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춘

낙양춘

[ 洛陽春 ]

요약 송사(宋詞)의 한 곡명. 일명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하운봉"(夏雲峰).

① 구양수(歐陽修 1000~1072)가 지은 "낙양춘"은 본래 일낙색(一落索)의 별칭을 지녔고, 『고려사』 권71(「악지」) 소재 "낙양춘"의 산사(散詞)는 쌍조(雙調)의 50자(字) 전후단(前後段) 각 구(句) 3측운(仄韻)으로 됐으며, 송나라의 교방악인(敎坊樂人)들이 구양수의 일낙색의 시를 가창하기 좋도록 약간 고친 것이다. "낙양춘"의 사(詞)를 번역한 일부를 제시하면 이렇다.

"사창(紗窓) 아직 밝지 않았는데, 꾀꼬리 소리 울려온다. 혜초(蕙草) 피우는 향로(香爐)에 남은 향 줄기 다 타버렸네. 비단 병풍 긴 방장(房帳)으로 봄 추위 막았는데, 간밤의 삼경(三更)에 비가 내렸네. ··· 운운."

② 조선초기 연례악(宴禮樂)의 한 곡명. 1431년(세종 13) 조참의(朝參儀) 때, 그리고 1445년(세종 27) 조참(朝參) 때 임금이 입궁할 때 연주됐다. 고려 때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낙양춘"은 기영회(耆英會) 투호(投壺) 때 연주하고, 망궐례(望闕禮)·망궁례(望宮禮)·배표전(拜表箋) ·하대비전(賀大妃殿) 및 조하(朝賀)·조참(朝參)·연향(宴享)에서 배례(拜禮)할 때 전정악(殿庭樂)으로 "낙양춘"을 연주하며, 문소전(文昭殿)의 참신사배(參神四拜) 때 황종청궁(黃鍾淸宮)의 "낙양춘"을 연주한다.

성종(1469~1494) 때 당악(唐樂)을 연주할 악공취재(樂工取才)의 곡명 중 하나라고 『경국대전』(經國大典) 권3에 전한다. 16정간보(井間譜)와 율자보(律字譜)로 기보된 "낙양춘"은 『속악원보』(俗樂源譜) 권3에 전한다. 『속악원보』에 전하는 "낙양춘"의 음악적 구조는 이렇게 구성됐다.

"낙양춘"의 시 1구는 음악적으로 8박에 해당되고, 8박은 다시 4박과 4박의 두 단위로 구성된다. 악구를 나타내는 박은 제4박과 제8박에서 연주되기 때문에, 시 1구는 두 악구로 표시됐다. 구양수가 지은 "낙양춘"의 시 1구와 3구는 일곱 글자로 구성됐고, 2구는 다섯 글자로 구성됐으며, 4구는 여섯 글자로 구성됐다. 네 시구(詩句)의 글자가 불규칙하게 배열됐다. 네 글자마다 박이 규칙적으로 들어가 있으므로, 8박으로 구성된 시 1구의 음악은 일정한 길이로 연주됐다. 8박의 일정한 틀 안에서 모자라는 글자는 장인(長引) 곧 길게 끌어서 노래를 불렀다.

이렇듯 "낙양춘"처럼 불규칙한 산사는 사언절구(四言絶句)나 오언절구(五言絶句)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의 규칙적인 당시(唐詩)와 구분됐다.

『속악원보』 신편(信篇) 소재의 "낙양춘"

『속악원보』 신편(信篇) 소재의 "낙양춘"

영조 갑자년(1744)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의하면, 1744년(영조 20) 중궁전(中宮殿)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내연 및 영조를 위한 구작행례(九爵行禮)에서 "낙양춘"은 제6작의 진탕(進湯) 때 연주됐다. 고려 때부터 관현반주에 얹어서 노래로 부르던 "낙양춘"은 "보허자"(步虛子)처럼 관현반주에 의한 성악곡이었다. 그렇지만 『속악원보』 소재 "낙양춘"에는 한문가사가 없으므로, 이 낙양춘은 19세기 말기에는 기악곡이 됐다. 일제강점기 연주된 연례악(宴禮樂)의 한 곡명이었다. 아명은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이다.

현행 "낙양춘"은 연례악곡으로 연주되는 순수한 기악곡이지만, 본래는 기악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성악곡이었다. "보허자"처럼 "낙양춘"은 환입(還入) 곧 도드리형식이다. 이 곡의 가락황종(黃鍾)·태주(太簇)·고선(姑洗)·중려(仲呂)·임종(林鍾)·남려(南呂)·응종(應鍾) 이상 7음음계로 구성됐다.

현재 기악곡으로 연주되는 이 곡은 편종·편경·대금·당적·당피리·해금·아쟁·장고·좌고의 악기편성으로 됐다. 연주 시간은 약 5분 35초 정도이다. 조선말기 연주되던 "낙양춘"은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고 있다. 그 곡의 아명은 "기수영창지곡"과 "하운봉"이다.

③ 조선후기 연례악(宴禮樂)의 한 곡명. 아명은 "창운송지곡"(昌運頌之曲)·"희안지곡"(熙安之曲)·"만세성지곡"(萬歲聲之曲)·"축화지곡"(祝華之曲)·"하성조지곡"(賀聖朝之曲)·"강낙지곡"(康樂之曲)·"낙만년지곡"(樂萬年之曲)·"낙만춘지곡"(樂萬春之曲)·"낙승평지곡"(樂昇平之曲)·"이명지곡"(离明之曲)·"만방녕지곡"(萬方寧之曲)·"만사년지곡"(萬斯年之曲)·"만세성지곡"(萬歲聲之曲)·"벽숭만세지곡"(碧嵩萬歲之曲)·"사방내하지곡"(四方來賀之曲)·"산하옥력장지곡"(山河玉曆長之曲)·"수제천지곡"(壽齊天之曲)·"천청해안지곡"(天晴海晏之曲)·"축유여지곡"(祝有餘之曲)·"태평춘지곡"(太平春之曲)·"하리명지곡"(賀离明之曲)·"하성조지곡"(賀聖朝之曲)·"헌천수지곡"(獻天壽之曲).

영조 갑자년(1744)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의하면, 1744년(영조 20) 영조의 보령(寶齡)이 망육순(望六旬) 즉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한 것을 경축하는 잔치 때, 1795년(정조 19)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회갑연 및 정조의 등극 20년을 경축하는 잔치 때 연주됐다.

1829년(순조 29) 순조의 왕세자 효명세자(1809~1830)가 부왕의 40세 생일과 즉위 30년을 경축하기 위해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에서 외진찬(外進饌)을 열었을 때 공연된 아박무(牙拍舞)의 반주곡인 "창운송지곡"·"희안지곡"이라는 "낙양춘"의 아명으로 연주됐다. 1848년(헌종 14) 헌종의 할머니 순원왕후(1789~1857)의 보령 60세 및 어머니 신정왕후(1808~1890)의 보령 40세를 경축하는 잔치 때, 그리고 1868년(고종 5)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회갑을 경축하는 내진찬 및 1892년(고종 29) 고종의 망오순(41세) 및 등극 30년을 경축하는 잔치 때 "만세성지곡"·"축화지곡"·"하성조지곡"이라는 "낙양춘"의 아명으로 연주됐다.

1901년(광무 5) 5월 헌종(1834~1849)의 계비 명헌태후(1831~1904)의 망팔순(71세)을 경축하는 잔치 때, 1901년 7월 고종황제의 보령 50세를 경축하는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잔치 때, 그리고 1902년(광무 6) 4월 고종황제의 보령이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한 것을 경축하는 잔치 때 "강낙지곡"·"낙만년지곡"·"낙만춘지곡"·"낙승평지곡"·"이명지곡"·"만방녕지곡"·"만사년지곡"·"만세성지곡"·"벽숭만세지곡"·"사방내하지곡"·"산하옥력장지곡"·"수제천지곡"·"천청해안지곡"·"축유여지곡"·"태평춘지곡"·"하리명지곡"·"하성조지곡"·"헌천수지곡"이라는 "낙양춘"의 아명으로 연주됐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2.459~61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173~75, 247, 276, 278, 290, 328, 369, 473, 484, 509, 558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69쪽
  • 『進宴儀軌』(1744년), 卷1.11a8, 10
  • 『整理儀軌』(1795년), 卷2.8a5
  • 『進饌儀軌』(1829년), 卷1.24a9, 37b4, 43b4
  • 『進饌儀軌』(1848년), 卷1.40b10~11, 42a4, 42b5
  • 『進饌儀軌』(1868년), 卷1. 12b12, 21a8, 22a8~9
  • 『進饌儀軌』(1892년), 卷1.61a1
  • 『進饌儀軌』(1901. 5.), 卷1.34b4, 35b7, 36a7, 36b10, 37b2~3, 37b12~38a1, 39a7, 40a9~10, 40b9, 41a12, 42a3, 4~5
  • 『進宴儀軌』(1901. 7.), 卷1.58a10~11, 69b10, 73b2~3, 74b5, 75a5, 75b8, 76b1, 11
  • 『進宴儀軌』(1902. 4.), 卷1.45b1, 60a4, 63b8~9, 64b11, 65a11, 66a2, 66b7, 67a5
  • 『의궤 속의 우리 춤과 음악을 찾아서』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08년, 78~86, 144~5, 250~616, 302~310, 338~48, 476~87, 536~46, 578~90, 636~49쪽
  • 『國樂大事典』 張師勛,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년,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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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악원보 / 낙양춘

속악원보 / 낙양춘 ≪속악원보≫에 실려 있는 낙양춘. 낙양춘은 고려 때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사악의 하나로 '기수영창지곡'이라고도 한다. ≪고려사≫ 악지 당악조에 가사가 실려 있고 조선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속악원보≫에는 가사 없이 악보만 실려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