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1세

그레고리오 1세

다른 표기 언어 Gregorius I 동의어 대교황 그레고리오, 대 그레고리오
요약 테이블
출생 로마, 540경
사망 604. 3. 12,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축일은 3월 12일.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590~604 재위)·신학자.
(영). Saint Gregory Ⅰ. 별명은 그레고리오 대교황.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교황즉위
  4. 동로마와의 관계
  5. 선교
  6. 기타

개요

행정·사회·종교의식·도덕 등을 개혁하였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노가 쓴 〈신국론 Civitas Dei〉을 사상의 근거로 삼아 중세에 틀을 갖추게 된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사회를 고안하였다. 여러 업적 가운데 미사 개혁은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를 낳게 했다. 8세기부터는 '교회학자'(doctor of church)로 인정받았다.

초기생애와 경력

아니키아 지방의 훌륭한 귀족 가문으로 여겨지는 가정에서 고르디아누스와 실비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교황 펠릭스 3세(483~492 재위)였으며, 교황 아가피토 1세(535~536)도 그의 친척인 듯하다. 로마에서 살던 젊은 시절 이탈리아를 위협하던 롬바르드족(族)이 마침내 쳐들어왔다(568). 572년 32세의 나이에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스'(도시장관:로마의 행정수반)가 되었으나 정치적·사회적 상황 때문에 2년밖에 있지 못하였다. 수도원제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가운데 일부인 카일리우스 언덕에 있는 궁전을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성 안드레아 수도원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자신이 수도원장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 다음 전 재산을 들여 시칠리아에 있는 자기 토지에 6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교황 베네딕토 1세(575~579 재위)는 그를 로마의 부제(副祭)로 임명하였고, 579년 교황 펠라지오 2세(579~590 재위)는 그를 교황 사절(교황청의 유일한 외교 창구)로 임명하여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그레고리오는 그곳에서 584년까지 황제 티베리우스 2세(578~582 재위)와 마우리스(582~602 재위) 밑에서 일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로마와 마찬가지로 롬바르드족의 공격을 받고 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로마를 위한 지원을 얻어내는 데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교황즉위

교황에 선출되지 않으려고 진심으로 애썼으나 결국 590년에 서방 교회에서 가장 높은 성직인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는 편지에서 자기가 억지로 그 직위를 맡게 되었다고 불평했지만, 민중을 위한 교황이 되기로 결심하고, 롬바르드족에게서 도망쳐 나온 3,000명의 수녀를 포함해 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더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시칠리아에서 곡물을 실어오게 하였으며 교회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왔다.

교황청 전체 행정을 일원화하였고, 고위관리들의 부패와 태만을 맹렬히 비난했다.

고위관리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관리하기 때문에 철저히 정의의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으므로 뇌물을 받는 부패한 동로마 관리들은 검색을 받아야 했다. 그는 사회적 관심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최초의 교황으로 잘 알려졌는데 그의 편지 중 하나를 보면 이와 같은 노력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교회 창고가 불명예스러운 이득으로 더렵혀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사도 1:44).

물질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위기에 처해 있던 이탈리아 교회를 개혁하고 구제하려고 나선 그는 우선 대외적으로 아리우스주의(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이 본질상 일체임을 부인하는 이단)를 내세우고 있는 미개한 롬바르드족에게 가톨릭 신앙을 서서히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롬바르드족이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으며, 그 일로 로마가 동로마 제국과 절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세금정책에도 반대했는데 이유는 세금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때때로 세금을 내기 위해 자녀들을 팔거나 롬바르드족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롬바르드족은 자기 영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하면서 그레고리오에게 손을 내밀기도 했는데, 이때 교황은 자신을 가리켜 "그 도시의 봉급지불 담당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라벤나 주재 동로마 총독 로마누스는 교황이 제시한 평화보다는 전쟁을 더 바랐기 때문에 롬바르드 왕 아길룰프(590~616 재위)의 평화조건들을 거부했다.

그는 그레고리오에게 무례히 행동했으며, 황제 마우리스 앞에서 교황을 모욕하기도 했다. 롬바르드족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던 시기에 그레고리오가 쓴 편지들에는 로마누스의 계략과 황제에 대한 비난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교황의 성격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당시 역사에 대한 생생하고도 탁월한 해석을 보여준다.

598년이 되어서야 일시적이나마 이탈리아에 평화가 찾아왔다.

동로마와의 관계

트라키아 출신의 제국군대 백부장인 포카스는 602년에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선출 형식을 취했으나 찬탈하다시피하여 황제자리에 올랐다.

그는 황제 마우리스와 황후 콘스탄스, 그들의 다섯 아들(맏아들이 교황의 代子였음)과 세 딸을 처형했다. 사회와 정치가 불안한 상황을 이용할 줄 알았던 포카스(훗날 백성의 원성을 사는 전제군주가 되었음)는 대중을 다루는 방법도 알았다. 교황의 동정도 얻었고 롬바르드족에 대한 정책도 교황의 승인을 얻었는데, 이 일은 교황의 성인 같은 인품에 흠을 남기는 일이 되었다.

교황의 승인을 얻자 갈수록 공포정치를 한 포카스는 더 나아가 교황의 지지까지 구했는데, 이는 교황의 축복이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사면해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도덕의 보루라고 할 만한 교황의 이러한 행동은 그뒤 여러 교황이 본받는 선례가 되었다. 한편 동로마의 포카스가 롬바르드족과 화해함으로써 이탈리아와 롬바르드족의 평화관계는 그레고리오가 아닌 포카스에 의해 이루어진 셈이되었다. 그레고리오는 포카스를 승인한 대가로 이루어진 평화가 부정적인 결과들을 초래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포카스가 교회의 관할권에 대해 교황이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여 자신이 교황 아래 있다는 인상을 그레고리오에게 주었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은 언제나 그러한 태도에 만족하였으며, 그 결과 타협하는 사람들의 성격 등 다른 문제를 간과해버렸다.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인 요한 4세(금식자)보다는 그 자신을 '세계 총대주교'라는 명칭으로 부른 포카스에게 현혹되었다. 세계 총대주교라는 말은 큰 물의를 빚었던 칭호로서, 경건하고 인간미가 있던 전임 황제 마우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에게 이 칭호를 붙여준 적이 없었으나, 대주교 요한 4세는 전임 대주교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이 칭호를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에 대해서 전임 교황 펠라지오 2세도 반박한 적이 있었는데, 595년 그레고리오가 교황의 우위를 확신하고서 이 칭호 사용을 반대하였다. 그 대신 성 아우구스티노에게서 빌어온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칭호을 취했는데, 표현 자체는 대단히 겸손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었다.

포카스 치하의 무정부 상태에서 후기 로마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예리한 통찰력으로 서방 이주민들의 중요성을 내다본 그레고리오는 그들에게 아직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상태이지만 서방교회의 앞날이 그들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야만족 세력을 동로마 제국의 정치권으로 끌어들여 통일된 그리스도교 세계를 로마 교회의 권위 아래 두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롬바르드 왕 아길룰프의 아내로 야만족 출신이자 가톨릭 신자인 테오돌린다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관계를 강화하였으나 아길룰프의 아들 아달로알드만은 615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또한 강력한 메로빙거 왕조의 여왕 브룬힐에 대해서는 이전에 포카스에게 하듯 굴종적인 태도로 대했다.

선교

596년 브룬힐의 보호 아래 그레고리오는 '영국에 대한 선교'라는 자신의 재임기간중 가장 위대한 일을 시작하였다.

그가 영국 선교를 결정한 것은 아직 로마 교회에 가담하지 않은 채 동방교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매우 영적인 아일랜드-스코틀랜드 수사들이 마침내 영국 선교에 나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도원제도). 아우구스티노(나중에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됨)와 40명의 수사를 파송하여 영국에서 사목하도록 한 그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교도 국가였던 영국인들의 심성과 관습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데 반해 아우구스티노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 이후 영국에 선교사로 파송된 수사 성 빌리브로르도(658~739)와 성 보니파시오(672/673경~754)는 영국에 대한 그레고리오의 노력에 힘입어 유럽 대륙에서도 선교 사목을 지휘할 수 있었다(→ 브리튼, 아일랜드).

선교에 대한 그레고리오의 생각은 반드시 평화로운 방법으로 설득하여 개종시킨다는 수도원의 이상과 꼭 일치하지만은 않아서 때때로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전쟁을 옹호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출신의 동로마 총독 겐나디우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요구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한 견해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평화를 유지하려던 노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선교 사목이라는 영적 전쟁과는 매우 다른 '성전'(聖戰), 즉 십자군의 초기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아주 호전적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1025경~85)나 그레고리오 7세와 동시대 사람이자 유명한 전쟁이론가였던 루카의 안셀무스(교황 알렉산데르 2세)와 수트리의 보니조누스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말이 있으나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최초의 출정 축복이 그레고리오에게서 유래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와 함께 중세의 교회 전쟁 이념을 정착시킨 인물이 되었고, 브룬힐에게 무력으로 이교도를 제물로 희생시키는 것을 방지하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유대인 문제에서는 개종할 경우 경제 혜택을 제공하는 등 기본적으로 아량있는 태도를 취했다.

만일 강압에 의한 개종이 효과가 있었다면 그레고리오는 그런 정책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한 정책은 가톨릭으로 개종(587)한 지 얼마 안되는 레카레도 왕(601 죽음)이 스페인에서 사용한 적이 있으며, 위대한 교회 지도자로 유대인의 적이었던 세비야의 성 이시도로(560경~636)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기타

노예매매에 대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노예를 사고 팔기도 했으나 자유인으로 만들어주기도 하였고 때로는 노예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무거운 벌로 경고하기도 했다. 엄격한 금욕을 옹호했는데, 아마 이 때문에 위장병과 관절염을 앓게 되어 말년에는 거의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는 조직가·사목자·관리자였지만 정치가는 아니었다.

베드로의 유산(교황청이 관할하는 영토)을 공고히 한 일은, 그가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뒷날 세워질 교황령 및 교황의 세속권력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베드로의 유산을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할 때는 즉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교회재산으로 인해 교황들이 권력을 남용할 수 있고 갈수록 제국주의 정책을 펴 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그 견해는 세속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역할에 대한 그레고리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았다.

자신이 교황으로 재직하던 시기를 두번 다시 오지 않을 사목의 시기로, 권위를 행사하기보다는 자선을 행해야 할 시기로 이해했다. 묘비에 새겨진 '하느님의 집정관'이라는 글귀는 그의 정책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 공화국'(societas reipublicae Christianae)에 대한 자신의 구상이 군주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이념은 뒷날 중세에 좀더 구체적인 틀을 갖추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사상(특히 하느님의 도성에 관한 이해)에 철저히 의존하였지만 사변적인 신학에 빠지지는 않았다.

사상과 행동을 통해 최초로 세속권위를 교회권위에 종속시키고 사제를 제일 높은 신분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한 그는 세상으로부터의 은거와 세상에 대한 열정,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염세주의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 내세지향성과 권력추구 등이 묘하게 혼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