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문

조선향토대백과 유물유적정보관 : 유적

보통문

[ 普通門 ]

분류 유물유적정보관>유적>성곽 · 봉수>성문
유물유적시대 삼국
행정구역 평양시>중구역>보통문동
등급 국보급
지정번호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3호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있는 평양성 중성의 서문. 보통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가 수도성인 평양성을 쌓을 때 함께 세웠다. 보통문은 고려시대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는데 『고려사』에서는 이 성문을 ‘광덕문’이라 불렀다. 아침해를 다시 본다는 뜻에서 ‘우양관’이란 이름도 붙었다. 그 후 이 문은 보통강반에 위치하였다 하여 보통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 · 개건되어 오다가 1473년에 개건한 것이다.

보통문은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국방상 또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고구려시기부터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시 되었다. 옛날부터 ‘보통송객(보통문에서 손님 바래는 장면)’은 평양8경의 하나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웅장하면서도 균형이 잘 짜여진 아름다운 건물로서 고려건축 양식을 많이 보여준다.

보통문은 화강석을 다듬어쌓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로 이루어졌다. 축대복판에는 홍예문길을 내고 문 길 앞쪽에는 앞뒤에 쇳조각들을 줄지어 입힌 튼튼한 널문을 달았다. 지금도 널문과 그것을 잠그고 멈추고 하던 시설들이 남아있다. 높이 쌓아올린 축대와 너비 4.4m, 높이 4.55m의 홍예문 길은 우리 선조들의 높은 돌쌓기기술을 보여 준다.

문루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이며 흘림기둥들이 두공을 이고 그 위에 2층의 날아갈 듯한 합각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바깥기둥들은 1층의 지붕에 이어지고 집안의 4개의 기둥은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여 세웠다. 바깥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연결된 보 위에는 짧은 2층 기둥이 놓여 있다.

두공은 1층과 2층에서 안팎이 다같이 3포로 되었다. 두공첨차의 간격은 같지 않으며 제공은 ‘소의 혀’형으로서 그 윗면 중간에 턱을 지어 변화를 주었다. 문루의 2층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우지 않고 1층 추녀의 뒤초리가 기둥을 대신하게 하였으며 마루도리밑에는 아름다운 화반대공을 세우고 그 좌우에 활개를 받쳐 집의 변형력을 높였다. 이 모든 것은 고려건축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보통문은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높이가 조금 낮고 또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게 되어 있다.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동과 마루도리를 연결하는 3각형 그리고 정면에서 축대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중심을 연결하는 3각형은 거의 정3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어 보통문은 장중하고 안정한 느낌을 준다. 보통문은 조선 초기의 보기 드문 건축유산으로서 고려건축술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깃들어 있다. 여기서 흘림기둥을 세우고 안팎 다 같은 3포식두공을 얹은 것, 두공의 장식이 검박한 것, 마루도리 좌우를 활개로 지지한 것 등이 그 두드러진 표현이다.

6 · 25전쟁시기 폭격으로 보통문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 평양시민들이 희생적으로 불을 끄고 이것을 살려냈다. 1962년 평양시에 새로운 거리들이 형성되면서 천리마거리와 창광거리, 보통문거리와 보통교를 통하는 거리들을 잇는 중심점에서 거리의 민족적 향취를 돋우어주고 있다.

마지막 수정일

  •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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