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형랑

비형랑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죽은 진지왕과 사량부 서녀 도화녀 사이에 태어난 아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비형랑은 죽은 진지왕과 사량부 서녀인 도화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진평왕이 데려다 길러 15세에 집사의 벼슬을 맡겼으며, 밤에 월성을 넘거나 귀신을 부리는 등 신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비형랑은 진평왕에게 길달이라는 귀신을 추천하였는데, 길달이 여우로 변하자 귀신을 시켜 죽였다. 그 후 귀신들은 비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으며, 당시의 사람들이 글을 지어 문에 붙혀 귀신을 쫓았다고 한다.

전문정보

비형랑(鼻荊郞)은 죽은 진지왕(眞智王)과 사량부(沙梁部) 서녀(庶女) 도화녀(桃花女)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그 기록은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조에서는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권1 기이(紀異)1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조를 통해서 알아 볼 수 있다. 신라 제 25대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4년만에 정사는 어지러워지고 황음하여 국인(國人)이 그를 폐출시켰다. 이에 앞서 사량부 서녀의 미모가 뛰어서,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는데 왕이 이를 듣고 궁중으로 불러 관계하고자 하였다. 도화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였고, 왕은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하니 도화녀가 그러면 가능하다 하였다. 이해에 왕은 폐위되어 돌아가셨고, 그 후 2년만에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이 넘은 후 별안간 밤중에 왕이 생시과 같이 그녀의 방에 찾아 왔다. 왕이 이제 남편이 없으니 가능한가 물으니, 도화녀는 부모에게 고하였고,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하여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7일 후에 자취가 별안간 없어졌으며, 도화녀는 태기가 있어 비형(鼻荊)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진평왕이 비형의 신이함을 듣고 데려다 길렀으며, 15세가 되자 집사(執事)의 벼슬을 임명하였다. 비형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거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서 서쪽 황천 위에서 귀신을 데리고 놀거나, 하룻밤에 귀교(鬼橋)라는 큰 다리를 만드는 등 신이한 행동을 하였다. 또 비형은 진평왕에게 귀신들 가운데 길달(吉達)을 추천하여 정사를 돕게 하였다. 길달은 충성스럽고 정직하였으며, 각간 임종(林宗)에게 아들이 없어 왕이 추천하여 아들로 삼게 하였는데, 어느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으며 그 귀신의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비형랑에 대한 글을 지어, 그것을 문에 붙혀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고적조를 통해 “그때 사람들이 가사(歌詞)를 짓기를 성제(聖帝)의 혼이 아들을 낳은 비형랑(鼻荊郞)의 집이로다. 날고 달리는 모든 귀신은 이곳에 머물지 말라하였다. 경주의 풍속에 지금도 이 가사를 문에 붙혀서 귀신을 쫓는다. 이것이 동경두두리(東京頭頭里)의 시초이다.”라 하여, 비형랑이 동경두두리의 시초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비형랑의 역사적 실체에 대하여 진지왕의 혼과 사량부 서녀인 도화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비형랑은 진평왕대 초기에 활동하고 있는데, 실제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 또한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고 있으며, 상당히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곧 비형랑은 후대에 용춘의 행적을 상징적 설화로 꾸며낸 가공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인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런 면에서 비형랑은 초기 용춘의 정치행보를 살피는데 도움을 줄 있는 것으로 보았다.(김두진, 1990)

한편 비형랑의 역사적 실체를 실제의 용춘으로 보기도 한다. 비형랑은 왕실에서 길러지고 15세가 되면서 즉 성년이 되면서 집사를 맡았다. 그 직책은 왕의 수족과도 같은 존재로서 청지기와도 같이 궁내의 다양한 일을 총괄하는 업무로 볼 수 있다. 용춘은 그의 초년 관직은 알 수 없으나, 진평왕 44년(622)에 최초의 내성사신이 되었다. 내성사신의 직책은 궁내의 재정을 중심으로 각종 업무를 총괄하였을 것인데, 이러한 주요 이력에서 비형과 용춘은 한 일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비형은 귀교를 하룻밤 사이에 건설하였고 그 휘하의 길달은 역시 길달문의 건설과 유관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어, 토목이나 건축에 관련이 깊은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용춘에게서도 이러한 사실이 발견되는데 『삼국유사』 권3 탑상 황룡사구층탑조에 따르면 여왕의 권위를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황룡사탑 건립에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기흥, 1999)

참고문헌

김두진, 1990, 「新羅 眞平王代 初期의 政治改革 -『三國遺事』 所載「桃花女·鼻荊郞」條의 分析을 中心으로-」『震檀學會』69.
김기흥, 1999, 「桃花女 鼻荊郞 설화의 역사적 진실」『韓國史論』41·42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
桃花女 鼻荊郞
第二十五舍輪王 諡眞智大王 姓金氏 妃起烏公之女 知刀夫人 大建八年丙申卽位[古本云 十一年己亥 誤矣] 御國四年 政亂荒<淫> 國人廢之 前此 沙梁部之庶女 姿容艶美 時號桃花娘 王聞而召致宮中 欲幸之 女曰 女之所守不事二夫 有夫而適他 雖萬乘之威 終不奪也 王曰 殺之何 女曰 寧斬于市 有願靡他 王戱曰 無夫 則可乎 曰可 王放而遣之 是年 王見廢而崩 後二年其夫亦死 浹旬忽夜中 王如平昔來於女房曰 <汝>昔有諾 今無汝夫 可乎 女不輕諾 告於父母 父母曰 君王之敎 何以避之 以其女入於房 留御七日 常有五色雲覆屋 <香>氣滿室 七日後 忽然無蹤 女因而有娠 月滿將産 天地振動 産得一男 名曰鼻荊 眞平大王聞其殊異 收養宮中 年至十五 授差執事 每夜逃去遠遊 王使勇士五十人守之 每飛過月城 西去荒川岸上[在京城西] 率鬼衆遊 勇士伏林中窺伺 鬼衆聞諸寺曉鐘各散 郞亦歸矣 軍士以事來奏 王召鼻荊曰 <汝>領鬼遊 信乎 郞曰 然 王曰 然則<汝><使>鬼衆成橋於<神>元寺北渠[一作 神衆寺 誤 一云 荒川東深渠] 荊奉勑 使其徒鍊石 成大橋於一夜 故名鬼橋 王又問 鬼衆之中 有出現人間輔朝政者乎 曰 有吉達者 可輔國政 王曰 與來 翌日荊與俱見 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角干林宗無子 王勑爲嗣子 林宗命吉達創樓門於興輪寺南 每夜去宿其門上 故名吉達門 一日吉達變狐而遁去 荊使鬼捉而殺之 故其衆聞鼻荊之名 怖畏而走 時人作詞曰 聖帝魂生子 鼻荊郞室亭 飛馳諸鬼衆 此處莫留停 鄕俗帖此詞以辟鬼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다.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 8년 병신(576)에 왕위에 즉위하였다.[고본에는 11년 기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나라를 다스린지 4년 만에 정사가 혼란해지고 주색에 빠져 국인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 서녀가 용모가 아름답고 고와 당시 도화랑이라고 불렀다.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 상관(相關)하고자 하니 여인이 아뢰기를, “여자가 지킬 일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로 가는 것은 비록 제왕의 위엄으로서도 끝내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참수될지라도 딴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하니 왕이 희롱하며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하옵니다.”하였다. 왕은 여인을 놓아줘 돌려보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다. 그 후 2년 만에 여자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 후에 홀연히 밤 중에 왕은 평소처럼 여자의 방에 와서 말하기를, “네가 예전에 허락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하니 여자는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물었다. 부모가 말하기를, “군왕의 말씀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하고는 그 딸을 방에 들여보냈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뒤 홀연히 자취가 없어졌다. 여인은 이내 임신을 하였고 달이 차서 낳으려 하자 천지가 진동하더니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기이함을 듣고 거두어들여 궁중에서 길렀다.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직(執事職)을 주었다.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노니 왕은 용사 50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 언덕 위[서울 서쪽에 있다]에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뿔뿔이 흩어졌고, 비형랑도 또한 돌아왔다. 군사가 돌아와 사실대로 와서 아뢰니 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을 데리고 논다는 말이 정말이냐?” 낭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또는 황천(荒川) 동쪽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하니, 비형랑이 명을 받들어 귀신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러므로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은 또 묻기를, “귀신들 가운데 인간으로 출현하여 정사를 도울 자가 있느냐?”하니,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너라” 하였다. 이튿날 비형랑이 길달을 데리고 함께 와서 뵈었다.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견줄 바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명하여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명하여 길달로 하여금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니, 밤마다 그 문 위에 가서 잤으므로 길달문이라 하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글을 지어 이르기를, “성제(聖帝)의 혼령이 낳은 아들인 비형랑의 집과 정자이니, 날고뛰는 모든 귀신들아, 이곳에 머물지 마라!” 라고 하였다. 민간풍속에 이 글을 집에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