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속의 지우개’ 쓱삭 쓱삭

‘머리 속의 지우개’ 쓱삭 쓱삭

주제 생명과학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05-05-25
원본보기

수진 : “나한테 잘해줄 필요 없어 나 다 까먹을꺼야.”
철수 : “걱정마! 내가 대신 다 기억해줄께.”

‘머리 속의 지우개’ 쓱삭 쓱삭 본문 이미지 1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 나오는 명대사다.

정우성과 손예진이 주연한 이 영화에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수진’역의 손예진이 사랑의 추억 조차 지워지는 안타까움을 표현하자, ‘철수’역의 정우성이 망각 까지도 사랑으로 포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이 애절한 대사에 많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뇌의 사망신고서’로 불리우는 알츠하이머병. 이 병은 미국의 레이건 전대통령이 사망 전까지 앓았던 질병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치매’라고도 부르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의미는 좀 다르다. 치매란 정상이던 두뇌 기능이 어떤 이유로 인해 현저하게 저하되는 증상을 모두 아울러 이르는 말로서, 지능이나 기억, 학습능력, 의지 등 전반적인 정신 기능이 감퇴되어 아주 심할 경우엔 거의 동물적인 수준으로까지 악화되기도 한다.

알츠하이머병은 ‘노인성 치매’의 주요 원인 중 가장 흔한 형태이지만 노인 뿐만 아니라 젊은 연령층에서도 발병한다. 실제로 치매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수는 암 환자 보다도 많으며, 사람이 일생동안 치매에 걸릴 확률은 약 15% 안팎이나 된다고 한다. 노인성 치매의 경우도 85세 이상 인구에서는 절반 가량이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치매의 주요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치매는 뇌세포가 자꾸 죽어가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런데 뇌세포가 왜 죽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전세계 연구자들의 90% 정도는 ‘베타(β)-아밀로이드 단백질’이라는 독성 물질에 주목하고 있는데, 바로 이 물질이 뇌에 쌓여서 뇌세포를 파괴한다고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한 과학자가 내놓은 조금 다른 견해도 현재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대 의대에서 ‘치매정복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서유헌 교수에 따르면,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 뿐만 아니라 ‘C단 단백질’이라는 물질의 위험성도 크다는 것이다. 이 C단 단백질은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 보다 독성이 10배나 더 강하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을 투여한 쥐는 열흘 만에 치매증세를 나타내지만, 같은 양의 C단 단백질을 투여한 쥐는 하루 만에 치매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C단 단백질의 독성이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 보다 10배 이상 높아 치매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1996년에 세계 최초로 발표한 바 있으며, 2003년에는 C단 단백질이 신경 세포의 핵에 침투하는 과정과 세포핵 속으로 들어간 이 단백질이 독성 유전자를 활성화하는 과정도 처음으로 밝혀냈다.

치매정복연구단에서는 현재 C단 단백질이 신경세포의 핵 속으로 침투하는 과정을 통제할 수 있는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알파(α)-시누클레인’이라는 단백질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이 단백질은 뇌세포를 보호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2002년 치매정복연구단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는데, 원래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뇌세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아 이 단백질이 늘어나면 오히려 뇌세포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파킨슨병의 원인 물질로 주목 받고 있는 이 알파-시누클레인 단백질은 알츠하이머성 치매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치매는 과연 정복할 수 있을까?

서유헌 교수는 현재와 같은 속도로 연구가 계속되면, 적어도 10년 안에는 획기적인 치료제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미 치매 연구나 치료제의 개발 과정에서 희망적인 결과들이 상당히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전세계 과학계를 또 한번 놀라게 한 황우석 교수의 연구성과를 잘 활용한다면, 장기적으로는 글자 그대로 치매를 ‘정복’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줄기세포를 뇌신경세포로 키워서 죽은 뇌조직과 대체하면, 뇌기능의 정상적인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분야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많아서 단기간에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든 편이다.

과학적 성과나 의학 발전은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어쩌면 예상 보다 빨리 치매 정복의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이다. 예방이 최고의 의사가 아니겠는가?

얼마 전, 의사들이 노인들에게 치매 예방을 위해 적당히 손도 움직이고 머리도 써야 하는 놀이로서 ‘고스톱’을 권했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다. 어디 고스톱 뿐일까 싶다. 나이가 들수록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적절하게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나 취미생활 등을 병행한다면, 아름다운 추억을 회고하면서 건강하게 늙을 수 있지 않을까?

  • 박상준 - 과학칼럼니스트

연관목차

722/1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