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중세시대

유럽의 중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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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세의 가장 큰 특성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영향력이다. 초기인 5~8세기에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독립 국가들이 들어서면서 그리스도교가 급속히 퍼져 유럽 전체의 문화와 언어를 통일했다.
다른 민족 지도자들의 개종은 이교신앙을 근절하는 데 중요했다. 481년부터 프랑크족 클로비스왕을 필두로 8세기에 샤를마뉴 대제의 개종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의 영토는 넓히는 데 기여했다. 교황의 권위는 크게 높아졌고, 로마가 직접 다스리는 교회 정부를 세웠다.
교회 조직의 핵심은 주교관구였는데 13세기부터 로마 교회 정부가 중앙집권화하자 다양한 역할을 관리가 등장하여 교육받은 일반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종래 성직자만이 맡았던 일을 대신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교회 정부의 자치권을 위협했다.

목차

접기
  1. 중세 초기
  2. 통치자
  3. 귀족계급
  4. 그밖의 사회집단

중세 초기

중세 유럽 지도
중세 유럽 지도

중세 초기인 5~8세기에 유럽에서는 제정이 무너진 대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게르만족의 독립적인 국가들이 들어섰다.

이 변화와 더불어 그리스도교가 급속히 퍼졌고 그리스도교는 유럽 전체의 문화와 언어를 통일했다. 고대에 이교도의 수도였던 로마도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첫번째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러 로마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권력을 잃어버린 처지에서 다른 그리스도교 왕국에 정기적으로 보호를 요청하곤 했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이 호소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유럽에서 고립되었다.

비(非)로마 세력이 로마 제국을 사실상 차지한 5세기말에 이미 몇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교 권력기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도시의 성직자 위계제도는 대도시나 그 주변에 확립되었고 지리적 교구의 중요성에 따라 그 교구를 맡은 주교의 지위가 정해졌다. 수도원은 정신적 완성을 위해 헌신했고, 종교 단체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덕이 높고 믿음이 깊은 사람들도 있었다.

동고트족의 성직자들이 일부 이탈리아 도시에 그리스도교의 한 갈래인 아리우스파 신앙을 강요하기는 했지만 고도로 발달한 이탈리아 도시들을 근거지로 한 주교제도가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 같다. 고립된 섬과 이탈리아 해안에 세워진 수도원들은 '사막의 교부들'의 금욕적 전통을 대표했다. 갈리아에서는 성 마르티노가 수도원의 금욕 훈련과 주교 행정직을 결합시켰다. 이교신앙은 그리스도교 팽창에 저항한 여러 적대 세력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단자들은 나라의 공인을 받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에 맹렬히 반대했고, 이단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였다. 전적으로 비그리스도교권이었던 유럽에서 6세기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서유럽의 수도원제도가 확립된 것과 아리우스파 및 이교도가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서유럽에서는 6세기 이전에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지만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480경~547경)가 세운 수도원은 종교 공동체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법을 확립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규율을 켈트 교회보다는 유럽의 수도원들이 실제적인 지침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유럽의 수도원들이 켈트 교회의 전통보다 더 세속적이고 덜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2가지 접근 방식이 공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금욕 실천의 필요성을 그만큼 강하게 느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인이 아닌 다른 민족 지도자들의 개종은 유력한 사회 구성원들의 이교신앙을 근절하는 데 중요했다. 랭스의 레미지오 주교는 481년부터 프랑크족 지도자가 된 젊은 클로비스 왕을 설득하기 위해 만약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면 교회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레미기우스 (Saint Remigius of Reims)
레미기우스 (Saint Remigius of Reims)

이때 클로비스의 아내 클로틸다가 레미지오를 도와주었는데 그녀는 부르군트 출신의 정통 그리스도교도였다. 프랑크족의 경쟁자인 알레마니족에게 중요한 승리를 거둔 뒤 클로비스는 마침내 개종하기로 동의하고 5세기에서 6세기로 넘어갈 무렵 세례를 받았다. 후계자인 그의 아들과 3,000여 명의 프랑크 군인도 대규모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클로비스는 개종한 덕분에 주교들만이 아니라 갈리아-로마 가문들의 지지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툴루즈 주변에 정착해 있던 아리우스파 서고트족을 공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507년에 벌어진 부예 전투에서 클로비스는 서고트족을 무찔렀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과 그리스도교는 훨씬 남쪽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이듬해 클로비스는 동로마 제국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한테서 명예로운 콘술(집정관)칭호를 받고 투르에 입성했다.

투르 민중은 그를 황제의 콘술로 열렬히 환영했다. 생애의 마지막 해(511)에 클로비스는 프랑크 왕국의 주교들을 오를레앙으로 소집해 종교회의를 주재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은 갈리아-로마의 교회 학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그들에게서 고전 학문과 법률에 관한 전문 지식을 얻었다. 그러나 아들들에게 유산을 분할 상속하는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클로비스의 세 아들은 아버지의 왕국을 분할했고 각자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로 싸웠다.

6세기말에 또다른 중대한 개종이 이루어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5 재위)는 북부 앵글로색슨족의 이교사상에 대한 보고를 받고, 로마의 베네딕토 수도원 원장인 아우구스티노를 보내 켄트 왕국의 애설버트 왕을 개종시키게 했다. 캔터베리(아우구스티노는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음)·로체스터·런던·요크에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수도원과 학교가 세워졌다. 이들은 앵글로색슨족이 로마 교회에 특별한 충성을 바치는 토대가 되었다.

클로비스가 세운 프랑크 왕국에서는 그의 자손들이 여전히 반목한 채 현지의 경쟁자들과도 싸움을 계속했다.

프랑크 왕국의 북부에 있던 네우스트리아 지역과 아우스트라시아 지역 및 멀리 남쪽에 있는 아키텐 지역은 메로빙거 왕조(5세기의 지도자 메로베치의 이름을 딴 것)의 사람들이 각각 독립해 다스리는 별개의 왕국이 되었다. 다고베르트 1세(629~639 재위)처럼 1명의 통치자가 이들 지역을 통일해 직접 다스리고 외부의 공격에서 나라를 방어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같은 혼란 속에서 권력은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린 유력자들이 차지했고 이들은 이름뿐인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이런 유력한 가문들 가운데 하나인 아르눌프 가문에서 훨씬 더 강력한 지도자가 나오곤 했다. 이 과정은 다고베르트가 죽은 뒤 3대에 걸쳐 되풀이되었고 그러는 동안 아르눌프 가문은 궁재 자리를 독점함으로써 아우스트라시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687년에 피핀 2세는 네우스트리아 군대를 무찌르고 북부지역에서 권력을 확립하는 한편, 부르군트족과 프랑겐족 및 프리슬란트(프리지아)인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계속 나라를 다스렸지만 점점 무력해졌다. 이런 실권의 불균형은 나중에 피핀 2세의 손자가 자신도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왕의 칭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었다.

스페인에 강력한 왕국을 세운 서고트족은 이와는 약간 다른 상태의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는 달리 중앙집권화한 왕국을 유지했다. 톨레도에 수도를 둔 이 왕국은 효율적인 행정을 시행했고 이 점에서는 예외적으로 강력한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한편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북부 왕국들은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의 갈등으로 약해졌다. 644년 휫비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는 부활절 날짜를 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휫비 교회회의).켈트파는 논쟁에서 패배했고 노섬브리아의 오스위 왕은 로마 교회의 방침을 채택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유럽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이 관계에서 점점 더 많은 이익을 얻었다.

7세기에서 8세기로 넘어갈 무렵 유럽은 이슬람교의 침입에 직면했다.

이슬람교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신봉자들이 남쪽에서 가져온 새로운 일신교 신앙이었다. 서고트 왕국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북서부 모퉁이에 있는 갈리시아에서만 독립교회가 살아남았다. 아랍 침략자들을 천연 국경인 피레네 산맥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아키텐과 아우스트라시아의 통치자들이 이례적으로 협력한 덕분이었다. 궁재 피핀 2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궁재가 된 카를 마르텔은 연합군을 이끌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랍인을 무찔렀다.

이 전투가 벌어진 해는 732년으로 알려져 있다. 카를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궁재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칭호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사실상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었고,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자인 테오도리히(테우데리히) 4세가 737년에 죽은 뒤에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카를 마르텔은 영토를 두 아들 카를만(카를로만)과 피핀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이들은 서로 합의한 끝에 수도원에 들어가 있던 힐데리히 3세를 데려와 왕위에 앉혔다.

카를만이 747년에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그의 동생 피핀은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스(741~752 재위)의 승인을 얻어 마침내 힐데리히와 그의 아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귀족들은 피핀을 왕으로 선출했고 주교들은 피핀에게 성유식(聖油式)을 거행하여 왕으로 성별했다.

피핀은 이런 과정을 거쳐 751년에 왕위에 올라 피핀 3세가 되었다. 카롤링거(카를의 라틴어 이름인 카롤루스에서 유래) 왕조가 마침내 메로빙거 왕조를 대신한 것이다.

피핀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로마 교황의 구원 요청을 받았다.

같은 해에 라벤나가 롬바르드족 왕 아이스툴프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 재위)는 피핀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왔고 754년 피핀과 협정을 맺었다. 중세 초기에 교황이 세속 영토를 지키기 위해 내린 이 마지막 결단은 755, 756년에 이루어진 피핀의 이탈리아 원정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피핀의 군대는 아이스툴프를 무찌르고 몇 세기만에 처음으로 로마를 롬바르드의 압력에서 해방시켰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의 우정은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이 되었다.

768년에 피핀이 죽자, 그의 두 아들 카를과 카를만이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차지한 몫은 동등하지 않았다. 나중에 샤를마뉴 대제로 알려진 카를은 771년에 카를만이 죽은 틈을 이용해 카롤링거 왕조의 영토를 통일했고 많은 지역을 정복해 영토를 넓혔다.

샤를 마뉴 제국(Charlemagne's empire)
샤를 마뉴 제국(Charlemagne's empire)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지역은 작센과 아키텐 및 셉티마니아였다. 그는 다시 로마를 위해 원정해 이탈리아 중부의 영토를 로마 교황령인 성 베드로 사도좌에 돌려주었다. 샤를마뉴는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그동안 서유럽의 중심부는 처음으로 1명의 통치자를 갖게 되었다. 이는 로마 황제들이 주장했던 세계 지배를 이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밖에도 동시대인들이 그를 로마 통치자들과 비교하게 만든 요인은 많았다. 행정과 사법 및 교육에 관한 관심, 아헨에 수도를 건설한 것, 예술을 후원한 것 등도 그런 요인의 일부였다.

잉글랜드의 신학자 앨퀸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이 칭호 때문에 유럽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통치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직계로서 서유럽의 마지막 황제는 476년에 폐위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였다.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는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의 주재로 대관식을 올렸고 이로써 새로운 제국의 막이 올랐다(신성 로마 제국). 샤를마뉴는 그리스도교 세계인 서유럽에서는 가장 강력한 왕이었지만 그런 샤를마뉴조차도 공식적으로는 다른 왕들보다 더 많은 권세를 누리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800년에 로마에서 대관식을 갖기 전에도 그랬고, 황제가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샤를마뉴 (Charlemagne)
샤를마뉴 (Charlemagne)

황제라는 칭호는 그의 가문(카롤링거 왕가)에 세습되었지만 영토는 왕가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경우가 많았다.

동프랑크 왕국은 오토 1세가 962년에 대관식을 올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됨으로써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오토는 샤를마뉴에 못지않은 정치적 권력을 누렸지만 서프랑크 왕국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권리는 전혀 갖지 못했다.

그의 시대부터 황제라는 칭호는 독일 왕들의 특권이 되었지만 이 특권도 교황의 지지를 받아야만 비로소 누릴 수 있었다. 9세기초부터 12세기말까지 황제들은 상당한 권세를 누렸고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 및 이탈리아 중부에서는 훨씬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1152~90 재위)는 1176년에 레냐노에서 롬바르디아 도시 동맹에게 참패를 당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신과 후계자들이 직접 다스릴 독립국가를 세우기로 결심했으며, 그결과 프리드리히 2세(1220~50 재위)와 교황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이탈리아에서 황제가 누리던 권세는 차츰 줄어들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왕을 겸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 알프스 산맥 양쪽에서는 오랫동안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이 전쟁은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에서 중앙 권력의 토대를 무너뜨렸다. 800~1500년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의 여러 왕국들 가운데 대체로 명성만 가장 높았을 뿐 힘은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로마 제국을 직접 계승한 것은 수많은 불안정한 왕국들이었다.

3세기부터 아시아인들이 서쪽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로마 제국을 위협한 것이 이 왕국들의 기원이었다. 410년에 서고트족은 로마를 약탈했고 그후 스페인에 왕국을 세웠다. 6세기말에 세워진 롬바르드 왕국은 그 마지막 왕이 774년에 샤를마뉴 대제에게 패할 때까지 느슨하게 결합된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후 롬바르드 왕국은 프랑크 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독특한 성격을 대부분 유지했다. 앵글로색슨족은 7세기초까지 작은 왕국들을 세웠고 이 왕국들은 서로 패권을 다투다 9세기에 데인족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웨식스 왕국 하나만이 앨프레드 왕(871~899 재위)의 지휘로 데인족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데인족에게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 잉글랜드 통일왕국을 세웠는데 이 과정은 954년에 완전히 끝났다.

앨프레드 (Alfred)
앨프레드 (Alfred)

그러나 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왕국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는 프랑크족의 왕국이었다.

다른 게르만족과는 달리 프랑크족은 초기 영토를 버리지 않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 계속 세력을 확장했으며, 때로는 아리우스파 이단과도 관계를 맺었지만 깊이 빠지지 않고 이내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왔다. 10세기에 프랑크 제국의 동부와 서부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911년에 루트비히 4세가 죽음으로써 카롤링거 왕조가 막을 내렸다. 하인리히 1세(919~936 재위)를 시조로 하는 작센 왕가는 동프랑크에서 왕권을 회복하고, 로타링기아(로렌)의 '중부 왕국'을 병합했으며, 마자르족의 마지막 대공세를 955년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격퇴하고 영토를 엘베 강 동쪽까지 넓혔으며, 951년부터는 롬바르디아에서도 권력을 장악했다.

서부에서는 987년에 루이 5세가 죽을 때까지 카롤링거 왕조가 근근히 대를 이었다. 루이 5세를 계승한 사람은 그의 신하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위그 카페였다. 위그 카페를 시조로 하는 왕조는 1328년까지 프랑스를 다스렸다.

그후 몇 세기 동안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토는 계속 넓어졌다.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된 스페인 땅을 되찾는 일은 1492년에 완전히 끝났고 그후 이베리아 반도에는 나바라·레온·카스티야·아라곤·포르투갈 등의 왕국이 융성했다. 북유럽에는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라는 3개의 별개 왕국이 세워졌고 이 왕국들은 11세기 중엽까지는 상당한 내적 통합과 외적 독립성을 획득했다.

당시 이 3개국의 통치자들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그리스도교도였다. 동유럽에서는 폴란드(1076)·헝가리(999)·보헤미아(1085)가 독립왕국으로 황제들과 로마 교회의 승인을 받았다. 중세 들은 대부분 권력의 근원을 밝히는 의례적 결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12세기말에 장자 상속의 원칙이 우세해질 때까지는 의회가 마지막 통치자의 친척들 중에서 왕을 '선택'했다.

단신왕 피핀 3세가 성유식을 거친 뒤 왕으로 성별된 뒤로는 구약성서를 신중하게 본뜬 예식을 통해 왕이 신성한 존재로 성별되고 명예의 표장(예를 들면 왕관)을 받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이 의식을 거행하기 전이나 거행한 뒤에 왕국의 주요인물들은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되었다. 왕을 임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교회는 왕의 의무를 규정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종교회의는 군대와 왕의 관계보다 백성에 대한 왕의 의무를 더욱 강조했다. 친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는 경우에도 백성이 왕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관례였고 명백한 왕위 요구자가 없는 경우에는 선출이 실제로 유효한 원칙이 되었다. 13세기의 큰 왕국들 가운데 선출에 의해 통치자가 결정되는 국가는 독일뿐이었다. 덴마크·스웨덴·폴란드에서도 형식적으로 왕을 선출했고 실제로도 왕을 선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프랑스·잉글랜드·스페인에서는 상속권이 절대적인 권리가 되었다.

8세기까지는 교황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동로마 제국 총대주교들의 존재 때문에 교황이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기가 어려웠다(교황제). 그러나 700년에 이르자 동로마 제국의 총대주교들은 대부분 이슬람 통치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이 너무 약해졌기 때문에 그레고리오 1세 같은 교황들은 로마에 대한 세속적 책임을 대부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교황의 권위는 크게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제국의 권위는 떨어졌다. 동로마 제국에서 성화상 공경을 둘러싸고 벌어진 교리논쟁(725~843)은 동방의 그리스 정교회와 서방의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의 반목을 촉진시켰으며 이 반목은 갈수록 더욱 깊어져 거의 영원한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서방교회 분열, 성상파괴논쟁). 그리하여 로마는 서유럽에서 유일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교회에 대한 세속 군주들의 권한을 줄이려고 애썼으며(이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 및 하인리히 5세와 교황들 사이에 성직 서임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이 벌어졌음)(서임권 논쟁), 성문 교회법을 바탕으로 로마가 직접 다스리는 교회 정부를 세워 세속의 권력을 대신하고자 했다.

귀족계급

1100년 무렵에는 로마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의 거의 전역에 이미 대귀족계급이 등장해 있었다.

이 귀족계급은 3가지 요소를 겸비한 것이 특징이었다. 첫째, 귀족들은 장원을 소유한 영주로서 대개 신서(臣誓)와 충성의 서약으로 맺어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대신, 그들 자신도 왕이나 고위 성직자나 교황에게 충성 서약으로 묶여 있었고 행동으로 경의를 표했다(봉건제). 귀족은 왕이나 성직자에게 신하의 의무를 다했고 귀족의 아랫사람들은 귀족에게 의무를 다했다.

이런 상호 의무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 병역의 의무였다. 둘째, 귀족계급은 아랫사람들에 대해 광범위한 사법적·경제적·행정적 권한을 행사했다. 셋째, 이들은 아랫사람들에게 땅(봉토)으로 보수를 주는 지주계급이었다. 영주들은 왕에게서 받은 땅이나 하사금으로 재산을 늘렸고, 자신이 직접 보유하고 있는 땅(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대가족을 부양했다.

이 대귀족계급의 기원과 그들이 누린 특권은 다양했다. 혈통은 아마 처음부터 왕의 총애를 받을 기회와 높은 지위를 얻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9~12세기에는 부계와 맏아들의 신분을 훨씬 더 강조하게 되었고 광범위한 친족 집단은 지배 가문이 되었다. 공직이 세습 재산으로 상속된 것, 군사적 문제에 대한 고려가 점점 더 중요해진 것, 그리고 분할할 수 없는 몇몇 성(城)에 부와 영향력이 집중된 것 등은 모두 이런 결과를 낳는 데 이바지했다.

귀족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면 자유민으로 태어난 가신들을 많이 거느리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영지가 가치 있게 여겨진 것은 거기에서 재화가 나오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영지에 딸려 있는 사람들의 봉사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신들의 수는 자기 땅을 영주에게 바치고 조건부 하사로 그 땅을 돌려받아야 할 필요성에 쫓긴 자유민들 때문에 계속 늘어났다. 이들은 땅을 바친 대가로 영주의 보호를 받았다. 전투가 점점 전문화함에 따라 자유민이라는 태생보다는 기마전 솜씨가 귀족을 섬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격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기사들은 영주의 집에서 가신으로 살 수도 있었고 영주에게 받은 땅(기사의 봉토)을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기사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광범위한 통치권을 발휘했으며 소귀족계급을 형성해 무기를 지니고 다니거나 자신의 문장을 사용하고 요새화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유럽 전역의 대귀족계급에는 수많은 성직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교 관구와 많은 수도원은 넓은 땅을 하사받았고 성직자들은 이 땅에서 소작인의 지주이자 궁중 관리로서 세속 귀족들보다 더욱 광범위한 권리를 행사했다.

교회의 고위직은 거의 전적으로 귀족의 특권이었고 나중에는 기사계급의 특권이 되었다. 그러나 11세기부터는 왕이나 교황에게 봉사하고 신학 이론과 교회법에 정통하면 귀족이나 기사가 아닌 사람도 자신의 능력만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교회 조직의 핵심은 원래 주교관구였다. 늦어도 8세기말부터는 여러 개의 주교관구가 모여 대주교나 수도 대주교가 관할하는 관구를 이루게 되었다. 군주들은 지위가 높은 세속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교와 동맹을 맺고 주교를 일종의 평형추로 삼아 의지했다. 대주교들은 차츰 강력한 지주인 동시에 왕을 대신해 광범위한 왕권을 행사하는 영주가 되었다.

실제로 주교들은 이웃의 탐욕스러운 세속인들한테서 자신을 지키고 교회의 율법을 집행하기 위해 왕권에 의존했다. 그리고 중세 후기에는 교육받은 일부 세속인들 사이에서 점점 커지는 반교권주의와 교황의 경제적 요구에 대항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왕권에 의존하게 되었다. 원래의 주교구 조직은 주교와 주교좌 성당에서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소수의 성직자들에게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교구 내부에 부차적인 중심지들이 생겨났고 이런 소교구들은 대부분 1명의 성직자가 봉사하는 작은 교회 하나만 관할했다.

서유럽에서는 13세기 중엽까지 이런 소교구 조직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갖추어졌다. 주교가 정식 사법권을 갖게 되자 법률과 재정 문제를 담당하는 수많은 대리인이 등장했다. 이들의 지위는 막강한 힘을 가진 주교좌 성당의 부제에서 미천한 소환 담당인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지만 이들의 임무는 결국 범법자를 교회 법정에 출두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 로마의 교회 정부가 차츰 중앙집권화하자 다른 관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감독하는 로마의 감독관, 교황에게 바칠 세금을 거두는 징세관, 그리고 나중에는 교황의 대사와 진위가 의심스러운 성해를 팔러 다니는 뜨내기 행상(대사 설교)처럼 평판이 나쁜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 관리들이 나타났다.

이런 직위 이외에 정규 성직자와 성직록을 받는 유급 성직자 및 수많은 교회 서기도 존재 했다.

로마의 세속 교육이 붕괴한 뒤 유럽에서는 성직에 몸을 담지 않고는 교육받을 기회를 얻을 수 없었지만 13세기에 유럽에는 교육받은 속인이 나타났다(평신도). 왕을 섬기는 법률가와 행정관은 완전한 세속 경력을 가질 수 있었고 상인은 대부분 필요에 따라 글을 배웠다.

이들은 종래 성직자만이 맡았던 일을 대신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교회 정부의 자치권을 위협했다.

그밖의 사회집단

서로마 제국의 도시 사회는 마지막 황제가 물러난 5세기 훨씬 이전부터 해체되기 시작했지만 11세기말까지는 대체로 회복되었다.

장거리 교역을 하는 상인들이 도시의 귀족계급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차츰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바다를 통해 지중해와 에게 해 동쪽 해안의 지방과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자 상업 공동체의 규모와 영향력도 급속히 커졌다. 이런 공동체에는 직물 제조로 유명한 플랑드르 지방의 공업도시와 금속 세공으로 유명한 밀라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12세기말에 8만 명의 인구를 거느렸던 것으로 추산되는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대학 도시였다.

로마 시대에는 주로 사유지의 노예나 비교적 자유로운 경작자들이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정부는 납세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경작자들을 강제로 땅에 묶어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처럼 의무적으로 땅을 경작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의 중대한 법적 무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하지는 않았다. 침략기의 게르만 사회에서 농업 인구는 흔히 3부류로 구분되었다.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유농민은 무기를 지닐 수 있었고 공공집회에 참여했다. 자유민은 해방된 노예일 수도 있고, 그전에 정복당한 지역에서 살아남은 사람일 수도 있었으며, 제한된 권리를 누렸지만 대개 법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았다(해방노예). 그리고 3번째 부류는 노예였다.

이들은 전쟁 포로로 붙잡혔거나 법률적 판결에 따라 노예 신분이 되었거나 가난 때문에 노예로 몰락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노예들 가운데는 자기 소유의 오두막과 땅을 갖고 가정을 꾸며 최소한의 독립생활을 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3부류의 농민은 서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고 그리하여 1000년경에는 서유럽의 대부분 지역에 독특한 부락민(예농)이 나타났다(예농제). 이들은 마을 들판에 상당한 땅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영주의 장원에서도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했고, 이전의 땅 없는 노예들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영주의 뜻에 복종해야 했다.

게다가 마을 공동체에는 대개 옛날과 같은 의미의 노예들도 몇 명 있었고 더 작은 땅을 가진 사람들(농장 노동자)도 있었다. 작은 땅을 가진 사람들이 노동력과 현물로 내는 소작료는 다른 소작농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이들의 경제 상황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이 경작자들은 모두 농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농노제).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자유농민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4세기에는 경제 상황의 변화로 영주의 장원에서 의무적으로 일하는 대신 정해진 소작료를 돈으로 바치는 예농의 수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자유농민의 지위도 서서히 높아졌다.

12세기와 13세기에 상당한 토지 보유의 자유를 인정하겠다는 제의에 따라 계획된 개간지로 이주해 땅을 소유한 이주민들은 다른 수단으로 똑같은 목적을 달성했다. 사회적 저울의 반대쪽에는 이제 땅 없는 임금 노동자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