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을 띄워라~ 포석정

술잔을 띄워라~ 포석정

주제 건설/교통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0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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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은 신라의 지배계급이 맑은 계곡의 물을 끌어와 곡수(曲水)를 만들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일상일영(술 한 잔을 마시고 시 한 수를 읊는 놀이)하면서 정치와 국사에 지친 마음을 달래던 휴식의 장소였다.

이런 시회(詩會)는 중국에서 먼저 발달하여 신라에 전래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계(修禊)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은나라와 주나라 이래로 한대(漢代)에 이르기까지 3월 3일 상사일(上巳日)인 봄날에 관리들이 백성들과 함께 동쪽으로 흐르는 물가에 나가 묵은 때를 씻어 재앙을 예방하고 축복을 기원하는 무속적 행사였다.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말은 수계의 풍습이 변하여 물가에서 목욕재계 한 후에 깨끗한 마음으로 시를 짓는 후대의 도락적인 행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동진(東晋) 때의 명필 왕희지가 쓴 유명한 난정서(蘭亭序)에 나오는 용어이다. 부연하자면 곡수는 자연에서 물을 끌어들여 인공적으로 에돌아 흐르게 만든 것이고 이런 장소에서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행사가 유상곡수인 것이다.

곡수에 둘러 앉아 지필묵(紙筆墨)을 앞에 둔 시객(詩客)들은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인 다음 붓을 들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시(詩)를 적어 내려간다. 시를 짓지 못한 시객들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술잔을 집어 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시고 얼굴이 붉어진다.

옛날에는 글씨를 잘 쓰는 일과 시를 잘 짓는 일이 정치와 외교를 위한 필수적 덕목이었고, 유능한 서법가, 시인 그리고 문장가들은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왕희지는 동진 목제(穆帝) 때인 영화(永和) 9년 (서기 353년)에 사회의 저명인사와 그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42인의 노소 시객들을 모아 난정에서 시회를 베풀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시를 모아 시집을 엮고 거기에 서문을 붙였다.

현대의 학자들은 학술회의에서 논문들을 발표하고 이를 모은 논문집인 프로시딩을 내는 일이 흔한데, 놀랍게도 난정서는 이러한 현장에서 이루어진 학문이나 문학을 수집하고 기록한 최초의 프로시딩이 아닐까? 그 후 왕희지 시절의 곡수는 멸실되었고, 현재 중국 절강성 소흥시 서남쪽 교외에 있는 난정의 곡수는 명나라 가정 27년 (1548년)에 태수 심계가 중건한 것이다.

곡수는 일본에도 전해졌는데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485년 3월 상사일에 곡수연(曲水宴)이 개최되었다고 적혀있다. 이후 곡수연은 나라시대와 헤이안 시대의 황실에서 유행했다. 현재 일본에는 신사(神社)나 정원 그리고 궁 같은 곳에 노천 개방형의 곡수 유적이 여러 개 있는데 이들은 비교적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근년에 나라(奈良) 헤이죠쿄(平城京)의 궁적지(宮跡址)에서 상당한 규모의 노천형 곡수 유적이 발굴되어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는데 이곳은 710년에 겐메이 천황이 후지와라쿄로부터 천도한 후에 75년 동안 유지되었던 궁인지라 곡수의 제작과 사용에 관한 연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중국 난정의 곡수와 일본의 곡수들은 너비가 약 50cm 이상으로 비교적 넓고 정원 장식을 위해 꽃과 바위들을 물가에 많이 배치한 노천 개방형 곡수이다. 또한 이들은 S자형으로 두 번 혹은 그 이상의 만곡을 가지는 비교적 큰 규모의 곡수로서, 이런 개방형 곡수 유적을 찾아가서 술잔을 직접 띄워보면 물길을 따라 에돌아 흘러가는 술잔이 곡수의 중앙 흐름에서 벗어나 꽃이나 바위 그늘 밑의 와류 속으로 소리없이 숨어드는 일이 예사롭다.

중국의 난정과 일본의 노천형 곡수 유적 여러 곳에서는 최근에 경쟁적으로 과거의 유상곡수를 재현하여 전통시회를 거행하는 행사를 봄가을에 개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막대기를 든 아이들이 여러 명 배치되어 바위 밑으로 들어가 동작을 멈춘 술잔이 있으면 이들을 물길의 중앙으로 끌어내는 모습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포석정은 현존하는 곡수 유적으로서는 동양 삼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포석정 곡수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수로의 폭이 약 30cm 정도 되고, 수로의 벽을 가공하여 매끈하게 하였고 국소적으로 몇 번의 굴곡을 주어 형태를 심심치 않게 함으로서 미학적인 완숙도를 높였다. 전반적으로 물길의 모양이 전복 껍질을 닮은 loop 형태로 처리되어 노천형과는 달리 술잔이 물가에 설치한 바위틈으로 숨어드는 일이 없다.

필자가 이전의 논문연구에서 포석정 유동을 컴퓨터를 사용하여 전산해석적인 방법으로 수치모사를 시행해 본 결과, 술잔이 비교적 미약한 주변의 와류에 붙들려 몇 군데서 가볍게 머뭇거리는 일이 있지만 비교적 충실하게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포석정의 수로는 개방 노천형 수로에 비하여 술잔을 지속적으로 흘려보내는 목적에 충실하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 후대에 건설된 다수의 유상곡수 유적들은 비교적 최근인 명이나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균 약 10cm 정도 너비의 수로가 양의 창자처럼 몇 번이나 굽이굽이 에도는 몇 겹의 loop 형태로서 두꺼운 원석 위에 얕게 천착(穿鑿)되어 있다. 이렇게 화려한 모양의 청나라 곡수들은 규모에서 노천형 보다 훨씬 작아 여기에 띄우는 술잔이나 그 받침 접시들도 소형이었다. 이러한 loop 모양의 곡수들은 형태적으로 정자 아래에 놓여 질 수 있어서, 노천 개방형 곡수보다는 더위와 풍우를 피하여 더 적은 참가 인원으로, 원하는 때에 더 자주 유상곡수의 도락을 즐길 수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포석정의 곡수 형태는 술잔이 수로 중앙의 주류(主流)를 벗어나 주변의 와류에 붙들려 정지함으로써 유상곡수의 흥취를 저해하는 일이 없도록 벽면을 매끄럽게 가공 처리한 것이다. 포석정의 수로는 옆면을 가공하고 밑면에 판석을 잇대어 축조한 조립식 형태로서 전반적인 형태가 loop 모양을 갖춤으로써, 자연의 물가에서 시작한 노천 개방형 수계의 행사가 정자 아래서 유상곡수하는 형태로 변천할 수 있도록 신라인들이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후일 명청 시대에 유행한, 소규모적이고 화려한 여러 겹 loop 모양의 수로가 평평한 원석 위에 천착되어 정자 아래에 놓인 정자형 곡수 양식에 오래 앞선 것으로서 그 기능적이고 미학적인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 장근식 - 한국과학기술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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