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은 SF일까, 판타지일까?

<킹콩>은 SF일까, 판타지일까?

주제 기타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0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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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극장가에서 흥행하고 있는 작품들 중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킹콩>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만들면서 기술적인 면은 물론이고 극적 구성이나 스릴 넘치는 연출 등에서 세련미를 탄탄하게 다진 피터 잭슨 감독의 솜씨가 십분 발휘된 수작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킹콩>은 사실 1933년에 처음 만들어진 오리지널 <킹콩>을 거의 고스란히 리메이크한 것이다. 시대배경도 그 당시 그대로이고, 해골 섬에서 공룡들과 대결을 벌이는 장면도 원작과 같다. 특히 킹콩이 마침내 공룡을 쓰러뜨린 뒤 공룡의 턱을 흔들어보는 장면은 1933년판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1933년판 <킹콩>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특수효과 기술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물론이고 작품성 측면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외국의 한 유력한 SF영화 평론가는 각계의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역대 최고의 SF영화들을 꼽아달라고 한 뒤 책으로 엮어내면서 1933년판 <킹콩>을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랬을까?

<킹콩>은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해골 섬’이라는 곳에 킹콩을 비롯한 온갖 괴수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이번 2005년판 <킹콩>에는 티라노사우르스와 비슷한, 사나운 육식 공룡들은 물론이고 평화로운 초식 공룡들도 여러 종류가 나오며, 심지어 사람보다도 더 큰 거대한 곤충들도 등장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이러한 공룡이나 거대 곤충들은 몇 억 년 전에 살았던 원시 생물들이다. 이런 동물들의 존재는 화석으로만 미루어 짐작할 뿐, 실제로 살아있는 것은 볼 수가 없다. 지금의 잠자리나 바퀴벌레 같은 것은 3억 년 전의 모습 그대로라고 하지만, 적어도 그 크기만큼은 원시시대처럼 1미터 가까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국 <킹콩>은 현대 세계에 난데없이 원시 지구의 일부분이 뚝 떨어진 듯한 설정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오늘날에는 거대한 공룡이나 거대 곤충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키가 20미터 가까이 되는 고릴라는 예나 지금이나 지구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 SF평론가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킹콩>을 판타지로 간주하여 SF의 리스트에서 빼 버린 것이다. 즉 <킹콩>은 SF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과학적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SF와 판타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사실 뚜렷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마법이나 마술, 영혼, 유령 등등의 아직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내용들이 이야기의 주요 설정으로 작용한다면 통념상 판타지로 보는 편이다. 그리고 <킹콩>처럼 마법이나 귀신이 나오지는 않더라도 명백하게 과학적 사실에 위배되는 설정도 SF보다는 판타지로 보는 게 정확하다. (만약 <킹콩>의 배경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차원의 지구라면 SF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어도 과학 이론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어떤 원리나 상황을 다루었다면 SF로 간주될 여지가 높다.

그렇다면 <킹콩>에 등장하는 거대한 고릴라가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고릴라는 종류나 성별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키는 1.8미터에 체중은 160킬로그램 정도이다. 그런데 <킹콩>의 주인공은 키가 18미터라고 묘사된다. 육상동물 중에서 가장 키가 큰 포유류인 기린도 6미터를 넘지 않는다. 그보다 키가 크면 무엇보다도 심장이 혈액을 머리까지 올리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저혈압이 되기 십상일 것이다.

킹콩은 기린보다는 머리와 심장이 가까울 수도 있지만 대신에 발끝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역시 곤란하다. 아래쪽으로 내려갔던 피가 다시 심장으로 올라오려면 혈압이 무척 높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정도 덩치를 가지고 영화에서처럼 공룡과 싸우거나 펄쩍펄쩍 뛰어 다니는 급격하고 흥분되는 행동을 계속하려면 킹콩의 심장은 격심하게 펌프질을 하다가 파열해 버리거나 마비가 될 지도 모른다.

사실 혈압을 논하기 전에 킹콩의 덩치를 가진 포유류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킹콩이 정상적인 고릴라보다 열 배쯤 키가 크다고 해서 체중도 열 배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높이 외에 가로와 세로라는 3차원 입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키가 열 배 크다면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도 열 배가 늘어나야 킹콩처럼 균형 잡힌 외모를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킹콩의 체중은 160킬로그램의 1,000배(10의 세제곱)인 160톤이 되어버린다. 이 정도의 체중으로는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가만히 서 있지도 못한다. 고릴라와 같은 포유류의 뼈는 이 정도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몸체를 지탱하는 다리가 지면과 닿는 면은 3차원 입체가 아닌 2차원이며, 이것은 뼈도 마찬가지이다.

즉 정상적인 고릴라와 같은 재질의 뼈라고 해도 킹콩 같은 덩치에서는 단위 면적당 10배의 압력을 더 받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세포의 대사율이라던가 기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육상생물은 코끼리보다 무거워지기는 곤란하다. 물론 물속에서는 그보다 훨씬 큰 포유류인 고래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래도 육지로 올라오면 자기 체중에 눌려 질식사하고 만다.

킹콩이 살고 있던 해골 섬 자체도 과학적으로 흥미로운 대상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대륙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섬 지역의 생물들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의 독특한 종으로 진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호주 - 호주는 너무나 커서 섬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으로 취급되지만 - 의 캥거루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대륙과 같은 종의 생물이라도 개체의 크기가 많이 차이나는 아종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해골 섬의 거대 동물들도 이와 같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해골 섬의 동물들은 절대적 기준으로 너무나 큰 몸집이라 위에서 킹콩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처럼 운동역학상 비합리적인 것이다.

결국 <킹콩>은 엄밀한 과학적 관점에서 따져보면 SF가 아닌 판타지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킹콩>과 같은 작품의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제한 없는 상상력이야말로 과학적 창의성을 키우는데 가장 중요한 자극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 박상준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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