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성왕릉

전원성왕릉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

지정명: 원성왕릉
지정번호: 사적 제26호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

일반정보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에 위치하고 있는 원성왕릉의 무덤이다. 괘릉이라고도 불리는데 왕릉이 조성할 때 이곳에 있었던 작은 연못을 그대로 둔 채, 왕의 유해를 수면위에 걸어(掛:걸 괘)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서 붙여졌다고 전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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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원성왕릉의 무덤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에 위치하고 있다. 괘릉이라고 도 불리는데 그것은 이곳에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원래 작은 연못이 있어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위에 걸어(掛:걸 괘)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서 붙여졌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주고 있는 이 괘릉은 봉분과 그 전방의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능은 외형상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규모는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아래에는 봉토(封土)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에는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했으며, 그 조각수법은 신라 십이지신상의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호석의 밖으로는 회랑을 조성하고 그 둘레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 한 쌍,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이와 같은 유형의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동서 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다. 괘릉의 능묘제도는 당나라와의 문물교류를 통하여 그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지만,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하는 것은 신라인의 창안이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14년조에는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한다.(王薨. 諡曰元聖, 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 그러나 『삼국유사』왕력편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현재 괘릉에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참고문헌

강우방, 1973, 「新羅十二支像의 分析과 解釋-新羅十二支像의 Metamorphose」, 『佛敎美術』1, 東國大學校博物館.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十八 元聖王 [金氏 名敬愼 一作敬信 唐書云敬則. 父孝讓大阿干 追封明德大王 母仁□ 一云 知烏夫人 諡昭文王后 昌近伊已之女 妃淑貞夫人 神述角干之女 乙丑立 理五年. 陵在鵠寺 今崇福寺 有也致遠所立碑]
제38 선덕왕 [김씨이고 이름은 경신이다. 경신(敬信)이라고도 한다. 『唐書』에는 경칙(敬則)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효양대아간이니 명덕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어머니는 인□으로 지오부인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소문왕후이며, 창근이이의 딸이다. 왕비는 숙정부인으로 신술각간의 딸이다. 을축년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 능은 곡사에 있으니 지금의 숭복사이며, 최치원이 세운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