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

봉건제

다른 표기 언어 feudalism , 封建制

요약 토지 소유와 인간 관계에 바탕을 둔 권리와 의무에 관한 사회제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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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럽의 봉건제
    1. 기원
    2. 성격과 역할
    3. 붕괴
  2. 중국의 봉건제
  3. 일본의 봉건제
    1. 개요
    2. 중국적 개념
    3. 서양적 개념
봉건제(feudalism)
봉건제(feudalism)

봉신들은 영주한테서 받은 봉토(그리고 이보다는 훨씬 드물지만 토지 이외의 수입원)를 보유하되, 그 대가로 영주에게 특정한 봉사를 바쳐야 하며 개인적인 충성으로 영주와 묶여 있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이 용어는 '봉건사회'를 가리킨다. 봉건사회는 특히 폐쇄적인 농업 경제에서 번성한 문명의 한 형태이며, 단순히 영주와 봉신 및 봉토가 존재한다는 것 말고도 일반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민간의 의무든 군사적 의무든 모든 공식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국가나 공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주와 개인적으로 기꺼이 맺은 관계 때문에 그 의무를 수행한다. 이들은 봉토라는 형태로 보상을 받으며, 이렇게 받은 봉토는 자손에게 물려주어 대대로 소유한다.

봉건제의 또다른 측면은 자유가 없는 소작농에 대해 토지를 소유한 영주가 광범위한 경찰권과 사법권 및 과세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권한을 행사하는 장원제 또는 영주제이다.

유럽의 봉건제

기원

유럽 봉건제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8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무렵 프랑크 왕국에서는 봉신과 영주가 개인적인 유대를 확립하는 것과 봉토를 주는 것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전의 몇 세기 동안에도 토지 점유자에게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의 요청에 따라 토지를 주는 베네피키움(은대지제도)이 토지 불하의 한 유형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베네피키움이 봉건제와 널리 결부된 것은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전에 프랑크 왕들은 신하들에게 토지를 불하하는 경우 완전한 소유권도 함께 주었지만, 이제 왕들은 소유권을 자신이 보유한 채 베네피키움으로만 토지를 주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베네피키움으로 받은 토지에 대해 광범위한 이용권과 개발권을 행사했다. 왕의 땅만이 아니라 교회 소유 토지도 분배되었다. 그무렵 베네피키움을 받은 왕의 봉신들에게는 공적 기능도 부여되기 시작했다.

왕보다 지위가 낮은 각급 영주들도 재빨리 왕을 본받았다.

봉건제는 프랑크 왕국의 정복활동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와 스페인 및 독일로 퍼졌고 나중에는 슬라브족의 영토까지 퍼지게 되었다. 노르만족은 1066년에 봉건제를 잉글랜드로 가져갔고 몇 년 뒤에는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도 도입시켰다. 잉글랜드의 봉건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퍼졌다.

마지막으로 십자군이 정복한 근동 지방의 땅도 봉건제로 개편되었다. 이 제도는 9세기를 거치면서 내부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베네피키움이 세습 봉토로 바뀐 것이다. 왕권이 쇠퇴하고, 지방 왕조는 사실상 독립하여 혼자 힘으로 작은 지역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나라들은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는 크게 봉건화했으며 세속 영주들은 주종 관계를 맺는 대가로 주교와 대수도원장들에게 성직을 부여했고 그 성직에 딸려 있는 재산도 주었다. 그대신 주교와 대수도원장은 세속 영주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봉사할 의무를 가졌으며 심지어는 군사적인 봉사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법률과 사법 분야의 봉건제는 지방 고관들이 주재하던 고대 법정이 한 영주를 모시는 봉신들로 이루어진 법정으로 바뀐 것을 의미했다. 그결과 법정이 분산되고 증가하여 사법기구가 극도로 복잡해졌다.

성격과 역할

봉건적 주종관계는 상하간의 지배관계임에는 틀림없지만 동시에 쌍방을 구속하는 상호 의무관계이기도 했다.

봉신이 수행해야 하는 의무는 주군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주군의 이익을 위하고 불이익을 피하게 하는 의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의무는 자주적·독립적 판단주체에게만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봉신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서양의 봉건제(Lehnwesen)에는 '영주는 영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의 원칙이 있어 영주도 '영주로서의 의무'를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영주가 의무를 위반하면 봉신은 영주에 대한 일체의 의무에서 해방된다. 또 그러한 영주에 대해서는 실력에 의한 저항도 가능하다(봉건적 저항권). 그러나 영주의 의무위반 여부를 봉신이 판단하는 데다가 의무의 내용이 극히 모호하여 영주와 봉신 간에는 실력행사의 구실이 상존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봉건 주종관계가 독립인 대 독립인의 지배관계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봉건제가 권력의 분화에 일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점과 관련이 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7세기경에 영주제가 전반적으로 발전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장원제가 정착되어 '영주권력'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영주권력은 완전히 자연발생적인 독립권력으로서 그대로 방치하면 사회가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래 국왕의 관리였던 그라프(Graf) 등이 영주가 되어 국왕에 대항하는 독립세력으로 성장했다. 카롤링거 왕조는 처음부터 봉건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독립적인 영주들 사이에 봉건 주종관계를 설정하고 권력질서를 창출하고자 노력했다.

여기에는 권력의 혼란 상태를 막아보자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 이렇게 하여 영주들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적 계급 피라미드에서 그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라프도 9세기 후반에는 국왕의 봉신이 되어 그라프의 관직 자체가 국왕으로부터 제수받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붕괴

봉건제도는 독립권력이 다수 병존하는 상태를 전제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권력집중 현상이 진행되면서 그 기능이 점점 빛을 잃게 되었다. 권력집중이 추진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12~13세기에 나타난 상황으로 비추어보면 지방 시장권의 형성, 교환경제의 발전, 중세 도시의 성립 등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장원제가 해체되었으며 영주는 영주권력을 잃고 단지 지주의 지위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치권력(재판권)은 소수의 영주 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한편 도시 상인들은 가능한 한 넓은 지역에서 상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느끼자 중앙집권적인 국왕을 지원하면서 봉건적 권력분립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하여 권력집중은 점차적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2세기에 영주지배권이 붕괴되고 봉건제후령 단위로 발전했으며 13세기에는 국왕이 전국적인 규모로 권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와는 반대로 독일은 13세기에 영방(Land) 단위로 권력집중이 거의 확립되었고 전국적인 규모의 권력집중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따라서 각 영방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봉건적인 관계로 결속되어 있었다.

권력집중의 과정에서 관료제용병제는 봉건귀족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제거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2가지 수단은 교환경제의 발전에 따른 화폐사용의 일반화를 전제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봉건제는 유럽 사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이 제도는 입헌 정부의 근대적 형태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세에 대한 동의, 영주권에 대한 저항, 영주와 봉신이 갖는 권리와 의무의 완전한 균형 같은 개념들은 초기 대의제도의 전체적인 틀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의 봉건제

고대 중국에서는 (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동방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이 제도를 시행했다. 봉이란 지배영역의 경계를 정한 것이고 건(建)은 그 영역에 나라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주왕은 중원의 중요 지역에 자신의 일족과 공신을 제후로 내보내 그 영지와 주민을 지배하게 하면서, 이들 제후들을 통제함으로써 전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다.

제후의 통제는 제후임명권과 종법(宗法)이라고 불리는 혈연관계에 의해 유지되었다. 특히 군사·교통 요충지인 위(衛)·형(邢)·연(燕)·조(曹)·노 등의 영지에는 주의 일족 중의 유력자를 배치했다. 서주(西周)의 금문에 나타난 자료에 따르면 제후가 봉신이 될 때에는 제사권의 상징인 청동기, 군사권의 상징인 궁시를 받았으며 토지(경작지·산천·마을 등을 모두 포함)의 지배권도 인정받았다. 또한 지배해야 할 사람의 종류와 수가 정해져 있었다. 지배받는 사람은 대체로 3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제후국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로서 병역(兵役)의 부담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둘째, 거마의 관리 및 기술적 임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로서 백이라는 하급귀족의 지휘를 받았다. 셋째, 그 영지에 사는 농민들로서 주로 조세징수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제후의 지배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불분명하며 또 경지 이외의 산천(山川)에 대한 지배형태는 어떠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제후 아래 직책으로 백과 남이 있었는데 이들은 재지토호(在地土豪)로서 일정한 지배권, 또는 소규모 경지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소규모 농지는 주왕 직할령이나 제후령 안에 존재했다.

이들 제후는 주왕실의 제사나 원정(遠征)에 반드시 종사해야 하며 관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관직에 나가면 하급관리를 지배했고 얼마간의 수입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관직 취임은 주왕조의 정치기구를 이완시키고 주왕조의 수입을 감소시켜 왕권의 쇠퇴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약해지자 종법으로 제후를 통제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 봉건제는 춘추시대 중기까지 유지되다가 그 이후 붕괴되었다. 그리고 여러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를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벌써 진한시대에 실시된 군현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오늘날 중세 유럽의 봉토관계에 의한 지배체제를 설명할 때 중국에서 유래한 '봉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중국의 봉건제는 내용이 서로 다른 부분이 적지 않으며 특히 영주와 봉신간의 권리·의무 관계를 규정한 법적 관계에서는 다른점이 많다. 유럽 봉건제에서는 피지배자(봉신과 농노)의 권리가 그대로 지배자의 의무가 되어 이 문제에 시비가 일어날 경우 피지배자의 동료들을 배심원으로 하는 재판소에서 판결하는 원칙이 있어 피지배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피지배자와 지배자가 서로 동등한 지위에서 권리와 의무 사항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봉건제에는 이와 같은 법적 신분보장이 없었다.

일본의 봉건제

개요

일본 봉건제의 기원에 대해서는 2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의 쇼군[將軍]과 고케닌[御家人] 사이에 맺어진 주종관계를 봉건제도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도 시대[江戶時代:1603~1867]의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때 성립된 영주와 농민 관계를 봉건제의 시점으로 파악하여 이때 봉건사회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2가지 학설 중 후자의 견해,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창업한 도쿠가와 바쿠후가 각 지방에 다이묘[大名]를 두어 일본 전역을 통치한 에도 시대가 봉건제 실시의 기점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본사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일본 사학계는 일본의 봉건제를 중국적 개념과 서양적 개념의 2가지 관점에서 해석해왔다.

중국적 개념

에도 시대의 지식인들은 당시 자신들이 살고 있던 정치체제를 토지와 인민을 나누어가진 중국 고대의 봉건체제와 유사하다고 판단하여 율령제적인 군현제와 대비했다. 중국에서의 역사적 경과는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이행한 것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있었던 권문사사의 장원과 여기에서 발전된 무사 계급의 출현을 군현제가 붕괴하고 바로 봉건제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봉건제 성립 시기는 무가정권의 성립, 바꾸어 말하면 가마쿠라 바쿠후의 성립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게 되는데 그 이후 봉건제도는 곧 '무가정권'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대의 지식인들은 판적봉환에서 폐번치현에 이르는 과정을 무가정권의 해체과정으로 파악하여 봉건제의 폐기, 군현체제의 성립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적 개념의 봉건제가 도입되어 이러한 견해는 힘을 잃게 되었다.

서양적 개념

일본의 근대사학에서 봉건제 연구는 1890년대 후반에 꽃피기 시작했는데, 특히 독일의 봉건제 연구를 참고하여 일본에도 유사한 형태의 봉건제가 있었음을 입증하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독일 학계에서의 봉건제 연구는 전통적으로 베네피키움과 봉신제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영주-봉신 관계를 둘러싼 제도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의 봉건제는 장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은대지제도이며 무사계급에서 특수하게 발달되었다. 또 봉신제와 결합된 시기는 헤이안 시대 중엽에서 찾아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사학계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봉건제 개념을 농노제로 이해하게 되었다. 농민은 경작권의 제약을 받았고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공조를 내야 했으므로 넓은 의미에서 에도 시대의 농민을 농노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서양적 개념에서 봉건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법제사적 측면에서 봉건제를 파악하려 했고 농노제를 강조한 학자들은 경제사적 측면에서 이를 해석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