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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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

지정명: 관문성(關門城)
지정번호: 사적 제48호
위치: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 모화리와 경상남도 울주군 범서면 두산리 사이

일반정보

신라의 산성으로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았다

관문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성왕조에 따르면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722) 10월에 관문성을 쌓았다고 한다. 개원 10년은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해당된다. 관문성은 각간(角干) 원진(元眞)이 3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6,792보 5척이었다고 한다. 모벌군성(毛伐郡城)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이후부터는 계속 관문성으로 불렸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21년(722)에 “모벌군에 성을 축조하여 왜적의 길목을 막았다.(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곳이 신라의 모화군이었으므로 이때를 관문성의 초축(初築) 연대로 볼 수 있다. 관문성은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규모는 12㎞이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남아 있다. 경주시와 울산광역시 경계의 삼태봉의 남측에 있는 둘레 1.8km의 기박산성에서 서쪽으로 모화리와 녹동리의 문을 거쳐 서쪽의 치술령 남쪽에 걸쳐 있으며, 석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우박천을 사이에 두고 양편 높은 산에 동해를 향해서 쌓았는데, 이것은 동해 쪽에서 침입해 오는 왜병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만에 상륙한 왜병들을 이곳 관문성에서 굳게 지켜 월성까지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전초적인 구실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도 “관문성(關門城)은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천 7백 99척이다. 지금은 허물어졌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성내에는 문터 5개소와 수구 3개소, 건물지 5개소 및 우물과 연못이 각각 1개씩이 남아 있다. 관문성은 신라의 도성 외곽의 산성을 이용한 방위 체제에 다시 그 외곽의 방어를 위하여 구축된 것으로, 남쪽 지역 행성의 특수한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성은 663년에 축조된 부산성과 673년 9월에 축조한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 평야의 동쪽, 즉 경주에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역인 영일만과 울산만에 상륙하는 왜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박방룡, 1997)

참고문헌

박방룡, 1997, 『新羅 都城 硏究』,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성왕)
孝成王
開元十年壬戌十月 始築闕門於毛<火>郡 今毛火村 屬慶州東南境 乃防日本塞垣也 周廻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 役徒三萬九千二百六十二人 掌員元眞角干 開元二十一年癸酉 唐人欲征北<狄> 請兵新羅 客使六百四人來還國
효성왕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闕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步) 5척(尺)이고, 동원된 역부(役徒)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은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 개원(開元) 21년 계유(癸酉, 733)에 당나라 사람들이 북쪽 오랑캐(北狄)를 치려고 신라에 청병하여 객사 6백 4명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