 창문유리의 생산만을 목적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랭커스터에 공장을 세웠는데 위스타와 함께 유리 전통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스티겔 유리의 특징은 투명함과 인공적인 색유리의 사용이며, 특히 유리불기 기법으로 장식된 다이아몬드 데이지 패턴은 스티겔의 독창적인 모양이었다. 독립전쟁 이후 올리브 유리공장, 피킨 유리공장, 뉴브레멘 공장 등이 대표적으로 유리를 생산했으며, 요한 프리드리히 아멜룽이 세운 뉴브레멘 공장(독일 브레멘에서 시작된 공장)은 1800년 이전에 미국에서 생산된 고급 유리제품에 서명과 날짜를 새긴 재미있는 제품을 만들었다.

1808년 피츠버그에 세워진 베이크웰은 1817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에게 유리식기를 제공한 최초의 유리공장이며, 1825년 손잡이를 만들기 위한 기계식 압형 특허를 취득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곳이다(→ 색인:베이크웰 유리). 1818년에 세워진 뉴잉글랜드 유리회사는 유리불기와 인그레이빙을 사용한 수준 높은 유리제품 생산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유리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1815~70년에 제작된 것인데, 이것은 그림을 그린 것과 같이 거푸집으로 만든 일련의 물병으로 숙련석공조합(freemason)과 관련된 문장들, 경제적 상황과 연결된 문장과 디자인, 국내 영웅의 초상과 그들의 행적에 관한 디자인, 대통령 후보의 정치적 선전문구와 초상 등 4가지로 구분되어 만들어졌다.

1825~50년 사이에는 레이스 시대(lacy period)의 유리공예라고 하는데 이는 거푸집으로 뜬 유리의 고르지 않은 표면을 레이스처럼 생긴 패턴으로 덮어 씌웠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1830년에는 거푸집에 들어가는 유리의 양에 관계없이 두께를 일정하게 해주는 캡링(capring)이 발명되고 압착유리가 접착되면서 미국의 유리는 대량생산품목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세기 중반과 20세기

1851년 영국의 대전람회에서 선보인 현대 유리는 자의식을 표현하는 장식예술의 하나였다.

이것은 곧 예술잡지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박물관에서는 유리공예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깊게 깎은 크리스털의 생산을 계속했고, 인그레이빙 유리, 색유리 등은 유럽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용해로를 사용하는 전통유리 제작기법을 주창해온 베네치아 유리공장도 유리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전람회를 계기로 절정기를 맞이한 영국의 유리는 1860∼70년대에 들면서 베네치아 양식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빅토리아 시대의 걸작품을 선보이게 된다.

빅토리아 중기의 획기적인 형태는 스타워브리지의 유리공예가들이 카메오 유리로 만든 포트랜드 꽃병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특징은 어두운 바탕색 위에 백색 부조장식을 붙인 것으로 에칭과 조각술을 요하는 제품이었다(→ 색인:카메오 유리). '페가소스 꽃병'과 같이 초기의 중요한 작품이 1870년대에 존 노스우드에 의해 제작되었고, 19세기말에는 조지 우덜에 의해서 중요한 카메오 작품이 만들어졌다.

영국 예술비평가인 존 러스킨이 〈베네치아의 돌 The Stones of Venice〉에서 제창했듯이 유리분야에 대한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은 큰 의미를 지녔는데, 특히 조형형태와 용해로에서의 장식기법에서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고급용기의 디자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압형유리의 디자인은 더 복잡해지고 표면은 유리불기로 만든 것같이 부드러워졌다. 비더마이어 양식과 유럽의 후기 양식을 띤 정교한 유리제품이 1860년대에 만들어졌다.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 기간중에 컷 크리스털 작품이 부활하여 1880~90년대에 계속되었다. 1893년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가 첫 선을 보인 파브릴 유리는 지금까지 제작된 어느 유리보다 형태·색상·모양에서 한 차원 높은 수준 있는 유리작품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 누보 형식을 띤 것이었다(→ 색인:티퍼니). 특히 그들이 창작해낸 금속광택유리는 중부 유럽에서 새로운 유행을 일으킬 만큼 인기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새로운 형태의 미국 현대유리 디자인을 가진 압축유리가 등장했고, 오븐용 그릇 같은 대량품을 코닝유리사(社)가 제작했다. 특이한 것은 조각가와 디자이너를 고용하여 조각장식된 유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이 회사가 상품유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또한 1960년대 순수미술적 접근을 시도한 하비 리틀턴과 도미니크 라비노 같은 유리공예가들이 개인 스튜디오에서 유리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체크·오스트리아·독일 등의 중부 유럽에서는 비더마이어 시대의 보헤미아 유리와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겹유리와 색유리가 제작되었고, 영국 양식에 깊이 영향을 받은 컷 크리스털 유리도 많이 제작했으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864년경 루트비히 로브메이어에 의해 시작된 인그레이빙 유리가 부활되었고, 중부 유럽에서 유겐트슈틸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아르 누보 양식이 호리호리한 형태와 자연스럽게 흐르는 유기적 모티프를 특징으로 성행되었다. 1897년 티파니의 유리전시회는 형태뿐만 아니라 과중하게 채색된 금속광택유리가 많은 관심을 끌면서 1900년대를 이끄는 유리형태를 선보이게 되었다.

1900년대는 빈의 산업미술학교와 뜻을 함께 하는 유리작품 디자이너들이 보다 순수한 접근을 시도하는 계기가 마련되는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체크의 유리공예도 대부분은 인그레이빙을 사용한 것이었으며, 공예가·건축가의 합동 디자인은 미래의 입체파적인 경향을 예시하는 듯했다. 오스트리아의 로브메이어 공장은 부조로 조각된 유리작품을 생산했고, 독일의 로젠탈회사는 자기와 유리를 조화시킨 생산품을 제작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도 중부 유럽이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질 좋은 유리를 생산했고, 주로 컷 크리스탈과 색유리를 생산했으며, 다양한 색상과 문양은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았다.

특히 개인작가들의 유리공예기법의 개발은 활발했다. 예를 들어 에나멜 유리를 연구하고 중세 시리아 유리를 부활시키려 했던 조제프 브로카르, 두껍고 반투명한 균열유리장식을 개발한 외젠 루소, 당시 유행했던 일본 예술을 작품에 반영했으며 비대칭형태의 작품을 제작하여 19세기말의 아르누보 형식에 크게 영향을 미친 에밀 갈레 등이 있었다.

1920년대 르네 랄리크는 유리불기와 압형으로 제작된 유리에 부조장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 명맥만 유지해오던 스웨덴 유리가 스웨덴 예술공예협회의 노력으로 활기를 찾아 화가와 유리공예가의 연합으로 새로운 유리공예의 기운을 만들었다. 1920년대 스웨덴 유리를 대표하는 인그레이빙 유리가 1930년대에는 프랑스 작가들을 따라 색깔이 있고 형상화된 유리제품으로 바뀌었고, 덴마크와 노르웨이도 스웨덴의 유리제품을 모방했다.

핀란드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였던 건넬 니만이 두꺼운 재질의 유리를 자유롭게 불어서 비대칭적 형태를 만들었으며, 벨기에의 발생랑베르 공장은 깊게 파낸 컷 크리스탈 생산으로 중요하다. 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 반도국들의 개발과정을 본받으면서 예술가나 건축가에게 디자인을 맡기거나 개별적인 장식을 한 식탁용기를 생산하는 등의 새로운 장식기법을 시도함으로써 현대 유리공예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유리산업은 부분적으로 부활되었는데, 제품들은 무라노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베네치아 양식을 용해로에서 정교하게 변형시킨 것이었고, 1920년대 이후부터 색채와 형상유리를 새로 개발하고 화려한 유리색상을 구사하는 등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색인:베네치아 유리).

중국의 유리공예

서주시대에 들어서 중동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유리구슬 같은 장식품을 계기로 유리공예가 시작되었는데, 이 초기 유리기술은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습득한 것이었으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자체 내 개발을 통하여 독특한 유리제조기술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대(漢代)에는 중국인들이 애호하는 옥(玉)을 대신하여 유리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한대의 유리벽, 양저우[楊州]에서 출토된 유리 의편, 창사[長沙]에서 출토된 유리제 검과 검식, 허베이 성[河北省]에 있는 유승의 묘(BC 113)에서 출토된 유리제 이배, 다양한 유리구슬과 유리 이당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옥의 대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납유리 성분을 사용하여 옥과 비슷한 색과 질감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중국의 고대 유리가 서양의 소다유리와는 다른 고유한 특징을 지니게 되는 이유이다. 특히 전국시대와 한대의 유리제품은 납과 함께 바륨도 함유되어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

서방으로부터는 잠자리눈 모양구슬(청령옥) 같은 장식품이 수입되었고, 남방의 해로와 오아시스 사막을 통해서는 로마 유리그릇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제품들이 전해졌다. 이른바 서역과의 교역에 의해 서양의 유리그릇이 한대 이후 남북조시대를 거쳐 대에까지 단속적으로 유입되었으며, 송대에도 적지 않은 이슬람 유리제품이 발견되고 있다.

진대 이후 위축되었던 중국의 자체 유리생산은 수·당대에 이르러서 다시 중국산 재료의 유리제품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주로 탑(塔)에서 발견되는 사리병과 유리그릇은 납을 많이 함유한 납유리였으며, 대 이후에는 유리불기 기법이 사용되었다. ·대에는 기명 위주로 유리제작이 이루어졌으며, 유리의 성분도 다양해졌다.

특히 명대말 청대초에 유리공예의 부흥이 일어났으며, 1680년 궁정용 유리 어기를 제작하는 유리청이 설립되어 이를 중심으로 유리공예가 급속히 발전했다. 건륭연간에는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러한 청대의 유리를 일명 '건륭유리'라고 부른다. 또한 대외용 하사품으로도 쓰여 훌륭한 제품들이 전해오고 있다.

한국의 유리공예

대부분 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된 것을 통해 적지 않은 고대 유리제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한국의 유리는 색·형태·용도·성분·기법 등이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그 유래와 제작법 및 제작자를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황남대총 출토 유리잔
황남대총 출토 유리잔

기록에 의하면 한국에서 최초로 제작된 유리는 구슬류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고 하여 최근 발견된 부여 합송리 유적에서 출토된 7개의 밝은 남색 유리 관옥이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유리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유리 관옥의 성분은 납과 바륨이 함유된 것으로서 전국시대말이나 한대의 중국제 유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아마도 중국에서 수입된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관옥구슬로 시작된 한국의 유리제작은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활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이미 현존하는 이 시기의 유적 가운데 고분·주거지·조개무지 등 장소에 관계없이 유리구슬류가 빠짐없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한국의 장식용 유리를 대표하는 유리구슬은 형태상 일반적으로 둥근 구슬(丸玉), 굽은 구슬(曲玉), 대롱 구슬(管玉) 등으로 구분되나 좀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하면 주판알 모양 구슬(多面玉), 대추 모양 구슬(棗玉), 참외 모양 구슬(蜜相玉), 꽃잎 모양 구슬(花形玉), 4면체·6면체 등의 각형(角形) 구슬, 마름모꼴 구슬, 피라미드형 구슬 등이 있다.

대롱구슬의 모양도 다양하여 각주형(角柱形), 원통형, 배부분이 볼록하게 나온 형 등이 있다. 또한 몇 개의 구슬이 연이어 붙은 구슬(連珠玉)이나 가는 대롱을 코일형으로 감아 만든 구슬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에 서아시아가 기원인 잠자리눈 모양 구슬, 천연보석의 줄무늬를 본따 만든 연리문구슬과 금박구슬, 여러 가지 문양을 상감(象嵌)한 모자이크 무늬 구슬 등이 특징적이다. 특히 삼국시대 사람들은 귀고리·팔찌·반지·금관 등의 금속장식에 푸른색이나 녹색의 유리 소옥(小玉)을 감입(嵌入)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기도 했고, 보검(寶劍)이나 요패(腰牌), 마구(馬具)장식에까지도 유리제품을 활용함으로써 유리공예를 통한 한국인의 창의성을 맘껏 발휘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각종 금제장신구에 감입된 유리구슬과 금제허리띠에 매달린 유리로 된 곡옥이나 유리병 모양의 드리개, 말장식인 운주(雲珠)와 행엽(杏葉)에도 얇은 유리판을 금속판에 결합하여 붙임으로써 뛰어난 유리공예기술과 유리를 애용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형태와 장식기법을 갖는 유리구슬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감색(紺色)·청색·녹색과 이외에도 노란색·적색·주황색·갈색 등의 구현은 현대에도 쉽지 않은 색상표현기술로서 고대인들이 어떻게 제조할 수 있었는지 그 재료의 구입과 제작기법의 도입에 따른 기술과 문화유입의 경로를 밝힐 수 있는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이를 통해 유리구슬제조의 중심지였고 서방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인도를 위시한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교역 가능성도 높이 시사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과의 비교고찰이 더욱 필요함을 제시해주고 있다. 한편 유리용기류의 유입과 제작이 시작된 것은 약 4세기경부터로 경주 제98호 고분(황남대총 남분·북분), 천마총, 금관총, 금령총 등에서 발견된 고분출토 유리용기는 특히 유명하다. 대부분 경주의 고신라지역 고분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된 이 유리용기류들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잔[杯碗] 형태로서 받침[臺]이 달린 고배(高杯)와 대접 형태도 있다.

이 그릇들의 색깔과 제작기법, 장식기법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4~5세기경 만들어진 후기 로마 유리에 속하는 것으로서 고대 서양문물과의 접촉을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리용기의 성형과 장식을 보면 환상(環狀) 구연부나 대의 처리, 트레일링 장식, 점문(點紋)장식기법 등의 요소가 고대 유리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 사산계 유리에서는 커팅과 환문(環紋)장식이 돋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유리제 사리병이 많이 만들어졌고, 더욱이 일상적으로 쓰였던 유리잔이나 주전자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는 통일신라 및 고려 초기에 유리용기가 귀중품으로서 상류층에서 애용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마도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소형잔, 병, 표주박형이나 합(盒) 형태의 유리그릇 등이 다수 만들어졌고, 팔찌나 반지와 같은 소형 고리, 허리띠 장식으로 쓰인 듯한 소형 유리판들도 옥제품의 대용으로서 고려 이후에 적지 않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고대 유리용기에서 고분출토 용기류 이외에 탑에서 발견된 유리사리병이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불자(佛者)에게 있어서 지고(至高)의 신앙대상이었던 석탑에 안치하는 사리병의 재료가 유리였음은 유리가 얼마나 귀하고 사랑받는 존재였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초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유리사리병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현재 발견지가 확실한 것만도 25개를 넘고 있어 중국에서보다도 더욱 활발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남한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면서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영역이 가장 많으므로 고신라 이래로 경주지역이 유리제작의 중심지였던 것 같다. 이들 유리사리병은 간단한 유리불기로 제작된 소형의 초록색 유리병인데, 그 형태는 대개 둥근 몸체에 가는 목이 달려 있다. 목이 짧은 것도 있으며, 둥근 유리나 금속 또는 나무마개가 있다.

송림사 전탑출토의 사리병과 익산 왕궁리 석탑출토 사리병은 한국적인 자태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사리병인데 그 투명하고 짙은 초록색 유리의 아름다움과 유연한 조형미는 고려자기를 연상시킨다.

한국 근대유리는 1900년대에 들어와 유리제조에 대한 인식이 새로이 생기면서 술병제작을 시작으로 생산에 들어갔으며, 1902년 이용익이 국립유리제조소를 설립하면서 러시아 기술자의 원조를 받아 유리를 제조했다.

1939년에 세워진 동양유리업주식회사는 자동식 병유리공장이었으며, 1957년에 설립된 한국유리에서는 건축용 판유리가 생산되었고, 크리스털 유리를 가공·생산하는 두산유리가 설립되는 등 현재 전국에는 150여 개의 유리업체가 생산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예술의 한 분야로서의 유리공예가 1980년대를 전후하여 전문 유리공예가에 의해 소개되면서 한국 현대유리예술의 장을 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