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주의

금욕주의

다른 표기 언어 asceticism , 禁慾主義

요약 금욕주의는 전인개발, 인간적 창조성, 사상, 자아, 또는 기술의 숙련을 요하는 기량 등 여러 가지 궁극적인 목표 또는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힌두교·불교·그리스도교와 같은 고등종교에서는 현세의 삶은 덧없는 것이므로 피안의 세계에 소망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깨달음, 영성은 생활방식을 단순화함으로써 가장 잘 보존될 수 있다는 믿음과 '세속화에 대한 반동'이 금욕주의를 발생시킨 원인이었다. 금욕주의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실천되는 것은 절제와 금식이다. 수도자들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멀리하기 위해 광야, 절벽, 사막의 변방, 산중에서 혼자 지내기도 했다. 심리적인 형식의 금욕주의로서 번뇌를 일으키는 자성의 방법이 불교의 금욕주의자들에 의해 명상훈련과 결합하여 구사되기도 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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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금욕주의의 기원
  3. 종교적 금욕주의의 형태
  4. 종교에서의 금욕주의의 변형
금욕주의
금욕주의

개요

모든 종교에 어느 정도 금욕주의의 특징이 있다.

금욕주의의 기원

금욕주의는 전인(全人) 개발, 인간적 창조성, 사상, 자아(自我), 또는 기술의 숙련을 요하는 기량 등 여러 가지 궁극적인 목표 또는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신체적 건강과 탁월함을 이상으로 추구하는 운동선수의 '아스케시스'(askēsis:'훈련'의 뜻으로 askeō의 명사형)는 가능한 한 최고도의 신체적 적합성을 기를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 가운데 올림픽 경기 같은 체육대회에 출전할 운동 선수들은 신체 단련을 위해 여러 가지 정상적인 욕구 충족을 멀리하고 어려운 육체의 시험들을 견뎌냈다(→ 그리스 철학). 전쟁기술에 고도로 숙달되기 위해 전사(戰士)들도 여러 가지 금욕을 실천했다.

고대의 이스라엘인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성생활을 억제한 것도 그 하나의 예이다.

신체적인 숙련 이외의 가치들이 개발되면서 '아스케시스'와 그것의 동족어(同族語)들에 의해 표현된 개념은 두뇌의 원활한 회전, 의지력, 정신적인 활기, 영적인 능력 등 다른 이상들에 적용되었다. 따라서 신체적 목표를 위한 훈련의 이상은 지적 기능들을 개발하고 훈련함으로써 지혜, 즉 두뇌의 뛰어난 능력을 얻는다는 이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한 지적 훈련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현학적인 소피스트들의 집단이 생겨나게 했다. 소피스트란 BC 5세기와 4세기에 보수를 받고 가르치던 순회 교사, 작가, 강사들의 통칭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스케시스'의 개념에 또 한번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러한 훈련관(訓練觀)이 바람직한 대상이나 육체적 향락 행위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현자가 이상으로 삼는 윤리의 영역에 적용되었을 때였다. 관능적 쾌락의 생활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력을 기르는 것이 주된 목표인 이런 종류의 '아스케시스'에 모범을 보인 것이 스토아 학파(이성에 의한 감성의 통제를 주장한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파)였다.

인간은 영적인 소망이나 고결한 포부와 상치되는 관능적 또는 육체적인 저급한 욕망을 물리쳐야 한다는 견해는 윤리사상에 하나의 중심원리가 되었다.

플라톤은 정신이 자유롭게 지식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려면 육욕을 억누를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견해는 AD 3세기의 그리스인으로 실재(實在)의 계층 구조에 관한 철학인 신플라톤주의를 창시한 철학자 플로티노스에 의해서도 제시되었다. 금욕을 감정의 충동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한 수양의 방편으로 삼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인성의 존엄과 현자의 필수 조건인 불혹(不惑)을 목표로 내세웠으며, 이 목표는 인간의 감정적 또는 탐욕적인 면을 억제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개인의 의지력과 개인의 보다 깊은 내면에 있는 영적인 능력들을 북돋우는 데 있어 금욕이 갖는 가치가 역사상 여러 종교와 철학의 일부분을 이루어왔다.

예컨대 19세기의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삶의 의지를 단절하는 식의 금욕주의를 옹호했고, 그와 같은 나라 사람이며 동시대 선배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는 스토아 학파의 실천원칙에 따른 덕성의 함양을 위해 도덕적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종교적 금욕주의의 발생과 배양에는 많은 요인이 작용했다.

악마로부터 악의의 영향을 받을 것에 대한 공포, 사람이 초자연적인 존재와 교제하기 위해서는 필수조건의 하나로 의식(儀式)의 순결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견해, 신이나 거룩한 존재에게 간구하는 자가 자기가 실천하고 있는 극기 행위에 상대의 주의를 끌려는 욕망, 금욕의 실천은 스스로 부과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동정과 연민과 구원을 얻게 된다는 생각, 속죄의 필요를 일깨우는 죄의식, 금욕은 초자연력에 접근하는 수단이라는 견해, 인간의 영적인 부분을 육체와 육체적인 삶의 오염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노력의 근저에 있는 이원론적인 관념의 힘 등이 그런 요인들이다.

고등종교(힌두교·불교·그리스도교 등)에서는 또 다른 요인들이 금욕주의의 발생과 배양에 기여했다.

현세의 삶은 덧없는 것이므로 피안의 세계에 소망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깨달음, 영성(靈性)은 생활방식을 단순화함으로써 가장 잘 보존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흔히 결합되는 세속화에 대한 반동이 그러한 요인들이다.

종교적 금욕주의의 형태

엄격한 금욕주의 운동 모두에서 첫째 계명으로 간주된 것이 독신주의 였다.

독신녀와 독신남들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독신남들이 교회의 정회원으로 인정되었으며, 일부 종교(아스텍의 종교와 로마 가톨릭교 등)에서는 독신남만이 사제가 될 수 있었다. 세속적인 행복의 포기 또한 금욕주의의 근본 원리였고 이 이상을 추구하는 강한 경향이 수도원 공동체들에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원 제도에 이 이상을 가장 철저하게 규정한 사람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수도원들의 창설자인 알렉산드로스 아코이메토스(430경 사망)였다.

중세 서구의 그리스도교 수사인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가 활동하기 수세기 전에 알렉산드로스는 빈곤한 생활을 실천하기로 뜻을 정하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 동방의 그리스도교 수도원들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수사들은 동냥생활을 했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같은 서구의 일부 수도회들에서 나타난 현상과는 달리 동냥받은 재물을 축적하여 일종의 가사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동양의 방랑하는 힌두교 고행자들과 불교 승려들 역시 세속적인 행복의 거부를 내용으로 하는 규칙에 따라서 생활한다.

모든 금욕주의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실천되는 것은 단연 절제와 금식이다.

그것은 원시 부족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는데, 사람이 먹고 있는 동안에 악령이 체내에 들어올 수 있으므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믿음이 금식의 한 원인이었으며, 특별히 위험하여 기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 음식물도 있었다. 제사(祭祀)와 관련된 금식은 아주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종교에서 육식의 거부가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채식주의의 비교(秘敎)인 오르페우스교,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종교, 수점(數占)을 믿는 비교집단인 피타고라스 학파에서였다.

많은 교회의 전례력(典禮曆)에서 가장 중요한 금식기간은 부활주일 전의 40일(사순절)이며, 이슬람교에서는 라마단 월(月)이다.

그러나 금욕주의자들은 평범하게 반복되는 금식일을 지정해놓은 전례력에 만족할 수 없어 그들 나름의 전통을 세웠다. 유대인 그리스도교도 집단과 영지주의(靈知主義) 집단은 채식 섭취에 관한 각종의 규정을 제정하였으며, 마니교의 수사들은 강도 높은 금식을 실천하여 찬탄을 받았다.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그들의 무자비하고 가차없는 금식에 관해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금욕 실천에서 그리스도교 수사들과 마니교도들에게 필적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시리아의 금욕주의 대가들뿐이었다.

시리아의 금욕주의자들은 수면시간을 줄이고 그 결과 짧아진 휴식시간도 될 수 있는 한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시험했다. 수도원에서 배를 밧줄로 동여매고 거북한 자세로 매달려 있기도 하고, 선 자세로 몸을 묶고 지내는 수사들도 있었다.

몸을 깨끗이 하는 것도 금욕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금기사항이 되었다. 많은 금욕주의자들이 거처로 정했던 사막의 모래 먼지 속에서나 동양의 햇빛이 눈부신 곳에서나 세수를 하지 않는 것은 몸에 고통을 더하는 고행의 일종이었다. 세수를 금기로 삼은 점에서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는 인도의 옛 고행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지저분한 넝마 차림에 손톱이나 발톱을 한번도 깎지 않고 몸에 때와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한 채 걸어다녔다. 금욕주의의 또하나의 실천 행위로 몸의 움직임을 줄이는 것은 독방에서 완전히 격리된 상태로 지내기를 즐기던 시리아의 수사들 사이에서 특히 유행했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멀리하기 위해 광야, 절벽, 사막의 변방, 산중에서 혼자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사는 곳은 많은 종교의 금욕주의 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 금욕주의자의 정신 상태에는 맞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형식의 금욕주의도 생겨났다.

번뇌를 일으키는 자성(自省)의 방법이 불교의 금욕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명상훈련과 결합하여 구사되었다.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성 에프라임 시루스는 영원한 재판관 앞에 서는 순간의 필수 과제로 정해진 죄책감·죄악·사망·벌에 관한 명상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수사들에게 충고했다. 명상은 자기의 내부에 있는 생명이 영혼을 상승시키고 심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도록 뜨거운 용암과 같이 열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보다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시리아의 수사들은 지속되는 공포와 불안으로 인해 끊임없이 눈물이 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극단적인 자학에 미달되면 금욕주의의 대가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고통을 일으키는 금욕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널리 보급된 관행의 하나는 몸을 기진맥진하게 하거나 그 자체가 고통이 되는 특정한 수련을 하는 것이었다. 추위와 더위는 그러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인도의 힌두교 행자(고행승)들은 고통스러운 형식의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예를 보여준다(→ 파키르). 인도에서 최초로 나타난 철저한 자학의 예는 눈이 멀 때까지 태양을 응시하거나 팔을 머리 위로 쳐들고 기진맥진할 때까지 견디는 행위였다.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수도원 생활의 자학 형태에도 독창적인 면이 있었다. 높이 평가받은 관행의 하나는 쇠로 만든 허리띠나 사슬 따위로 허리나 목이나 손발을 감는 것이었는데, 겉옷 속에 숨겨서 감는 경우도 많았다.

고통을 일으키는 금욕의 형태 가운데는 스스로 살을 짓이기는 행위(특히 거세행위)와 채찍질이 있는데, 그중 후자는 중세에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집단운동으로 나타났으며 지금도 멕시코와 미국 남서부 여러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다.

종교에서의 금욕주의의 변형

원시 종교에서 격리 생활, 육체의 고행, 질과 양에서 음식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금욕주의는 성년식(成年式)이나 부족 공동체에의 가입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술사들에게는 단기간이나 장기간의 격리와 그밖의 금욕 행위가 부과되었는데, 엄격한 자기훈련이 마법을 제압하는 능력을 얻는 지름길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북서부의 블랙푸트족을 비롯한 인디언 부족들의 사회에서 젊은 남자가 성인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했으며 이는 지금도 치르고 있는 의식이다. 장례나 전쟁과 같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일정한 음식과 동거를 피하는 등 터부(금기)가 부과되었다.

제사장과 추장의 경우에는 터부가 휠씬 더 엄격했다.

BC 300년경부터 AD 300년경까지의 헬레니즘 문명에서는 오르페우스교도들과 피타고라스학파를 포함한 비교적(秘敎的) 성격의 공동체들이 금식과 성관계 억제 형식의 금욕주의를 실천했다. 지중해 지역에서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 숭배와 같은 동양의 신비 종교들이 보급되면서 거세를 포함한 새로운 금욕주의의 관행이 생겨나게 되었다.

인도에서 후기 베다 시대(BC 1500경~200경)에는 금욕주의자가 명상 및 요가와 결합하여 타파스(몸을 창조력의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한 일종의 고행)를 행했는데, 이는 '타파스'가 죄를 없앤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수행들은 브라만(승려계급의 힌두인) 종교의 우파니샤드에 삽입되었으며, 이 타파스관(觀)은 브라만의 힌두교에서 분리된 금욕의 종교를 신봉하는 요가 수행자와 자이나교도들 사이에서 더욱 중시되었다.

자이나교는 모든 정염이 뿌리 뽑혔을 때에야 비로소 해탈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한 금욕관과 고행이 유행하던 인도의 풍토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영혼의 이익을 얻기 위해 몸소 육체의 자학을 실천했지만, 기대가 총족되지 않자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고(苦)는 욕망의 인연(因緣)으로 생긴다는 그의 기본 교의(敎義)는 불교가 금욕을 장려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수행자의 계율을 담은 율(律 Vinaya)에는 불승을 자기훈련에서 극단적인 금욕을 피하는 수도자로 그려져 있다.

중세에 힌두교에서 발전한 수도원 생활도 온건했다.

중국의 토착 종교인 유교도교 및 일본의 신도(神道)에서는 금욕주의가 일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유교에서는 제관(祭官)들만이 일정한 기간에 계율에 따라 절제를 하고 일정한 음식을 멀리했으며, 도교 안에서 일어난 몇몇 운동도 이와 비슷한 금욕주의를 실천했다. 일본의 신도에는 금욕주의자들도 있다.

유대교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으며 세계는 (인간을 포함하여) 선하다고 보는 종교인 만큼 당연히 비금욕적이며, 기도의 효력을 높이고 공덕을 얻기 위한 금식 정도가 고작이다.

금욕을 실천하다가 거룩한 삶의 증거를 보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완전히 개발된 금욕적인 생활방식이란 유대인의 사고로는 이질적인 것이었으며, 따라서 금욕주의의 경향은 유대교 주변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저류(底流)가 표면으로 솟아오른 것은 사해 두루마리와 관련된 은둔파인 에세네파(派)에서였다.

그들은 독신·빈곤·순종을 실천하는 수도회를 대표했는데, 쿰란(요르단의 일부였던 지역의 사해 부근)에 있던 그들 공동체의 유적이 1940년대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됨으로써 유대교 내에 금욕주의 운동이 있었음이 새로이 밝혀졌다.

조로아스터교(BC 7세기에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에는 공식적으로 금욕주의가 생길 여지가 없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에서 금식과 고행은 금지사항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에도 금욕주의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유형의 금욕주의가 실현을 보았다.

복음서에는 금욕주의가 전연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주제는 금욕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금욕주의적인 견해는 바울로의 서신인〈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발견된다. 이 서신에서 그는 경주에서 우승하기 위해 자신을 부단히 단련하고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되는 영적인 운동선수의 비유를 쓰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의 생활에 특징을 이룬 것은 대체로 절제·금식·철야였지만, 그리스도교의 몇몇 분파는 점차 철저하게 금욕적으로 되어갔다.

이런 운동집단 가운데 원시 형태의 시리아 그리스도교인 엔크라테이아파(派)의 사람들과 마르키온의 추종자 등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의 2, 3세기 동안 금욕주의자들은 그들의 공동체 안에 머물렀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으며 순교와 독신 생활을 금욕의 중심으로 보았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3세기 말에 이르러 수도 생활이 시작되어 수도원 공동체에서 항구적인 형태를 이루었다(→ 수도원제도).

AD 313년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정해지면서 수도 생활은 새로운 추진력을 얻어 서방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로마 가톨릭교에서는 새로운 수도회들이 대규모로 설립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금욕주의를 배척했지만 일정한 형식의 금욕주의가 칼뱅주의, 청교도주의, 경건주의, 초기 감리교 운동 및 옥스퍼드 운동(19세기에 성공회 내에서 교회의 옛 이상들을 추구하여 일어난 운동)에서 출현했다(→ 개신교).

금욕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 이 윤리는 철저하게 전문직에서 실적으로 나타나는 성취를 요하며 동시에 합법적으로 얻은 물질적 이득의 향유를 단호히 버릴 것을 요구하는 윤리이다.

초창기의 이슬람교는 금식밖에 몰랐으며, 금식은 라마단 월(月)에는 의무적이었다.

수도 생활은 〈코란〉에서 배격되고 있다. 그렇지만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 금욕주의자들의 세력이 두드러지게 강하여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으며, 이에 동화되어 이슬람교 내에서 '주드'(zuhd:자기 부정)로 알려진 금욕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뒤이어 수피즘(Sufism) 운동이 일어났다. 수피즘은 8세기에 일어났으며 금욕주의적인 이상과 방법들을 통합한 일종의 신비주의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