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녀

도화녀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사량부의 서녀로 죽은 진지왕의 혼령과 동침하여 비형랑을 낳았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사량부의 서녀의 딸로 뛰어난 미모로 진지왕의 눈에 들었으나, 남편이 있음을 이유로 진지왕과의 관계를 거절하였다. 진지왕이 폐위 후 죽게 되었으며, 도화녀의 남편도 죽은 후에 홀연히 진지왕이 생시의 모습으로 나타나 도화녀 부모의 허락 하에 진지왕과 7일 동안 동침하였는데, 임신하여 비형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전문정보

도화녀(桃花女)는 진지왕(眞智王)때의 사량부(沙梁部) 출신의 서녀(庶女)로, 죽은 진지왕과의 혼령 사이에서 비형랑(鼻荊郞)이라는 아들을 낳은 인물이다. 도화녀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조를 통해서 알아 볼 수 있다. 신라 제 25대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4년만에 정사는 어지러워지고 황음하여 국인(國人)이 그를 폐출 시켰다. 이에 앞서 사량부 서녀의 미모가 뛰어서,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는데 왕이 이를 듣고 궁중으로 불러 관계하고자 하였다. 도화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였고, 왕은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하니 도화녀가 그러면 가능하다 하였다. 이해에 왕은 폐위 되어 돌아가셨고, 그 후 2년만에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이 넘은 후 별안간 밤중에 왕이 생시과 같이 그녀의 방에 찾아 왔다. 왕이 이제 남편이 없으니 가능한가 물으니, 도화녀는 부모에게 고하였고,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하여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7일 후에 자취가 별안간 없어졌으며, 도화녀는 태기가 있어 비형(鼻荊)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진평왕이 비형의 신이함을 듣고 데려다 길렀으며, 15세가 되자 집사(執事)의 벼슬을 임명하였다. 비형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거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서 서쪽 황천 위에서 귀신을 데리고 놀거나, 하룻밤에 귀교(鬼橋)라는 큰 다리를 만드는 등 신이한 행동을 하였다. 또 비형은 진평왕에게 귀신들 가운데 길달(吉達)을 추천하여 정사를 돕게 하였다. 길달은 충성스럽고 정직하였으며, 각간 임종(林宗)에게 아들이 없어 왕이 추천하여 아들로 삼게 하였는데, 어느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으며 그 귀신의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비형랑에 대한 글을 지어, 그것을 문에 붙혀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도화녀 설화의 성격에 대해서, 죽은 연인의 혼백이 나타나 산 사람과 동거 또는 동침하는 시애설화(屍愛說話)로 보거나(장덕순, 1970), 죽은 왕이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존재까지 육체적 관계를 가지는 이물교구(異物交媾) 설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물교구의 설화일수록 태어나는 2세는 비상한 인간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비상한 인간으로 비형랑을 들고 있다. 또는 관직에 있는 자가 권위로써 여성들을 성적으로 유린하여 그 여인의 의지를 꺾었다는 관탈민녀(官奪民女)형 설화로 보기도 한다.(최래옥, 1981) 그러나 도화녀 설화에서는 진지왕과의 관계에서 도화녀가 자신의 의지를 꺾었다기 보다는 관철하였기 때문에 관탈민녀형 설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길태숙 외, 2003)

도화녀의 신분에 대해서 “사량부의 서녀”라고 한 것에 주목하여 도화녀가 왕의 청을 거절 할 수 있었던 것은 도화녀의 집안이 사량부 내에 상당한 세력기반을 가진데서 가능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두진, 1990) 그리고 도화녀가 왕과 결합하여 아들을 낳았던 만큼 도화녀의 신분은 제2골 정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기흥, 1999) 또 도화녀가 진지왕의 아들 비형랑을 낳았고, 비형이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라고 한다면, 도화녀는 곧 진지왕의 비(妃)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도화녀는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출궁 당했기 때문에 “사량부 서녀”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김덕원, 2003)

참고문헌

장덕순, 1970, 『韓國說話文學의 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최래옥, 1981, 「官奪民女型 說話의 연구」『韓國古典散文硏究』, 장덕순선생화갑기념논문집.
김두진, 1990, 「新羅 眞平王代 初期의 政治改革 -『三國遺事』 所載「桃花女·鼻荊郞」條의 分析을 中心으로-」『震檀學會』69.
김기흥, 1999, 「桃花女 鼻荊郞 설화의 역사적 진실」『韓國史論』41·42合.
길태순·윤혜신·최선경, 2003, 『삼국유사와 여성』, 이회출판사.
김덕원, 2003, 「新羅 眞智王代의 政局運營」『梨花史學硏究』3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
桃花女鼻荊郞
第二十五舍輪王 諡眞智大王 姓金氏 妃起烏公之女 知刀夫人 大建八年丙申卽位[古本云 十一年己亥 誤矣] 御國四年 政亂荒<淫> 國人廢之 前此 沙梁部之庶女 姿容艶美 時號桃花娘 王聞而召致宮中 欲幸之 女曰 女之所守不事二夫 有夫而適他 雖萬乘之威 終不奪也 王曰 殺之何 女曰 寧斬于市 有願靡他 王戱曰 無夫 則可乎 曰可 王放而遣之 是年 王見廢而崩 後二年其夫亦死 浹旬忽夜中 王如平昔來於女房曰 <汝>昔有諾 今無汝夫 可乎 女不輕諾 告於父母 父母曰 君王之敎 何以避之 以其女入於房 留御七日 常有五色雲覆屋 <香>氣滿室 七日後 忽然無蹤 女因而有娠 月滿將産 天地振動 産得一男 名曰鼻荊 眞平大王聞其殊異 收養宮中 年至十五 授差執事 每夜逃去遠遊 王使勇士五十人守之 每飛過月城 西去荒川岸上[在京城西] 率鬼衆遊 勇士伏林中窺伺 鬼衆聞諸寺曉鐘各散 郞亦歸矣 軍士以事來奏 王召鼻荊曰 <汝>領鬼遊 信乎 郞曰 然 王曰 然則<汝><使>鬼衆成橋於<神>元寺北渠[一作 神衆寺 誤 一云 荒川東深渠] 荊奉勑 使其徒鍊石 成大橋於一夜 故名鬼橋 王又問 鬼衆之中 有出現人間輔朝政者乎 曰 有吉達者 可輔國政 王曰 與來 翌日荊與俱見 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角干林宗無子 王勑爲嗣子 林宗命吉達創樓門於興輪寺南 每夜去宿其門上 故名吉達門 一日吉達變狐而遁去 荊使鬼捉而殺之 故其衆聞鼻荊之名 怖畏而走 時人作詞曰 聖帝魂生子 鼻荊郞室亭 飛馳諸鬼衆 此處莫留停 鄕俗帖此詞以辟鬼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다.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 8년 병신(576)에 왕위에 즉위하였다.[고본에는 11년 기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나라를 다스린지 4년 만에 정사가 혼란해지고 주색에 빠져 국인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 서녀가 용모가 아름답고 고와 당시 도화랑이라고 불렀다.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 상관(相關)하고자 하니 여인이 아뢰기를, “여자가 지킬 일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로 가는 것은 비록 제왕의 위엄으로서도 끝내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참수될지라도 딴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하니 왕이 희롱하며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하옵니다.”하였다. 왕은 여인을 놓아줘 돌려보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다. 그 후 2년 만에 여자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 후에 홀연히 밤 중에 왕은 평소처럼 여자의 방에 와서 말하기를, “네가 예전에 허락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하니 여자는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물었다. 부모가 말하기를, “군왕의 말씀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하고는 그 딸을 방에 들여보냈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뒤 홀연히 자취가 없어졌다. 여인은 이내 임신을 하였고 달이 차서 낳으려 하자 천지가 진동하더니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기이함을 듣고 거두어들여 궁중에서 길렀다.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직(執事職)을 주었다.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노니 왕은 용사 50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 언덕 위[서울 서쪽에 있다]에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뿔뿔이 흩어졌고, 비형랑도 또한 돌아왔다. 군사가 돌아와 사실대로 와서 아뢰니 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을 데리고 논다는 말이 정말이냐?” 낭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또는 황천(荒川) 동쪽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하니, 비형랑이 명을 받들어 귀신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러므로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은 또 묻기를, “귀신들 가운데 인간으로 출현하여 정사를 도울 자가 있느냐?”하니,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너라” 하였다. 이튿날 비형랑이 길달을 데리고 함께 와서 뵈었다.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견줄 바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명하여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명하여 길달로 하여금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니, 밤마다 그 문 위에 가서 잤으므로 길달문이라 하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글을 지어 이르기를, “성제(聖帝)의 혼령이 낳은 아들인 비형랑의 집과 정자이니, 날고뛰는 모든 귀신들아, 이곳에 머물지 마라!” 라고 하였다. 민간풍속에 이 글을 집에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