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 수도회

베네딕토 수도회

다른 표기 언어 Benedictine Order

요약베네딕토(480경~547경)의 수도회칙을 따르는 수사들과 평신도 형제들의 모임.

중세 초기 이탈리아와 갈리아 지방에서 유행하던 전통적인 수도원제도를 물려받았다.

베네딕토 수도회는 각 수도원이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단일 수도회라고 볼 수 없다.

베네딕토는 535~540년경에 자신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염두에 두고 흔히 '성 베네딕토의 규율'이라고 불리는 규율서를 썼다. 이 규율은 이탈리아와 갈리아 지방에 서서히 확산되어, 수도원 운영과 수도원의 정신적·물질적 복지를 위한 완전한 지침이 되었다.

이 규율은 기도·육체노동·연구활동을 하루일과 속에 적절히 배치했다. 7세기 무렵에는 이 규율이 수녀들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이 수녀회의 창설자는 베네딕토의 누이인 스콜라스티카로 알려져 있다.

9세기초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 북유럽과 서유럽에서는 베네딕토 규율이 대부분의 다른 규율을 대체했다. 베네딕토가 죽은 뒤 5세기 동안 수도원의 규모와 자산은 크게 성장했다. 수도원은 서유럽에서 학문의 중심지이자 각종 문헌의 보관장소였으며, 중요한 교육기관이었다.

베네딕토 수도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910년 아퀴텐의 기욤이 개혁의 집(reform house)으로 지은 클뤼니의 부르고뉴 수도원이었다. 다른 수도원들도 클뤼니의 개혁을 모방했으며, 그후 유능한 수도원장들은 엄격한 클뤼니 대수도원의 관행을 따르고, 클뤼니 대수도원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는 서유럽의 여러 수도원들을 연결하는 조직망을 서서히 만들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전성기는 12세기 중엽에 끝나고, 그다음 3세기 동안 쇠퇴와 퇴락의 길을 걸었다.

15세기에 들어서자 새로운 베네딕토 수도회 조직이 생겨났다(회중). 1424년 파도바의 산타 기우스티나 수도회는 베네딕토 수도회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수도원장은 3년마다 선출하고, 수사는 수도회 앞에서 선서하도록 했으며, 최고 권위는 연례 참사총회 또는 입법회의에 집중되도록 했다.

이러한 급진적 개혁은 1세기도 못 되어 이탈리아의 모든 베네딕토 수도회로 확산되어 카시노 수도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 전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혁이 일어났다. 이러한 개혁은 16세기에 들어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 직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1525~60), 북유럽에서는 수도원과 수녀원이 거의 다 사라졌고, 프랑스와 중부 유럽에서는 100여 년 동안이나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17세기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수도원운동이 부활하여 여러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남자 수도회인 프랑스의 마우루스회와 여자 수도회인 파리의 영원경모회(1653), 갈보리 성모회(1617) 등이 바로 그것이다.

18세기에는 수도원운동이 다시 쇠퇴했지만, 19세기 중엽부터 베네딕토 수도회와 수녀회들이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다. 전례를 강조하는 솔레스메스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유럽 전역에 생겨났고, 수사와 수녀들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남·북 아메리카에도 여러 수도회가 설립되었고, 세계 곳곳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수도원운동이 이처럼 부흥하자, 교황 레오 13세는 전통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해온 베네딕토 수도회들을 일종의 통합조직으로 묶어내려고 했다. 1893년 그는 자율적 수도회들의 연합체를 이끄는 수좌(首座) 대수도원장직 제도를 만들었다. 베네딕토 수도회는 자율성을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조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이 직제는 점차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베네딕토 수도회 수사들은 명상과 예배로 이루어진 수도원 생활을 비롯해 교육·학문연구·교구활동·선교활동을 포함한 여러 가지 활동에 종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