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겔

스티겔

다른 표기 언어 Heinrich Wilhelm Stie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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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29. 5. 13, 쾰른 근처
사망 1785. 1. 10, 미국 펜실베이니아 차밍포지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철업자·유리제조자·도시건설업자.
(영). Henry William Stiegel.

미국 초기 산업기에 그가 생산한 고급 청색·자주색·녹색의 완전 투명한 유리제품은 지금도 그의 사업의 극적인 흥망을 떠올리게 해준다.

1750년 스티겔은 미국 필라델피아로 건너와서 1760년 국내에서 가장 유력한 철기제조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 군에 엘리자베스퍼니스라는 철공소를 설립했으며 버크스 군에 차밍포지라는 2번째 철공소를 설립했다. 1762년 그는 랭커스터 군에 넓은 토지를 매입해 그곳에 맨하임이라는 도시를 설계하고 건설했다. 영국 수입품을 거부하는 애국적인 수요에 용기를 얻고 이미 엘리자베스퍼니스 철공소에서 창유리와 유리병을 생산하고 있었던 스티겔은 맨하임에 유리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1768년부터 가동되었고 후에 아메리칸플린트 유리공장이라고 불렸다. 그는 실용적인 용기와 고급 식기를 생산하기 위해 베네치아·독일·영국 등으로부터 유리세공인을 유입해왔다. 호화로운 생활 스타일 때문에 '남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하인들이 있는 3개의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맨하임에 있는 저택은 영국에서 수입한 벽돌로 지어졌으며 저택 안에는 그가 근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예배실과 연주회가 열리던 옥상 무대가 있었다. 그가 제복을 입은 하인들과 함께 사두마차로 출입할 때는 이를 알리기 위해 예포와 옥상에 있던 악단의 연주가 울려퍼졌다. 결국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태도, 임박한 전쟁 및 수입식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선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파산하고 말았다. 1774년 그는 채무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유리공장은 처분되었다. 엘리자베스퍼니스 공장에서 감독원으로 일했지만 그 공장도 파산했다. 그후 전도자로 일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했고, 죽을 때까지 학교에서 기초과목과 음악을 가르쳤다. 스티겔이 '매년 한 송이의 붉은 장미'를 받기로 하고 부지를 받았던 맨하임의 시온루터 교회는 1892년 이후 매년 '장미 봉정 기념일'을 지켜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