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스피커가 돌돌 말리네~ 희한하네~

어! 스피커가 돌돌 말리네~ 희한하네~

주제 재료(금속/소재)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0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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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을 받으시오!” 도포 자락 휘날리며 말 달려온 관리가 외친다. 사랑채에서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던 사내가 급히 의관을 갖추고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무릎 꿇으면 관리는 두루마리를 좌악 펴서 왕의 교지를 근엄하게 읽어 내려간다. 이러한 두루마리 교서는 이제 TV 사극에서나 볼 수 있다. 편지나 문서는 그 모양이 바뀐 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이다.

절로 권위를 불러일으키던 두루마리 형태의 교서가 이제는 화장실 휴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니 그 처지가 한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두루마리 하나씩 갖고 다닐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두루마리처럼 휘어지는 특수 플라스틱으로 만든 스피커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대한민국 기업인 고석근 박사. 그가 압전(壓電) 플라스틱 필름을 이용한 얇은 ‘필름스피커’ 기술을 개발한 때는 2001년으로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재직 중이었다. 이 기술의 장래성을 인정한 KIST는 고석근 박사가 세운 벤처기업의 최대 주주로 참여하였다.

지금까지 스피커의 가장 큰 문제는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그 모양도 네모 상자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어서 실내공간에 맞춘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스피커의 구조 때문인데, 스피커는 자석과 소리, 울림판, 그리고 울림통으로 구성되므로 당연히 현재 구조의 부피나 공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석근 박사가 개발한 두루마리 모양의 필름스피커는 어떤 원리를 이용할까? 필름스피커는 말 그대로 얇은 필름만으로 되어 있는데, 필름의 표면에 전기 신호가 들어 오면 이것이 압력으로 바뀌어 스피커로 작동되는 것이다. 문제는 두께 40마이크로미터의 필름에 어떻게 전기 신호를 입력하느냐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필름의 표면을 전기가 통할 수 있는, 물과 잘 결합하는 친수성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핵심인 셈이다.

고 박사가 사용한 필름은 비닐의 한 종류인 PVDF(Poly Vinyldienfluoride, 이소불화비닐). 다른 나라 기업들도 이 PDVF를 이용하여 필름스피커를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왜냐하면 코팅이나 접착만으로 전극을 연결하였을 경우, 오래 사용하면 전극이 떨어져 나가거나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름스피커 상용화를 위해서는 PVDF를 날카로운 금속으로 박박 긁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극을 확실하게 붙이는 기술을 개발해야만 했다.

고 박사가 마침내 찾아 낸 공법은 ‘플라스마’를 이용하는 것. 플라스마는 고체, 액체, 기체가 아닌 제4의 상태다. 제4의 상태란, 원자들이 양이온과 전자들의 집단으로 바뀐 상태를 말하는데, 기체의 온도가 섭씨 2천도쯤 되면 가스 분자가 쪼개져 원자가 되고 약 3천도가 되면 원자들은 전자를 잃고 양이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스마는 저온에서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우주의 99%가 플라스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광등 내부도 불꽃을 튀며 전기를 띠는 플라스마 상태인 것이다.

진공관 속에 필름을 놓고 이온 빔을 쏘면 전극이 필름의 양쪽 면에 심어지듯이 달라붙는데, 고 박사는 플라스마를 이용해서 전극이 필름에 한 몸처럼 완전히 달라붙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두루마리 형태의 필름스피커는 옷감의 원단 모양으로 생산된다. 이 원단을 원하는 모양과 크기로 잘라서 앰프와 연결만 하면, 스피커가 되는 것이다. 두루마리식 필름스피커의 특징은 ‘가볍고 얇고 투명하다’는 것. 이 성질을 이용하면 응용분야는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가벼워서 풍선에 매달아 날리거나 현수막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투명해서 자동차 유리에 붙이거나 액자 유리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얇고 유연하므로 소리 나는 색종이나 멜로디 카드로 만들 수 있고 이것으로 나레이터 모델의 옷을 만들면 무거운 스피커와 함께 이동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두루마리 스피커는 사람의 말소리를 포함한 고음을 소화할 수 있지만, 북소리 같은 저음은 잘 소화하지 못한다. 따라서 홈시어터의 5.1 채널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스피커 가운데 저음 스피커 두 개는 두루마리 필름스피커로 대신할 수 없다고 한다.

올 여름쯤이면 우리는 A4 사이즈의 필름스피커를 직접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재기발랄한 청년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다양한 연출을 하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두루마리 시대가 다시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요즘 유행하는 SF 퓨전 사극에서 임금님의 목소리가 내장된 두루마리 교지로 어명을 내리는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 이정모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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