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대금

[ 大笒 ]

요약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악기의 하나. 일명 저·젓대.
대금 본문 이미지 1

죽부(竹部) 또는 공명악기(空鳴樂器, aerophone)에 드는 대금은 가로로 잡고 부는 횡적(橫笛)의 일종이다. 현재 정악대금(正樂大笒)과 산조대금(散調大笒: 일명 시나위젓대)이 연주되고 있다. 정악대금은 향피리와 함께 합주 때 중요한 선율악기의 하나로 연주되고 있고, 또한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은 독주악기로 연주되고 있다.

『일본후기』(日本後紀) 권17에 의하면,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본국에서 적(笛) 또는 횡적이 연주됐다. 당시 일본에서 고려악사(高麗樂師)와 백제악사(百濟樂師)는 군후(군篌: 거문고)·막목(莫目: 도피피리)과 함께 횡적을 가르쳤다. 비록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지만, 통일신라의 삼죽(三竹)은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후 그들의 횡적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결과물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 사회에서 대금이 거문고와 함께 신기(神器)로 천존고(天尊庫)에 보존됐다고 한다. 대금음악에 평조(平調)·황종조(黃鍾調)·이아조(二雅調)·월조(越調)·반섭조(般涉調)·출조(出調)·준조(俊調), 이상의 일곱 조가 사용됐고, 324곡의 대금곡이 연주됐다고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전한다.

대금(大笒)·중금(中笒)·소금(小笒)과 함께 신라 사회에서 널리 연주됐던 신라 삼죽의 전통은 고려왕조에 그대로 전승됐다. 궁중 밖의 고려사회에서 대금은 중금과 함께 널리 연주됐음은 고려가요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노래 가사에 나온다. 즉 문탁(文卓)의 대금, 아양(阿陽)의 거문고, 종무(宗武)의 중금, 대어향과 옥기향의 가야금, 김선(金善)의 비파, 그리고 종지(宗智)의 해금이 그것이다.

고려시대 삼죽의 전통은 조선왕조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대금은 향악 연주뿐만 아니라 당악 연주에서도 중요한 관악기로 연주됐음은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소재 종묘의 등가(登歌)와 헌가(軒架), 전정헌가(殿庭軒架)·전정고취(殿庭鼓吹)·전부고취(前部鼓吹)·후부고취(後部鼓吹) 등의 악현(樂懸)에서 발견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아래의 표에 정리됐듯이 장악원(掌樂院)의 대금차비(大笒差備)들이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 때 출연했음이 여러 의궤(儀軌)에 나온다.

조선후기 의궤에 나오는 장악원(掌樂院)의 대금차비 일람표

조선후기 의궤에 나오는 장악원(掌樂院)의 대금차비 일람표
서기(임금) 잔치명 대금차비(大笒差備)

1795년(정조 19)

회갑연(回甲宴)

최오장(崔五章), 김상록(金尙祿), 조성대(曹聖大), 이광수(李光秀), 장복인(張福仁), 박남상(朴南象), 한호란(韓好蘭), 김쌍대(金雙大)

1827년(순조 27)

진작(進爵)

박경완(朴景完), 김원식(金元植), 김관길(金寬吉), 박성완(朴聖完), 함윤옥(咸潤玉), 안광석(安光碩), 신광업(辛光業), 김정하(金鼎夏)

1828년(순조 28)

진작

김원식, 김관길, 장재량(張在良), 고천갑(高天甲), 김경득(金景得)

1829년(순조 29)

진찬(進饌)

신광호(辛光浩), 차성돌(車聖乭), 신광희(辛光喜), 박경완(朴景完), 장재량(張在良), 김관길(金寬吉), 김원식(金元植), 김경득(金景得)

1868년(고종 5)

내진찬(內進饌)

백성복(白聖福), 김만천(金萬天), 유봉학(柳奉學), 성용갑(成龍甲), 김복록(金福祿), 임중찬(林重贊), 신석홍(辛錫弘), 오석길(吳石吉)

1873년(고종 10)

진작

정치환(鄭致煥), 한봉구(韓鳳九), 김만억(金萬億), 박인순(朴仁淳), 함순창(咸淳昌), 유성철(劉聖哲), 오인철(吳仁哲), 김덕진(金德眞)

1877년(고종 14)

진찬

정치환, 오인철, 유성철, 함순창, 박인순, 한봉구, 박화영(朴和永), 임중찬(林重贊)

1887년(고종 24)

진찬

정치환, 오인철, 오석길, 한봉구, 박인순, 박화영, 임중찬, 김덕진

1892년(고종 29)

진찬

조만천(趙萬天), 정완성(鄭完成), 신석홍(辛石弘), 박인순, 신흥석(申興石), 유봉학(柳鳳學), 유의석(劉儀石), 박화영

1901년(광무 5) 5월

진찬

박추영(朴秋永), 유봉학, 정완성, 유의석, 최학봉(崔學鳳), 황용운(黃龍雲), 마성운(馬聖云), 신흥석

1901년(광무 5) 7월

진연(進宴)

마성운, 박화영, 박상성(朴相成), 유봉학, 유의석, 윤치완(尹致完), 정완성(鄭完成), 정인환(鄭麟煥)

1902년(광무 6) 4월

진연

유의석, 황용운(黃龍雲), 박추영(朴秋永), 마성운, 신흥석, 유봉학, 한창한(韓昌漢), 이장복(李長福)

1902년 11월

진연

유의석, 황용운, 박추영, 마성운, 신흥석, 유봉학, 최학봉(崔學鳳), 한창한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시절 대금명인으로 김계선(金桂善)을 비롯해 김점준(金點俊)·고영재(高永在)·윤월룡(尹月龍) 등이 있었다.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의 대금사범으로는 아악수장 유의석(劉儀石)이 있었다. 조선말기 장악원과 대한제국(1897~1910) 시절 교방사에 전승된 대금의 전통은 일제강점기 아악부원양성소의 대금 전공 아악생들에게 전승됐다.

대금 전공 아악생 중 제4기생 김성진(金星振)은 광복 후 국립국악원에서 대금의 맥을 이어가면서 국악사양성소(國樂士養成所)의 대금사범으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 박종기(朴鍾基)·강백천(姜白川)·한주환(韓周煥) 같은 대금산조의 명인들은 광복 후 젓대시나위 곧 대금산조를 후대에 전승시켰다.

『고려사』 권71(「악지」)에서 대금에는 13공(孔)이 있다고 기록되어서 13공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했다. 지공(指孔) 6개·취공(吹孔) 1개·청공(淸孔) 1개·칠성공(七星孔) 5개를 합해서 13공이다. 칠성공은 대금의 음률을 조정하기 위해서 뚫어놓은 구멍이고, 엷은 갈대청으로 덮어서 만든 청공은 역취 때 대금의 독특한 음색을 내기 위해서 만든 구멍이다.

연주자가 취구에 김을 넣는 정도에 따라서 저취(低吹)·평취(平吹)·역취(力吹)로 구분된다. 대금은 두 옥타브와 완전5도의 넓은 음역의 소리를 내는 관악기여서 피리와 함께 합주 때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합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대금 연주자가 먼저 임종 소리를 내서 그 소리에 맞추어 다른 악기들이 조율한다. 이런 전통이 이미 고려 때부터 있었음은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온다.

진재해(秦再奚)의 월하취적도(『한국악기』)

진재해(秦再奚)의 월하취적도(『한국악기』)

대금을 연주하는 국립국악원의 악사(『한국악기』)

대금을 연주하는 국립국악원의 악사(『한국악기』)

오늘날 쌍골죽(雙骨竹)이나 황죽으로 만든 현행 정악대금의 길이는 약 80㎝ 정도이다. 그러나 산조대금은 정악대금보다 짧고 가늘다. 관현합주에서 대금은 피리(觱篥)와 함께 주선율을 담당하는 관악기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2.588~93쪽
  • 『의궤 속의 우리 춤과 음악을 찾아서』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08년, 150, 195, 345~46, 441, 709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71~77, 84~85, 151, 300쪽
  • 『民俗藝術事典』,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년, 97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87쪽
  • 『韓國樂器』 송혜진 글 강운구 사진, 서울: 열화당, 2001년, 176, 234쪽

참조어

젓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