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번도 최면에 걸려본 적이 없다?

난 한번도 최면에 걸려본 적이 없다?

주제 생명과학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04-12-01
원본보기
난 한번도 최면에 걸려본 적이 없다? 본문 이미지 1

우리는 대중매체 등을 통해 최면술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미궁에 빠진 범죄사건의 해결을 위해 목격자를 대상으로 최면을 이용한 수사를 하는가 하면, TV에서는 최면술을 통해 전생의 기억을 알아낸다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기도 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면술 자체는 분명히 과학적인 현상이며 합리적인 설명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를 통해 전생의 기억을 이끌어낸다거나 기타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 현상들과 결부되는 내용들은 아직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다.

이를 알기 쉽게 이해하자면 ‘UFO현상’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UFO는 글자 그대로 ‘미확인 비행물체’라는 뜻으로서, 정체가 무엇인지 식별이 되지 않은 비행물체의 통칭이다. 따라서 UFO는 분명히 존재하며, 다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UFO는 비행기나 인공위성, 특이한 형태의 구름, 새떼(레이더에 UFO로 나타나는 경우) 등으로 판명이 된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인지 아닌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마찬가지로 최면술 역시 그러한 현상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나 환생이나 그 밖에 다른 초자연적 체험의 증거로 최면술을 얘기하는 것은 엄격하게 구별해야 할 일이다.

‘난 이제껏 한번도 최면에 걸려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누구나 다 최면 상태를 겪으며 살고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어떤 일에 완전히 몰두하는 경험을 한다. 공부를 할 때나 사랑에 빠졌을 때, 또는 게임을 할 때 등등. 이럴 경우 우리의 감각과 의식은 주변 환경의 모든 요소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대상 한 가지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바로 이런 상태가 의학적으로는 최면 상태인 것이다. 이런 ‘무아지경’ 상태 후에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두뇌가 감각기관 들로부터 오는 외부 자극 신호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정보 처리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런 자연 발생적인 경우가 아니라 최면 상태를 의식적으로 유도해내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최면술’이다. 최면술은 다른 사람에게서 유도를 받는 방법이 일반적이지만 훈련을 거치면 자기최면도 가능하다.

최면상태의 특징이라면 몸과 마음이 모두 느슨하게 이완되는 편안함을 들 수 있다. 평소에 근심 걱정이 많아도 어느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잠시나마 잊게 되듯이, 최면 상태에서는 심신의 긴장이 풀어져서 편안한 기분에 젖어 들게 된다. 이는 신체의 생리적인 변화로도 나타나 혈압이나 심박, 호흡 등의 수치가 내려가며 체온은 약간 올라간다. 그렇지만 뇌파를 측정해보면 수면상태와는 전혀 다르다. 즉, 최면에 걸리는 것은 잠드는 것도 아니고 의식을 잃는 것도 아니다.

최면상태의 또 다른 특징으로 환시나 환청도 있다. 이런 감각들은 꿈과 비슷하지만 매우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범죄 수사에서 목격자들이 분명치 않은 오래된 기억을 정확히 되살리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일종의 마취 효과도 최면상태의 특성 중 하나이다. 운동경기에 몰두하다 보면 심하게 다쳐도 그 당시엔 큰 통증을 못 느끼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최면을 통해 통증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의학에서 쓰는 최면치료의 주요 기법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특정한 지시사항을 각인 시키는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최면에 걸린 사람에 ‘최면에서 깬 다음 방의 창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이런 지시를 한 일 자체는 잊으세요’ 라고 하면, 피험자는 순순히 그대로 실행한다. 왜 창문을 여냐고 물어보면 머뭇거리다가 방안이 좀 더운 것 같다는 등의 핑계를 댄다.

이것은 잠재의식(Subliminal)과 암시(Suggestion)의 효과로서, 우리가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들에 지시사항을 추가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전이나 타이핑 등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능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훈련하여 습득한 것이지만, 일단 몸에 배면 무의식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차를 가지고 늘 다니는 통근 길로 출근하다가 무언가 다른 생각에 골똘히 잠기다 보면, 운전 중에 어디서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하고 또 어떤 교차로를 지나왔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직장에 도착해 있는 것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이처럼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행동들은 바로 잠재의식의 영역에 각인된 것이다.

최면 상태에서 나중에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각인 시키는 것을 암시라 하는데, 사실 이런 암시효과는 최면 상태가 아니더라도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험이나 운동경기에 임하면서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자기암시를 주는 마인드 컨트롤도 바로 암시효과이다.

최면에서의 암시는 시술자와 피험자 간의 심리적 신뢰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일단 최면술에 걸린 사람은 스스로 최면 상태에 들려는 적극적 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최면 시술자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따르려는 성향을 나타낸다. (바꿔 말하자면,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타인이 최면상태를 유도해 낼 수는 없다.) 게다가 최면 상태에서는 잠재의식의 자극 수용이 매우 활성화되어 암시 효과도 더 잘 나타난다고 한다.

최면술과 잠재의식의 세계는 아직 그 세부적인 실체들이 낱낱이 밝혀지지 않은 미완의 영역이다. 따라서 21세기에 정신과학의 지평이 새롭게 열린다면 바로 이 분야에서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 박상준 - 과학칼럼니스트

연관목차

697/1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