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나의 힘, 슈뢰딩거

연애는 나의 힘, 슈뢰딩거

주제 물리학
칼럼 분류 인물기사
칼럼 작성일 200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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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까지 빛은 파동, 전자는 입자로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광량자 이론을 제안하면서 그때까지 파동으로 생각되어 왔던 빛이 입자로서의 일면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줬다. 이러한 빛의 이중성으로 인해 물리학자들은 숱한 역리(逆理)에 부닥쳐야 했다. ‘빛의 두 얼굴’ 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파동방정식을 만들어 해법을 찾은 이가 있으니 바로 슈뢰딩거이다.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는 1887년 8월 12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1921년 취리히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고체비열, 열역학, 원자스펙트럼, 양자론 등에 관심을 갖고 깊게 파고들다가 1926년에는 본격적으로 파동역학 연구를 시작했다.

슈뢰딩거는 고전 역학의 토대 위에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을 도입해 원자핵을 도는 전자들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파동이론, 즉 전자가 원자의 핵 둘레에 산재한 점(입자)이 아니라 파동 형태로 존재한다는 파동방정식을 만들어냄으로써 20세기 물리학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미세한 입자의 운동을 지배하는 확률파동, 즉 이 파동이 외부의 영향에 의해 어떻게 변하는가를 파동함수의 형태로 기술한다. 예를 들어 얇은 두개의 틈으로 광자를 통과시키는 실험을 한다고 하자. 이때 단일 광자가 어디를 때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장소를 때릴까 하는 확률은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가령 어느 광자가 A 지점에 떨어질 확률을 60%로 계산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광자는 다른 곳에서도 부딪칠 수 있는 확률이 40%이다. 이 확률을 구하는 방정식이 바로 슈뢰딩거 방정식이다.

오늘날 슈뢰딩거 방정식은 원자 · 핵 · 고체물리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원자현미경의 원리인 ‘터널링 현상’을 풀기 위해 슈뢰딩거 방정식이 사용되며, 원자력 발전이나 원자폭탄과 같이 원자핵 붕괴로 에너지를 얻는 모든 분야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마치 뉴턴 역학처럼 현대 물리학을 다루는 분야에는 반드시 슈뢰딩거 방정식이 활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이론은 1925년에 선보인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함께 이른바 양자역학을 태동시켜 자연을 바라보는 과학자들의 시야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파동방정식을 만들어낸 공로로 1933년 슈뢰딩거는 디랙과 더불어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슈뢰딩거가 떠올린 파동방정식은 1925년의 크리스마스 휴가 때 이루어졌다. 당시 슈뢰딩거는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스위스 알프스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참 근사한 예전에 푼 적이 있는 한 공식의 원리를 떠올리고, 휴가를 마친 후 담배연기 가득한 방 안에서 밤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쉴 새 없이 논문을 써나갔다. 수리 물리학의 위대한 파동방정식의 영감이 애인과의 밀월여행에서 떠오른 셈이다.

슈뢰딩거는 왕성한 학문적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여인과 정사를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연애와 과학적 탐구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학자로서의 일생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던 25세 때 슈뢰딩거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여인과 첫사랑을 경험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생애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슈뢰딩거는 32세 때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잘츠부르크의 평범한 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부인을 ‘하인 부리듯’ 했으며 늘 새로운 여자와 사귀고 다녔다. 어쩌면 첫사랑의 실패로 자신과 동등하거나 높은 사회계층에 속한 여자와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결심을 하고, 자신의 상처를 부인에 대한 하대와 평생 자유분방한 연애를 통해 보상받으려 했는지 모른다. 그의 친구 아내인 힐데그룬데 마르히와 관계를 맺고 딸을 낳기도 했으니 그의 결혼 생활은 참으로 기이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슈뢰딩거의 업적은 물리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생명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던 그는 생명현상을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 ‘생명 현상의 기본인 유전자가 비주기성 고체’라고 생각하고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라는 저서로 남겼다. 그는 당시 생물학자들의 ‘생명 현상이 비결정적으로 일어난다’는 생각을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해 유전물질 발견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는 물리학의 위대한 창시자들 가운데 가장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불의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싸웠지만, 모든 정치적 행동은 경멸적으로 바라보았다. 허세와 형식을 혐오했지만, 영예를 얻고 상훈을 받는 것을 어린애처럼 즐겨했다. 그의 지성은 명확한 추론에 바쳐졌지만, 그의 기질은 프리마돈나처럼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오스트리아 사람다운 열정적 기질이 있었기에 그는 진리를 향해 초연하게 연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대이론을 완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 김형자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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