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최치원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시대 6두품 학자.
생몰년 : 857~?

일반정보

최치원(崔致遠)은 신라시대의 6두품 출신 학자로 경문왕 10년(870)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경문왕 10년(870) 귀국한 후에는 신라 제51대 진성왕(眞聖王)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文昌侯)로 봉해졌으며 가야산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전문정보

최치원(崔致遠)은 신라시대의 학자로서 『삼국사기』권46 열전6 최치원조에 의하면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며, 경주 사량부 출생이다.(字孤雲 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라고, 『삼국유사』권1 기이1 신라시조혁거세왕조에서는 “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致遠乃本彼部人也)”라고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출생지가 경주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견일(肩逸)은 신라 제48대 경문왕이 숭복사를 창건할 때 발원문을 작성하는 등의 행적을 보아 보아 이름있는 문사(文士)였음을 알 수 있으며, 최치원 가계는 경문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장일규, 2002)

최치원은 경문왕대 강화되기 시작한 유교진흥책을 통해 경문왕 10년(870)인 13세에 당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아버지인 견일은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十年不第進士則勿謂吾兒 吾亦不謂有兒)”라고 하고 오직 학문 수학에 열중하기만을 원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견일은 중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당 과거급제와 영달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으며 요컨대 골품의 열세를 당의 권위와 학문의 힘으로써 만회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백, 1974)

최치원은 헌강왕 4년(878)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헌강왕 7년(881)에는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黃巢)의 난을 진압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은 훗날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28세의 나이가 되는 헌강왕 11년(885) 신라로 귀국하였다. 귀국 동기에 대해서는 고변(高騈)의 실권(失權)과 도교 혹신(惑信)으로 인한 관직 진출의 좌절을 들기도 하고,(김복순, 2002) 헌강왕의 왕권강화에 대한 지원 때문에 귀국을 결심 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장일규, 2002) 즉 최치원의 귀국은 재당 생활에서 표출된 문제는 물론 신라 정치 상황과 관련되어 이루어졌던 듯하다.

최치원은 귀국 직후 헌강왕의 문한기구(文翰機構)의 확장으로 인해 왕실의 측근인 문한관(文翰官)을 맡았다. 그러나 최치원은 다시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문란으로 뜻을 펼 수가 없었다. 당시 신라사회는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도적 떼와 반란이 횡행했다. 진성여왕 5년(891) 양길과 궁예가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 해에는 견훤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진성여왕 8년(894)에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骨品制社會)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보고자 한 노력으로「시무10조(始務十條)」를 올렸으나 골품제의 모순과 왕권의 미약으로 그의 개혁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 후 42세경인 효공왕 2년(898)부터는 관직을 내놓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삼국사기』권46 열전6 최치원조에서는 난세를 만나 스스로 불우하다고 여겼던 이유에서 비롯되어, 최치원의 은둔은 골품제도 상에서 취해지는 신분한계의 불만과 진골귀족의 견제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보고있다.(이기백, 1974) 그러나 최치원이 전란도 피하고 병도 치료하기 위하여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에 은거하였던 것이며, 그의 무덤이 홍산(鴻山)에 있다는 설로 보아 만년에 해인사에 머물다가 효공왕 12년(908) 이후 지병으로 죽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복순, 2002) 현종 14년(1023)에는 문창후(文昌侯)로 봉해졌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 『금체시(今體詩)』,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잡시부(雜詩賦)』,『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등이 있고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 있다. 특히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은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연표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족히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해 삼국, 통일신라,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 관련되는 저술로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석이정전(釋利貞傳)』등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四山碑銘)」뿐이고, 그 외 「동문선(東文選)」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 원문(願文), 찬(讚) 등이 전할 뿐이다.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思想史硏究』, 일조각.
김복순, 2002, 『한국 고대 불교사 연구』, 민족사.
장일규, 2002, 「崔致遠 연구의 성과와 전망」『北岳史論』9.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十八 元聖王[金氏 名敬愼 一作敬信 唐書云敬則 父孝讓大阿干 追封明德大王 母仁□ 一云知<烏>夫人 諡昭文王后 昌近伊<己>之女 妃淑貞夫人 神述角干之女 乙丑立 理十四年 陵在鵠寺 今崇福寺<也> <有致>遠所立碑]
제38 원성왕[김씨로 이름은 경신으로 또는 경신이라고도 하며 당서에는 경칙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효양대아간이며 명덕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어머니는 인□ 또는 지오부인이라고 하며, 시호는 소문왕후로 창근이기의 딸이다. 왕비는 숙정부인으로 신술 각간의 딸이다. 을축(785)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 능은 곡사에 있으니 지금의 숭복사이며, 최치원이 세운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