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길

양길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진성여왕 때 일어난 북원(北原)의 지방세력
생몰년: 미상

일반정보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실정이 겹치고, 재해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발생한 북원(北原)의 지방세력이다. 궁예(弓裔)는 891년 죽주(竹州, 죽산)의 기훤(箕萱)의 휘하에 있다가 892년 양길에게로 몸을 의탁한다. 이 때 양길의 세력이 강성하여 궁예가 휘하가 되니, 견훤(甄萱)이 멀리 있는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고 한다. 양길은 궁예에게 군사를 나누어주고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양길의 세력이 강원도일대에 떨치기도 하였다. 이후 궁예의 세력이 커지자 899년 비뇌성(非惱城)에서 궁예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궁예에게 패하였다.

전문정보

신라 진성여왕 때 일어난 북원의 지방세력이다. 『삼국유사』왕력과 『삼국사기』권50 열전10 견훤조에는 “양길(良吉)”로, 『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는 “양길(梁吉)”로 표기되어 있다.

궁예는 891년 죽주(竹州:죽산)의 기훤(箕萱)의 휘하에 있다가 892년 양길에게로 몸을 의탁한다.『삼국사기』권50 열전10 견훤조에 따르면, 이 때 “북원의 도적 양길의 세력이 강성하여 궁예가 스스로 투항하여 휘하가 되니, 견훤이 이것을 듣고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北原賊良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職爲裨將)고 한다. 궁예가 양길에게 갔을 당시 양길의 세력은 지극히 미약하여, 그의 판도 역시 북원의 범주를 못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궁예가 양길로부터 겨우 100여 기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거느리고 처음으로 정복한 지역이 지금의 영월일대인 주천(酒泉)과 나성(奈城)인데, 이들 지역은 바로 북원의 인접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궁예가 북원의 동쪽 지방에 대한 정복사업으로 명주(溟州:강릉)에 입성하게 된 894년경부터 양길과 궁예 사이에는 관계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궁예의 세력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8년조(894)에 따르면 궁예의 무리가 600여 명이라고 하고,『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 따르면, 궁예의 군사가 이미 3,500여 명이었다고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이에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열전을 따르며, 궁예의 군사가 3,500여 명이나 될 정도로 세력이 급성장 했다면, 이미 양길로서는 궁예를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최규성, 1987)

궁예는 명주에 입성한 뒤 휘하 장병들의 군심을 얻어 장군에 추대되었다. 이와 더불어 양길의 휘하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을 구축하여 송악군(松岳郡)으로부터 왕건(王建)의 투항을 받아 강력한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이 때 양길은 북원에 있으면서 아직도 국원(國原:충주)등 30여 성을 가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궁예의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다는 말을 들고 899년에 국원 등지의 10여 성주(城主)들과 함께 비뇌성(非惱城)으로 진군하여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궁예에게 오히려 습격당하여 크게 패하였다.

참고문헌

최규성, 1987, 「弓裔政權의 性格과 國號의 變更」『상명여자대학논문집』19.
정선용, 1997, 「弓裔의 勢力形成 過程과 都邑 選定」 『韓國史硏究』 97.

관련원문 및 해석

後高麗 弓裔 [大順庚戌 始投北原賊良吉屯 丙辰都鐵圓城[今東州也] 丁巳移都松岳郡 辛酉稱高麗 甲子改國號摩震 置元<武>泰 甲戌還鐵原]
후고려 궁예 [대순 경술에 처음엔 북원의 적 양길의 진영에 투항하였다. 병진에 철원성[지금의 동주이다]에 도읍하였다. 정사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신유에 고려라고 일컬었다. 갑자에 국호를 고쳐 마진이라고 하고 연호를 두어 무태라고 하였다. 갑술에 철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