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둔황

다른 표기 언어 Tunhuang , 敦煌
요약 테이블
위치 중국 간쑤 성 북서부
인구 111,535명 (2010 추계)
면적 3.2㎢
언어 중국어
대륙 아시아
국가 중국

요약 주취안 지구에 속하는 현청소재지. 간쑤-신장 사막 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진 중국인 거주지의 서쪽 끝에 해당하며, 서양에서 중국 통치영역으로 들어가는 외국상인들이 처음으로 거쳐 가는 교역도시였다. 처음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한나라 때인 BC 2세기 말경이었다. 4~5세기에는 연이어 후량·북량·서량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에 둔황은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에서 중요한 대상도시이자 상업 중심지였다. 대상교역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소그디아나인과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이 살던 마을이 있다.

둔황(Tunhuang)
둔황(Tunhuang)

주취안 지구[酒泉地區]에 속하는 현청소재지이며, 간쑤-신장[新疆] 사막 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중앙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진 전통적인 중국인 거주지의 서쪽 끝에 해당하며, 서양에서 중국 통치영역으로 들어가는 외국상인들이 처음으로 거쳐가는 교역도시였다.

둔황은 옛날에 타림 분지의 북쪽과 남쪽을 지나던 실크로드의 두 갈래 통상로가 만나는 곳이었다. 둔황이 처음 중국의 지배 밑에 들어간 것은 팽창정책을 쓰던 한나라(漢:BC 206~AD 220) 때인 BC 2세기말경이었다. 둔황 군(郡)이 설치된 것은 BC 111년 또는 어떤 기록에 의하면 BC 93~92년이었다.

북쪽에는 몽골족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추방된 죄수들이 군졸로 포함된 꽤 큰 규모의 군대가 방어선을 따라 배치되었다. 한의 중앙권력이 붕괴된 뒤 반독립 상태가 되었으나, 4~5세기에 연속적으로 간쑤 성에 중심을 둔 나라들인 후량(後凉:386~403경)·북량(北凉:397~439)·서량(西凉:401경~421)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 동안 둔황은 중앙 아시아와의 교역에서 중요한 대상도시(隊商都市)이자 상업 중심지였다. 둔황에는 대상교역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소그디아나인과 중앙 아시아의 상인들이 살던 마을이 있다.

5세기말 북위(北魏:386~534)는 둔황을 다시 중국의 지배 밑에 두고 그 이름도 과주(瓜州)로 바꾸었다. 중국의 지배는 그뒤 서위(西魏:535~557)·북주(北周:557~581)·수(隋:581~618)로 이어졌다. 618년 당(唐:618~907)은 이 지역을 사주(沙州)로 고쳐 불렀으며 781년까지 통치했다.

토번(吐蕃:티베트에 있던 옛 국명)이 중국으로부터 간쑤 성을 빼앗아 점령한 지 18년이 지난 781년 둔황도 토번의 지배 밑에 들어갔다. 토번이 망한 840년대에 둔황은 명목상으로 당의 지배 밑에 들어갔으나, 실제로는 지방 토호가문의 통치를 받았으며 그들은 905년 서한금국을 독립적으로 건국했다. 그뒤 차오 일가가 지배하는 소왕국에 들어갔다가 11세기 중반 서하(西夏:탕구트족이 세운 나라)에 점령되었다.

1227년 몽골 제국인 원(元:1279~1368)은 서하를 치고 둔황을 점령했으나, 몽골 제국이 몰락한 뒤 명(明:1369~1644)이 이곳에 요새를 설치했다. 그러나 15세기에 투르판 왕국이 침략하여 그 지배 밑에 들어가 1723년까지 위구르족에 속해 있다가 다시 청(淸:1644~1911)의 통치 밑에 들어갔고, 1760년에는 중앙에서 관리하는 행정부가 수립되었다.

366년부터 서하가 멸망할 때까지 둔황은 거대한 불교 중심지로서, 중앙 아시아의 여러 왕국에서 건너온 승려와 포교사들이 머문 주요도시였다. 그들은 366년에 첸포둥[千佛洞]으로 불리는 수많은 석굴사원을 처음으로 건축했으며, 이때부터 둔황은 중요한 불교중심지이자 순례지가 되었다. 심지어 토번 점령군조차도 사원들을 지었다. 지역사회에서 큰 역할을 했던 많은 사원들이 있었으며, 세습통치자들은 사원을 적극 후원했다. 승려들 가운데 대부분이 비(非)한족이었다.

20세기초에 발견된 석굴사원 가운데 하나는 1015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AD 5~11세기에 만들어진 무려 2만 점 가량의 그림과 필사본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불교뿐 아니라 도교·조로아스터교·네스토리우스교의 경전들과 중세 중국사회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는, 평신도들이 직접 쓴 기록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가는 철도와 간선도로가 인근의 안시[安西]를 지나가게 되면서 둔황은 교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크게 잃어버렸다.

지도
둔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