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농민항쟁

서북농민항쟁

[ 西北農民抗爭 ]

시대명 조선
연도 1811년

1811년 등의 주도 아래 평안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 흔히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생겨난 광범한 유민층(流民層)과 평안도 지방에서 널리 행해지던 광업에 종사하던 광산노동자를 기반으로 특권 상인층과 대립관계에 있던 사상(私商), 농업경영을 통해 성장한 부농(), 정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몰락 양반층의 지지 아래 일어난 대규모의 반정부 민중항쟁이었다. 여기에는 평안도 지방에 대한 정부의 차별정책 또한 봉기의 커다란 명분이 되었으며 가뭄으로 인한 대규모 흉년도 봉기의 규모를 확대시킨 요인이었다.

홍경래 등은 가산군 다복동에 기지를 정하고 광산노동자 등으로 부대를 조직해 훈련시키는 한편 정부의 평안도 차별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자 출신으로 지략이 뛰어났던 (禹君則), 곽산출신으로 인 김창시(金昌始)와 가산역의 관리였던 상인 이희저(李禧著) 등으로 하여금 지휘부를 구성하고 토호··상인 등을 끌어들여 중요 지방과 도시들에 지방조직을 결성했다.

1811년 10월 다복동에 모인 봉기군은 홍경래를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 김사용(金士用)을 부원수로 하는 남북 양군으로 편성되었다. 홍경래를 중심으로 한 주력부대는 12월 18일 가산 고을을 기습해 를 죽이고 고을을 점령하고, 이어 20일 박천을 함락시키고 청천강 연안에 진출했다. 부원수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 부대는 곽산과 정주를 차례로 점령했다. 봉기군은 사방에 격문을 돌려 호응을 호소하는 한편 점령지 관아의 창고를 헤쳐 백성들에게 돈과 곡식을 나누어줌으로써 많은 농민들이 반군에 가담했다. 순식간에 반군은 가산·박천·곽산·정주·선천·용천·철산·태천 등 청천강 이북의 전 지역을 점령했다. 초기 홍경래가 이끄는 반군이 손쉽게 평안도 각 지역을 점령한 것은 농민들이 봉기군에 지지를 보냈으며, 점령지 내부에서도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경래가 21일 박천에서 부상을 당함으로써 남진군은 가산으로 후퇴했으며 북진군도 이에 맞춰 정주에서 며칠을 머물게 됨으로써 속전속결을 목표로 했던 봉기군의 전략은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고, 봉기군에 내응을 약속했던 사람들은 차례로 관군에 색출되어 처형당했다. 봉기군은 안주·평양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12월 29일 안주의 맞은편 송림동에 진출해 관군과 싸웠으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에게 패하고 정주성으로 퇴각했다. 이후 수세에 몰린 반군은 정주성에서 4개월간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반군을 색출한다는 명목 아래 행해진 관군의 무자비한 살육으로 인근 고을의 주민들도 봉기군에게 협력하거나 정주성에 들어가 저항을 계속함으로써 전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봉기군은 관군과 끈질긴 전투를 계속했으며 때로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도 했으나 결국 극도의 식량난과 병력의 열세로 1812년 4월 19일 성이 함락되고 홍경래를 비롯해 성안에 있던 대부분의 남자들은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다. 서북농민항쟁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반군의 군사력 열세, 속전속결의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으며, 분산공격을 취하지 않고 정주성에 운거해 관군을 맞아 싸운 전술의 실패 등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부패하고 무능한 당시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으며 농민들의 저항의식도 높아져 이후 민란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시적으로나마 서북지방의 와 잡세가 철폐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