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신

역신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질병이 의인화된 모습.

일반정보

질병이 의인화된 모습으로, 헌강왕에 의해 등용된 동해용의 아들인 처용의 아름다운 아내를 범했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의하면, 역신(疫神)은 헌강왕에 의해 등용된 동해용의 아들인 처용의 아름다운 아내를 범한 존재이다.

이 이야기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49대 헌강왕대(875-886)와 비슷한 시기인 48대 경문왕대(861-875)의 후반기에는 천재지변이 많았고, 전염병이 자주 창궐하였다.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경문왕 7년(867) 5월과 10년(870) 7월, 13년(873) 봄에 각기 역질(疫疾)의 기사가 보인다. 헌강왕대는 일기가 순조로워 풍년이 들면서 역질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다시 51대 진성여왕대(887-897)에는 삶이 어려워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수세(收稅)가 어려울 지경이었으니, 상존해 온 전염병의 위협이 민중들을 엄습했을 만하다. 따라서 당대인에게는 공동의 최대 적인 역신(疫神)을 퇴치할 능력이 있는 처용과 같은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진성여왕 이후는 후삼국(後三國) 시기라는 혼란기에 해당하므로 사회적으로 미신(迷信)이 풍미하였는데, 처용은 바로 이런 시점에서 역신을 물리치는 존재로 기대되고 강력한 생명력을 얻어 풍속화 되는 계기를 맞았다는 견해가 있다.(김기흥, 2001)

고려시대에 『악학궤범(樂學軌範)』중의 처용가(處容歌)에는 역신(疫神)이 “열병신과 열병대신(熱病神及熱病大神)”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 처용가무연(處容歌舞宴)이 나례의식(儺禮儀式)에서도 그 목적과 대상이 악귀축출(惡魂逐出)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당대인들의 열병에 대한 두려움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신(神)의 작용으로 질병(疾病)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으며, 처용설화에서 천연두를 손님으로 의인화시킨 역신(疫神)이 처용 처를 범한 것은 질병을 주기 위한 범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엄원대, 1976)

처용 처(妻)와 간통한 역신에 대하여 도시 귀족의 유한공자(遊閑公子)이며, 타락한 화랑의 후예들의 하나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이우성, 1969)

역신을 허구적 서사(敍事)로, 병듦의 상징적 묘사로 보기도 한다. 여자 역신(疫神)이 남자 인간을 범하고 있는 그림이 이라크 풍속화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처용가의 이 장면을 병듦의 묘사로 보는 것이다. 이 그림에 보이는 아랍인의 병듦의 관념이 신라에 전해져 처용가에 드러난 것으로 보면서,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이도흠, 1994)

한편,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憲康王) 5년(879)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3월에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巡幸)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과 두건이 괴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일컬었다.『고기』에서는 왕의 즉위 원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여름 6월에 일길찬 신홍(信弘)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三月 巡幸國東州郡 有不知所從來四人 詣駕前歌舞 形容可駭 衣巾詭異 時人謂之山海精靈 古記謂 王卽位元年事 夏六月 一吉湌信弘叛 伏誅)” 이 기사는『삼국유사』 기이2
처용랑 망해사조의 기록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

역신이 처용랑의 아내를 범했다는 것을 통해, 역신이 처용랑의 등장에 불만을 가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헌강왕에게 왕위를 이어줄 후사가 없었을 때, 헌강왕이 인정하는 인물로 처용랑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왕권을 노리고 있던 자들에게 불만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삼국사기』의 기록 중에서 헌강왕 5년 3월의 내용에 이어서 등장하는 6월 일길찬 신홍의 모반 사건이 주목된다. 이에 신홍의 모반사건은 처용랑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되며, 역신은 모반세력이었던 신홍의 무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박인희, 2008)

참고문헌

이우성, 1969, 「三國遺事 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 -高麗 其人制度의 起源과의 關聯에서-」『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엄원대, 1976, 「處容에 關한 綜合的 考察」『國語國文學硏究』3.
이도흠, 1994, 「처용가의 和諍記號學的 硏究」『韓國學論集』24.
김기흥, 2001, 「新羅 處容說話의 역사적 진실」『歷史敎育』80.
박인희, 2008, 『삼국유사와 향가의 이해』, 월인.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 망해사)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 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 爲龍創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畵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辟>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山神獻舞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蓋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에서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잇닿아 있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가 도로에서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大王)은 개운포(開雲浦)[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 유람하였다. 왕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여,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깜깜하게 끼어 길을 잃었다.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용(東海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뜻이 머무르게 하고자 하였고, 또 급간(級干)의 관직(官職)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몰래 가서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로리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앗음을 어찌하리꼬. 이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는데, 공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고 그를 아름답게 여기며, 맹세코 지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악한 것을 피하고 경사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돌아와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점지하여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는데,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도 이름하였으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또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는 보지 못했으나, 왕만 홀로 그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이 몸소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神)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혹은 이미 신(神)이 나와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본떠 새겨서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 한다고 하였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니, 이는 그 형상으로 그를 일컬은 것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신(北岳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으므로, 옥도검(玉刀鈐)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고 이름하였다.『어법집(語法集)』에 이르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어 바치며 노래를 부르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 등이라고 하였다.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都邑)이 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이른다. 이에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여겨 탐락(耽樂)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