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나물왕릉

전 나물왕릉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지정명: 신라내물왕릉(新羅奈勿王陵)
지정번호: 사적 제188호
위치: 경북 경주시 교동 14

일반정보

신라 제 17대 나물왕의 능으로 전해오고 있는 경주 월성 서북쪽 계림 내 평지의 대형 원형 봉토분이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에 첨성대(瞻星臺)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 위치와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물왕릉이 아니며, 황남대총이 나물왕릉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전 나물왕릉 본문 이미지 1
전 나물왕릉 본문 이미지 2

전문정보

신라 제17대 나물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왕릉은 왕성인 월성 서북쪽 계림내의 평지에 있다. 소형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높이는 5.78m이며, 봉분 직경은 21.60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과는 달리 호석(護石)에 자연석 받침돌을 받쳐 놓은 것으로, 신라 횡혈식석실분의 호석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분의 봉분 규모도 적석목곽분보다는 횡혈식석실분에 알맞은 것으로, 평지고분이지만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일 가능성이 많다. 봉분 앞에는 최근에 설치된 전 미추왕릉과 같은 의자형의 혼유석과 조선 왕릉 혼유석 형태의 상석이 있다. 한편 이 고분 주위로는 평면 장방형으로 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고분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전 나물왕릉(傳 奈勿王陵)은 김씨일족의 여러 왕릉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지정되었으니, 이는 매우 이례적이다. 왜냐하면 나물왕이 시조 미추왕을 잇는 두 번째 왕이자 김씨족으로 하여금 왕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 중시조(中始祖)로 숭앙받던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 없이 나물왕릉이 늦게 지정되는 실질적인 이유는 능 소재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확인되지 않고 『삼국유사』 왕력에서 “능이 점성대의 서남에 있다(陵在占星臺西南)”고 하였던 점과, 조선조 사회의 억불정책(抑佛政策)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삼국유사』 왕력에 위치가 분명하게 언급된 나물왕릉과 원성왕릉, 그리고 기록으로 미루어 왕릉의 존재는 인정되나 위치가 분명치 않은 민애왕릉 등은 1730년대의 비정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김씨일족은 1730년 이후에도 왕릉을 비정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였으니, 정조 22년(1798)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에서 나물왕릉이 확인되고 있다.

20세기 초에 오면 『삼국유사』의 내용에 대한 불신보다는 나물왕릉에 대한 애착이 훨씬 더 강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1910년대에 계림내의 30호분이 이미 나물왕릉으로 지정되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물왕릉은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경주지도(1/10,000)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그 결과 1933년의 『동경통지(東京通志)』와 『경주읍지(慶州邑誌)』에서 “교리의 첨성대 아래에 있다(在校里瞻星臺下)”고 하거나 “첨성대 서남이며 지금의 교리에 있다(在瞻星臺西南今校里)”는 기록으로 나타나게 된다.(이근직, 2006)

나물왕은 후세의 큰 추앙을 받은 실질적인 김씨 왕조의 창시자로서 그 능 규모 또한 컸을 것이고, 재위시기로 보아 적석목곽분이어야 할 것인데, 현재의 능은 규모가 작은 석실분 형식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나물왕릉을 신라 최대의 적석목곽분인 대능원의 황남대총으로 비정하는 학계의 견해가 있으며, 『삼국유사』의 기록을 존중하면서 나물왕계 계승의식을 표방한 신라 하대 왕실의 수축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견해도 있다.

나물왕릉을 황남동 98호분(황남대총)에 비정하는 견해는 고고학적 양상에 무게를 둔 것이다. 이 고분은 외형이 하나의 고분을 먼저 만들고 나서 배우자가 사망한 뒤, 원래의 고분 일부를 파내고 연접시켜 만든 표주박 모양의 쌍분(雙墳)이다. 황남대총이 부부합장의 쌍분이 된 데에는 어떤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인데, 북분이 극히 화려한 부장품이 출토된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졌으며, 남편 무덤의 부장내용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점이 크게 눈길을 끈다. 여러 정황증거로 보아 이들은 왕의 내외가 분명하며, 그 주인공은 나물왕 부부에 틀림없다고 한다. 곧, 나물왕의 등극은 흘해왕이 후사없이 죽자, 제11대 조분왕 집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계승 후보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미추왕 가문의 왕녀인 보반부인과 나물왕이 혼인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므로 적통의 배경은 의연히 왕비이지만 보반부인에게 있었고, 그러한 연유로 금관 등을 위시한 적통 표시물들이 보반부인의 무덤에만 부장되었다는 것이다.(이종선, 2000)

참고문헌

최병현, 1992, 『新羅古墳硏究』, 일지사.
이종선, 2000, 『古新羅王陵硏究』, 학연문화사.
이근직, 2006, 「新羅 王陵의 起源과 變遷」,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박사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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