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동 옥현 유적

무거동 옥현 유적

[ 蔚山 無去洞 玉峴 遺蹟 ]

지역 울산

유적은 울산광역시 남구 무거동 일대에 위치하는 청동기시대-조선시대의 생활유적으로, 1998-99년까지 경남대학교박물관·밀양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지역은 동-서로 길게 연결된 해발 35m 내외의 평탄한 구릉과 그 아래의 평지에 집자리와 논터(水田址) 등의 유구가 분포하고 있으며, 북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 유적은 구릉 위의 집자리와 그 아래 골짜기에 위치하는 논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구릉 위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움집자리(竪穴住居址)와 함께 조선시대 구덩이가 조사되었고, 정상부 가까이에서는 구석기시대의 돌날(石刃)석기도 다수 채집되었다. 논은 청동기시대에서부터 삼국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의 논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에서 각 시대의 1층 면씩을 선정하여 조사하였다.

유구배치도

유구배치도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대체로 경사면을 ‘L’자 모양으로 파고 축조된 움집자리로, 평면 장방형(長方形)과 방형(方形)이 주류를 이룬다. 집자리의 크기는 장방형의 경우 최대길이와 폭이 8.0-9.0×5.0m 내외이고, 방형은 5.0m 이내인 것이 대부분이다. 집자리의 내부에는 벽의 기초홈인 벽도랑(壁溝)과 배수구, 화덕자리(爐址), 기둥구멍(柱孔) 등이 있으며, 특이하게 옥내고상부(屋內高床部)가 있는 예도 확인되었다. 벽은 기초홈을 파고 판자를 수직으로 세웠으며, 벽체를 지지하기 위해 배수구 내에 작은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운 경우도 있었다. 배수구는 벽의 기초홈과 분리되어 2갈래로 되어 있거나 하나로 통해 있으며, 대부분 집자리 밖으로까지 뻗어 나와 있었다. 화덕은 방형집자리의 경우 중앙에 1개, 장방형집자리는 2개가 일반적인데, 모두 특별한 시설 없이 집자리의 바닥을 얕게 판 것이었다.

기둥구멍은 장방형집자리의 경우 3-5개의 기둥이 2-3열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방형의 경우 2주(柱) 2열이 기본이나 2주 1열 또는 기둥구멍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옥내고상부는 몇 기의 집자리에서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ㄱ’자 또는 ‘ㄷ’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고상부는 집자리의 바닥에서 10㎝ 정도의 높이이며, 폭은 80-120㎝ 정도이다. 이 외에 집자리와 관련되는 시설로서 출입구가 있다. 그 흔적이 뚜렷하지는 않으나, 벽구가 끊어져 있고 작은 기둥구멍이 집자리 안팎에 집중되어 있는 부분이 출입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이 유적에서 확인되는 출입구는 대부분 경사가 낮은 배수구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집자리 내에서는 구멍무늬(孔列文)나 단사선(短斜線)이 시문된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비롯하여 간돌검(磨製石劍), 돌화살촉(石鏃), 배모양 조개날도끼, 돌끌(石鑿), 반달돌칼(半月形石刀), 그물추(漁網錘), 가락바퀴(紡錘車)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편, 구릉 위에서는 산발적으로 분포하는 조선시대 구덩이 20여 기가 조사되었다. 평면 형태는 원형에 가까운 부정형이고, 바닥과 벽도 불규칙적인 구덩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경사가 높은 쪽의 벽에 붙어서 2개의 돌을 세워 만든 아궁이가 있고, 불규칙하지만 기둥구멍도 다수 확인되었다. 경사가 높은 구덩이의 외곽에는 물막이용으로 이용된 반원형의 도랑이 돌려져 있다. 내부에서는 분청사기편(粉靑沙器片)과 옹기(甕器)편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형태나 구조,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주거용 구덩이로 판단된다.

47호 주거지

47호 주거지

삼국시대 수전 전경

삼국시대 수전 전경

청동기 시대 수전 세부

청동기 시대 수전 세부

구릉과 구릉 사이의 연결부분에서 시작되어 골짜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길게 패여 있는 단면 ‘U-V’자형의 둥근도랑(環溝)이 있다. 이 도랑의 시작부분은 둥글고 얕으나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 깊어지고, 폭도 넓어지고 있다. 도랑의 아래쪽 끝은 청동기시대 수로와 ‘T’자형으로 맞닿아 있어, 양자가 동시기에 공존한 것으로 판단된다.

도랑의 내부는 거의 대칭을 이루며 퇴적되어 있고, 내부퇴적토 또는 바닥면에서 구멍무늬나 단사선이 시문된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소형토기, 각종석기, 목탄 등이 출토되었다. 이 도랑의 성격은 분명하지 않으나, 골짜기의 낮은 곳을 따라 ‘一’자로 길게 패여져 있어 일반적인 환호와는 다른 것으로 판단되며, 청동기시대의 논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논터(水田) 조사는 1,500여 평의 제한된 면적만을 조사하였다. 현대의 논면에서 깊이 2.8m까지를 파서 모두 42개의 토층을 확인하였다. 판단결과 42개의 기본 토층 가운데 청동기시대의 논층인 33-31층은 유기질이 풍부한 퇴적층으로, 지형적 기복이 어느 정도 평탄화되어 논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삼국시대 논이 시작되는 27층 단계에 오면 지표면이 평탄화되고 비옥도가 높은 유기질이 많이 퇴적되며, 용배수 겸용의 수리관개시설이 정비됨으로써, 이 무렵부터는 골짜기 전면에 논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25-22층에 걸쳐 안정적으로 논의 조성이 계속되었다. 조선시대의 논인 20-17층은 지속적인 토지환경의 안정화에 따라 골짜기 전면에 논이 조성되었다. 인위적인 흙의 투입으로 인해 토색이 전시대층에 비해 전반적으로 밝고, 점성이 떨어지는 반면 석립(石粒)의 혼입이 많다.

청동기시대의 논과 관련된 유구로는 논면, 수로, 도랑유구 등이 있다. 논둑의 존재나 이질토의 인위적인 혼입과 교란, 산화철과 망간의 분리집적, Plant-opal의 다량검출 등이 그 근거였다. 논은 경사를 따라 약간의 단을 이루면서 소구획되어 있었는데, 평면형태는 방형, 장방형, 부정형 등이다. 지형의 경사가 상대적으로 급한 구릉사면의 말단부 가까이에서는 평면이 부정형이며 단위면적도 소형인 경향을 띤다. 이에 비해 지형경사가 완만한 골짜기 중앙부쪽 논은 방형, 장방형으로 정형화되며, 단위면적도 보다 대형화되고 있다.

논의 단위면적은 1-3평 전후의 소구획 논이다. 논둑은 폭 16-52㎝ 높이 1.4-6㎝ 내외이며, 논둑의 단면은 대형(帶形) 또는 반원형을 띤다. 논바닥에서는 조상흔(條狀痕)이나 발자국, 경작도구흔적, 기둥구멍, 주적(株跡) 등이 확인되었고, 논둑을 끊어 만든 수구(水口)도 확인되었다. 수로는 구릉과 골짜기의 경계부분에 설치되어 있는데, 확인된 규모는 길이, 최대폭, 깊이가 45.0×2.6×0.85m 전후이다. 논바닥에서는 구멍무늬나 단사선이 시문된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붉은간토기(紅陶)편, 그물추, 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의 논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낮아지는 골짜기의 경사를 따라 계단상으로 조성된 것으로, 평면형태는 호상(弧狀)의 세장방형(細長方形)이다. 조선시대 논에 비해 폭이 매우 좁고, 단위면적은 32-44평 정도이다. 논바닥에서는 쟁기흔, 반달모양의 경작구흔, 주적(株跡), 사람과 소의 발자국 등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의 논은 아래층에서의 산화철·망간의 분리집적, 환원층까지의 깊이 등으로 보아 반건(半乾) 또는 반습논(半濕畓)으로 판단된다. 수로는 앞 시기의 것을 개수하여 사용했다. 논바닥에서는 화살촉 등의 철기굽다리접시(高杯), 항아리, 완(盌), 기와(瓦)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들로 보아 통일기에 가까운 6세기 후반-8세기 무렵의 논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논은 골짜기 전면에 형성되어 있으며, 계단상으로 단을 이루고 있다. 평면형태는 호상(弧狀)의 세장방형이나 삼국시대의 논에 비해서는 그 폭이 넓다. 단위면적은 49.7-106.7평으로 균일하지 않다. 논바닥 곳곳에서는 발자국과 함께 쟁기나 삽 등의 경작도구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 논 역시 반건·반습전으로 추정된다. 수로는 논의 북쪽 구릉과 골짜기의 경계부분에 조성되어 있는데, 사면에서 흘러 내려오는 빗물을 차단하는 동시에 논에 필요한 용수의 공급이나 배수와 관련된 시설이었던 것 같다.

이 논과 관련된 유구로는 구릉 위의 움집자리와 구릉 남서쪽의 밭, 구릉 말단부에 위치하는 2개의 석조우물과 배수로 등이 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의 토기와 분청사기, 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어 모두 동일한 시기인 것으로 판단된다. 논의 사용시기는 16-17세기 무렵으로 판단된다. 이 외에 논바닥에서는 각종의 목질이나 목탄을 비롯하여 동물 뼈, 조개(논 고동), 복숭아씨, 볍씨 등이 검출되었다.

전체적으로 논은 청동기시대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논면-논둑-수로’의 관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거의 동일한 양상으로 진행되어 왔다. 다만, 후대로 오면서 논의 조성범위와 수로가 점진적으로 구릉 쪽으로 확장·이동하는 경향을 보이며, 시간적인 변화에 따라 골짜기를 이용하는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논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방형계 소구획 논에서 삼국시대 이후 세장방형의 계단상으로 바뀌는 큰 변화가 나타나며, 논의 단위면적 역시 시간의 추이에 따라 점차 확대되어 왔다.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으로, 생활공간인 마을과 생산공간인 논이 동시에 조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60여 기의 집자리 전체가 동일 시기는 아니지만, 독립된 구릉 위에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집자리의 양상은 청동기시대 당시의 마을을 복원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평면형태는 물론 벽도랑이나 배수구, 기둥구멍, 화덕자리, 옥내고상부 등 집자리 부대시설이 완전하게 잘 남아있고, 판재를 이용한 수직벽 등은 그 예가 드문 것으로 건축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청동기시대-조선시대의 논 조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논이 확인됨으로써 논농사의 시작이 적어도 청동기시대 전기까지 소급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벼농사의 증거는 집자리에서 출토된 탄화미나 토기 저부에 찍힌 볍씨자국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유적에서 완전한 구조를 갖춘 논이 확인됨으로써 논농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릉상의 주거-골짜기의 논’이라는 농촌의 토지이용 형태가 적어도 청동기시대 전기까지 소급됨을 확인함은 물론, 논의 조성이나 관개시설 등을 통해 당시의 사회나 기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동일한 범위 내에서 층위를 달리하면서 청동기시대→삼국시대→조선시대의 논이 조사됨으로써, 시대별 논의 형태와 토지이용방법, 관개체계 등을 상호 비교할 수 있어 농업사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본에서 조사되고 있었던 논과 동일한 소구획 논이 확인됨으로써 일본의 초기 수전경작의 기원이 한반도 남부지방이었음을 밝히는 동시에, 일본 소구획 수전의 동남아시아 기원설이나 수전도작의 양자강유역 직접도래설을 부정할 수 있는 적극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현장설명회 자료(경남대학교박물관·밀양대학교박물관, 1999년)
  •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이상길·이현석·곽종철, 제42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요지,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