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사

원통사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오대산 동대에 설치되었던 신앙결사

일반정보

원통사는 신라시대 오대산 동대에 설치되었던 불교의 신앙결사이다. 승려 보천이 죽기 전에나라에 이익이 될만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오대산의 각대에 각각 암자를 짓고 신앙결사들로 하여금 각대에 상주하고 계시는 부처와 보살들을 모시면 국가에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중 오대산의 동대에는 관음방을 설치하고 원통사로 하여금 관음보살을 모시고 수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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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는 신라 태자 보천(寶川)이 오대산(五臺山)에서 승려가 되어 수행하다가 입적하는 모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보천은 죽기 전에 불사(佛事)를 통해 국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즉 오대산의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의 각 대마다 상주하고 계시는 부처․보살을 위해 암자를 짓고, 각 암자마다 신앙결사를 두어 불공을 드린다면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이 평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로울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중에 청색의 방위인 동대(東臺)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대(北臺) 남쪽 기슭 끝에는 관음방(觀音房)을 설치하고,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서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복전승(福田僧, 공양을 맡은 승려) 5명을 이곳에 두고,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金光明經)』․『인왕경(仁王經)』․『반야경(般若經)』․『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를 읽게 하고, 밤으로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케 하였는데, 이들 승려집단을 원통사(圓通社)라고 칭하도록 하였다. 즉 원통사란 오대산 동대의 관음방에 거처하며 관음보살을 모시고 수행하는 신앙결사이다.

신라에서는 사회(社會)라고도 불렸던 이러한 불교신앙결사가 조직된 사례가 많이 있다. 이런 결사는 수행과 불사 등을 위해 승려와 신도가 함께 참여하여 조직하는 일종의 신앙단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결사는 고구려(高句麗)에서 이미 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제119호인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 金銅如來立像)의 광배(光背)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승려들과 신도 40명이 모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일종의 결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제 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대 원광(圓光, 540-?)에 의해 주도되었던 점찰보(占察寶)를 신라의 첫 신앙결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이러한 초기 신앙결사의 성격과 관련하여 초기 신라의 불교 신앙결사는 재앙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통일 이후에는 신앙결사가 비교적 불교 수행 중심의 성격이 강화되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김문경, 1976) 한편 삼국통일 이후에는 화엄종 승려의 주도하에 결성된 화엄결사(華嚴結社)가 성덕왕 4년(705)부터 나타나 9세기 말경에는 상당히 성행하였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김상현, 1985) 이에 대하여 중국에서 첫 화엄결사가 822년에 결성되었음을 감안하면 중국보다 늦게 화엄종을 받아들인 신라가 중국보다 120여년 빨리 화엄결사를 결성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기도 한다.(2002, 김복순) 이러한 신앙결사는 국가주도의 신앙결사와 민간주도의 신앙결사로 나뉘는데, 신라 하대로 가면 정권의 불안정과 천재지변에 의해 지방사회에 민간주도 신앙결사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윤선태, 2005)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조에 의하면 보천은 이러한 신앙결사를 오대산의 동․서․남․북․중 각 대마다 원통사․수정사․금강사․백련사․화엄사의 5개를 결성하게 하고, 자신이 머물렀던 보천암에 화장사(華藏寺)를 짓고 법륜사(法輪社)를 결성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 외에 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세우도록 하여 총 6개의 결사와 이들의 중심지가 되는 사찰을 오대산에 둘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이것은 물론 오대산 각각의 대마다 부처나 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렇게 방위별로 관장하는 부처가 있다는 관념은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신라에서도 사방불(四方佛,) 혹은 오방불(五方佛)등의 관념으로 나타났다. 신라 오대산 신앙은 특히 밀교 오방불의 영향, 그 중에서도 당나라 징관(澄觀, 738-839)의 오방불 체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박노준, 1988) 징관의 밀교 금강계 만다라 5부처와 신라 오대산 오방불을 위치에 따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의 오대산신앙
당나라 징관의 오대산 신앙

관음보살(觀音菩薩)
아촉불(阿閦佛)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수불(無量壽佛)

지장보살(地藏菩薩)
보생불(寶生佛)

석가불(釋迦佛)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신라와 밀교의 오방불은 동대와 남대, 북대에서 차이가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오방불 개념을 신라가 독자적으로 변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지장보살은 밀교에서 보생불의 화신(化身)으로 이해되기도 하며 불공성취불과 석가불 또한 밀교에서 동일시되고 있다.(홍윤식, 1985) 따라서 확실하게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동대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오대산에는 이들 부처․보살을 모시는 5개의 결사 외에 화장사의 법륜사와 문수갑사의 7명 승려들이 있었는데, 문수갑사의 승려들도 결사로 파악하여 오대산 신앙체계는 5불신앙이 아니라 7불신앙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김두진, 2002)

이러한 신앙체계 아래 오대산에 결성된 결사들의 운영비용에 대해 보천은 국가가 책임질 것을 언급하였다. 즉, 이들 복전승 37명의 재(齋)에 필요한 재료들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河西府)의 도(道)에 속한 여덟 주(州)의 세금으로써 충당하게 하며, 대대로 군왕들이 이를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보천 당시에는 결사의 조직이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운영비 또한 국가의 세금으로 충당되었음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원래 일반적으로 결사는 민간의 주도로 결성되며, 거기에 필요한 경비는 결사의 구성원들이 책임지는 것인데, 신라의 오대산 신앙은 그렇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 근본적인 성격 자체가 일반 결사들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오대산 신앙결사는 국가의 안녕이라는 명분을 위해 국가에서 결성하였기에, 수행 측면에서 결사의 본래 의미는 축소되고 국가를 위한 하나의 조직체로 전락하여 단지 전제군주에 예속된 하나의 기복(祈福)단체로서 역할을 하였다고 본 것이다.(한보광, 1992)

오대산의 결사들이 정확하게 언제 결성되었는지는 확실히 할 수 없다. 이는 보천이 남긴 기록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러한 보천의 조언이 과연 실천에 옮겨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천이 이러한 오대산에서의 불사(佛事)를 상세히 일러주며 말미에 왕에게 대대로 잊지말고 이것을 준행할 것을 당부하였다는 점, 불사에 소요되는 비용의 조달방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점, 그리고 신앙결사의 목적이 호국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록으로만 그치지는 않고 보천이 입적한 8세기경에 일정 부분까지는 실천에 옮겨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상현, 1985)

한편으로 오대산 각 대의 결사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한꺼번에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당나라 징관의 영향을 받았다면 적어도 8,9세기에는 신라의 오대산 신앙에 영향을 미쳤을 텐데, 이 당시 신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미륵불은 오대산 신앙체계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었다. 따라서 오대산 신앙체계는 미륵불에 대한 신앙이 신라 사상체계 내에서 약화된 이후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705년에 개창된 것으로 기록된 중대 진여원의 화엄사(華嚴社) 외의 다른 결사들은 궁예의 축출로 미륵불 신앙이 쇠멸한 10세기 이후에야 결성되었다고 보았다.(김두진, 2002)

오대산 동대에서 관음보살을 모시도록 했던 원통사는 당나라 징관의 금강계 오방불에서 동쪽은 아촉불을 모셨던 것과는 달리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오대산의 동쪽을 관음보살이 관장하는 것으로 나타난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 신라에 성행했던 관음신앙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신라에서 관음신앙은 6세기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삼국유사』 권3 탑상4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조에 동해 해변굴에서 의상(義湘, 625-702)이 관음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어 동해안 지역에 관음신앙의 전통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음신앙의 전통이 오대산 동대의 상주보살로서 관음을 설정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한편 결사의 이름인 원통(圓通)은 관음보살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보천은 오대산 동대의 원통사에 『금광명경(金光明經)』․『인왕경(仁王經)』등을 읽도록 하였는데 이들 경전은 호국경전에 속하는 것으로 원통사의 결사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신동하, 1997)

참고문헌

김문경, 1976, 「三國․新羅時代의 佛敎 信仰結社」 『史學誌』10, 단국대학교 사학회.
김상현, 1985, 「統一新羅時代의 華嚴信仰」 『新羅文化』2,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홍윤식, 1985, 「新羅華嚴思想의 社會的 展開와 曼茶羅」『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박노준, 1988, 「唐代 오대산신앙과 不空 三藏」『嶺東文化』3, 관동대 영동문화연구소.
한보광, 1992, 「信仰結社의 成立背景에 관한 硏究」『佛敎學報』29,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신동하, 1997, 「新羅 五臺山信仰의 구조」『人文科學硏究』3, 동덕여대 인문과학연구소.
김두진, 2002, 「화엄종의 분열과 화엄결사」『신라 화엄사상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김복순, 2002, 「新羅 五臺山 事蹟의 形成」『한국 고대불교사 연구』, 민족사.
윤선태, 2005, 「新羅 中代末-下代初의 地方社會와 佛敎信仰結社」『新羅文化』26,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昔義湘法師 始自唐來還 聞大悲眞身住此海邊崛內 故因名洛山 蓋西域寶陁洛伽山 此云小白華 乃白衣大士眞身住處 故借此名之 齋戒七日 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 引入崛內 參禮空中 出水精念珠一貫(給)之 湘領受而退 東海龍亦獻如意寶珠一顆 師捧出 更齋七日 乃見眞容 謂曰 於座上山頂 雙竹湧生 當其地作殿宜矣 師聞之出崛 果有竹從地湧出 乃作金堂塑像而安之 圓容麗質 儼若天生 其竹還沒 方知正是眞身住也 因名其寺曰洛山 師以所受二珠 鎭安于聖殿而去 後有元曉法師 繼踵而來 欲求瞻禮 初至於南郊水田中 有一白衣女人刈稻 師戱請其禾 女以稻荒戱答之 又行至橋下 一女洗月水帛 師乞水 女酌其穢水獻之 師覆棄之 更酌川水而飮之 時野中松上有一靑鳥 呼曰 休醍(醐)和尙 忽隱不現 其松下有一隻脫鞋 師旣到寺 觀音座下又有前所見脫鞋一隻 方知前所遇聖女乃眞身也 故時人謂之觀音松 師欲入聖崛更覩眞容 風浪大作 不得入而去 後有崛山祖師梵日 太和年中入唐 到明州開國寺 有一沙彌截左耳 在衆僧之末 與師言曰 吾亦鄕人也 家在溟州界翼嶺縣德耆坊 師他日若還本國 須成吾舍 旣而遍遊叢席 得法於鹽官[事具在本傳] 以會昌七年丁卯還國 先創崛山寺而傳敎 大中十二年戊寅二月十五日 夜夢昔所見沙彌到窓下 曰 昔在明州開國寺 與師有約 旣蒙見諾 何其晩也 祖師驚覺 押數十人 到翼嶺境 尋訪其居 有一女居洛山下村 問其名 曰德耆 女有一子 年才八歲 常出遊於村南石橋邊 告其母曰 吾所與遊者 有金色童子 母以告于師 師驚喜 與其子尋所遊橋下 水中有一石佛<舁>出之 截左耳 類前所見沙彌 卽正趣菩薩之像也 乃作簡子 卜其營構之地 洛山上方吉 乃作殿三間安其像[古本載梵日事在前 相曉二師在後 然按湘曉二師<事>(在)於高宗之代 梵日在於會<昌>之後 相<去>一百七十餘歲 故今前却而編次之 或云 梵日爲相之門人 謬妄也] 後百餘年 野火連延到此山 唯二聖殿獨免其災 餘皆煨燼 及西山大兵已來 癸丑甲寅年間 二聖眞容及二寶珠 移入襄州城 大兵來攻甚急 城將陷時 住持禪師阿行[古名希玄]以銀合盛二珠 佩持將逃逸 寺奴名乞升奪取 深埋於地 誓曰 我若不免死於兵 則二寶珠終不現於人間 人無知者 我若不死 當奉二寶獻於邦家矣 甲寅十月二十二日城陷 阿行不免而乞升獲免 兵退後掘出 納於溟州道監倉使 時郎中李祿綏爲監倉使 受而藏於監倉庫中 每交代傳受 至戊午十一月 本業老宿祇林寺住持大禪師覺猷奏曰 洛山二珠 國家神寶 襄州城陷時 寺奴乞升埋於城中 兵退取納監倉使 藏在溟州營庫中 今溟州城殆不能守矣 宜輸安御府 主上允可 發夜別抄十人 率乞升取於溟州城 入安於內府 時使介十人各賜銀一斤米五石 昔新羅爲京師時 有世<達>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imagefont李郡[按地理志 溟州無imagefont李郡 唯有imagefont城郡 本imagefont生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有imagefont靈郡 本imagefont已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imagefont李郡 未知孰是] 本寺<遣>僧調信爲知莊 信到莊上 悅(太)守金昕公之女 惑之深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己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兒早識上人於半面 心乎愛矣 未嘗暫忘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 今願爲同穴之友 故來爾 信乃顚喜 同歸鄕里 計活四十餘霜 有兒息五 家徒四壁 藜藿不給 遂乃落魄扶携 糊其口於四方 如是十年 周流草野 懸鶉百結 亦不掩體 適過溟州蟹縣嶺 大兒十五歲者忽餧死 痛哭收瘞於道 從率餘四口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 夫婦老且病 飢不能興 十歲女兒巡乞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父母爲之歔欷 泣下數行 婦乃□澁拭涕 倉卒而語曰 予之始遇君也 色美年芳 衣袴稠鮮 一味之甘 淂與子分之 數尺之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情鍾莫逆 恩愛綢繆 可謂厚緣 自比年來 衰病歲益深 飢寒日益迫 傍舍壺漿 人不容乞 千門之恥 重似丘山 兒寒兒飢 未遑計補 何暇有愛悅夫婦之心哉 紅顔巧笑 草上之露 約束芝蘭 柳絮飄風 君有我而爲累 我爲君而足憂 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 君乎予乎 奚至此極 與其衆鳥之同餧 焉<如>隻鸞之有鏡 寒棄炎附 情所不堪 然而行止非人 離合有數 請從此辭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方分手進途而形開 殘燈翳吐 夜色將闌 及旦鬢髮盡白 惘惘然殊無人世意 已厭勞生 如<飫>百年辛苦 貪染之心 洒然氷釋 於是 慚對聖容 懺滌無已 歸撥蟹峴所埋兒塚 乃石彌勒也 灌洗奉安于隣寺 還京師 免莊任 傾私財創淨土寺 懃修白業 後莫知所終 議曰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何必信師之夢爲然 今皆知其人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特未覺爾 乃作詞誡之曰 快適須臾意已閑 暗從愁裏老<蒼>顔 不須更待黃粱熟 方悟勞生一夢間 治身臧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藏 何似秋來淸夜夢 時時合眼到淸凉

낙산의 두 성인 관음·정취와 조신
옛날에 의상법사(義湘法師)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대비(大悲,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의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이곳을 낙산(洛山)이라고 이름지었다. 대개 서역(西域)에 보타락가산(寶陁洛伽山)은 일명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했는데, 이는 백의대사(白衣大士,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를 빌려 이름지은 것이다. (의상이) 재계(齋戒)한지 7일 후에 앉은 자리를 새벽 바다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가 시종하며 굴속으로 인도하였다. (의상이) 공중을 향해 예를 올렸더니, 수정(水精)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쳤다. 의상이 받들고 나와 다시 7일 동안 재계하니, 비로소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았다.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앉은 자리 위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의상법사가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여기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모시니, 그 원만한 얼굴과 고운 자질이 마치 하늘이 낸 듯하였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야 이곳이 바로 관음(觀音)의 진신(眞身)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洛山)이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보주(寶珠)를 성전(聖殿)에 모셔두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이어 여기에 와서 예를 올리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 논 가운데에 이르니,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농담 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자, 그 여인도 장난으로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는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하기를, “제호(醍醐)를 마다한 화상(和尙)아.”라고 하고는 갑자기 숨어 버리고 보이지 않았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자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하였다. 법사가 성굴(聖崛)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觀音)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그 뒤에 굴산조사(崛山祖師) 범일(梵一)이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왼쪽 귀가 없어진 한 사미(沙彌)가 여러 스님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하기를, “저도 또한 신라 사람입니다. 제 집은 명주(溟州)의 경내인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으니, 조사께서 후일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제 집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윽고 조사는 총석(叢席, 승려들이 많이 모인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얻고[이 일은 모두 본전(本傳)에 자세히 실려있다.], 회창(會昌) 7년(847) 정묘(丁卯)에 본국으로 돌아와 먼저 굴산사(崛山寺)를 세워 가르침을 전했다. 대중(大中) 12년(858) 무인(戊寅) 2월 15일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스님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하기를, “옛날에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조사와 약속을 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는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어,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翼嶺) 경내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랫마을에 살고 있어서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하였다. 여인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나이는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옆에 나가 놀았다. 아이가 어머니께 말하기를,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았다.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었는데, 꺼내어 보니 왼쪽 귀가 없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사미(沙彌)와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상(像)이었다. 이에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洛山) 위가 좋다고 하므로, 그곳에 불전 세 칸을 지어 그 보살상을 모셨다.[고본(古本)에는 범일(梵日)의 일이 앞에 썼고, 의상(義相)과 원효(元曉)의 일은 뒤에 있다. 그러나 살펴보면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두 법사의 일은 당나라 고종(高宗, 재위 650-683) 때에 있었고 범일의 일을 회창(會昌, 841-846) 이후에 있었으니 연대가 서로 170여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지금은 앞뒤를 바꾸어 순서대로 편집하였다. 혹은 범일이 의상(義相)의 문인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뒤 100여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 왔으나, 오직 관음(觀音)과 정취(正趣) 두 성인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고, 나머지는 모두 타 버렸다. 서산(西山)의 대병(大兵)이 있은 이 후 계축(癸丑)․갑인(甲寅) 연간(1253-1254)에 두 성인의 진용(眞容)과 두 보주(寶珠)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 (몽고) 군사의 공격이 몹시 급박하여 성이 장차 함락 되려하므로, 주지(住持)인 선사(禪師) 아행(阿行)[옛 이름은 희현(希玄)이다.]이 은으로 만든 합(盒)에 두 보주(寶珠)를 담아 몸에 지니고 도망가려 하자, 절의 종 걸승(乞升)이 빼앗아 이를 땅 속 깊이 묻고 맹세하기를, “내가 만일 병란에 죽는다면, 두 보주(寶珠)는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인(甲寅, 1254) 10월 22일에 이 성이 함락되어 아행(阿行)은 죽었으나 걸승(乞升)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이 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監倉使)로서 이것을 받아 감창고(監倉庫) 안에 간직해 두고, 교대할 때마다 물려받았다. 무오(戊午, 1258) 11월에 이르러 본업(本業)의 노숙(老宿) 기림사(祇林寺) 주지(住持)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가 임금께 아뢰기를, “낙산사의 두 보주(寶珠)는 국가의 신이로운 보물입니다. 양주성(襄州城)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乞升)이 성 안에 묻어 두었다가 적병이 물러가자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溟州營) 창고 안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溟州城)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사오니, 마땅히 내부(內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夜別抄) 10명을 내어 걸승(乞升)을 데리고 명주성(溟州城)에서 (두 보주를) 가져다가 어부(御府)에 안치해 두었다. 그때 심부름 간 사자(使者) 10명에게 각각 은(銀) 1근과 쌀 5석씩을 주었다. 옛날 신라(서라벌)가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世達寺)[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의 장사(莊舍)가 명주(溟州) 내리군(imagefont李郡)에 있었는데[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해 보면 명주(溟州)에 내리군(imagefont李郡)은 없다. 오직 내성군(imagefont城郡)이 있을 뿐인데, 이것은 본래 내생군(imagefont生郡)이니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 우수주(牛首州)에 속한 현으로 내령군(imagefont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내이군(imagefont已郡)으로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牛首州)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다. 여기서 말한 내리군(imagefont李郡)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본사(本寺)에서 승려 조신(調信)을 보내어 장사(莊舍)를 관리하게 했다. 조신(調信)은 장사(莊舍)에 와서 태수(太守) 김흔(金昕)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매혹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인연이 맺어지기를 빌어 온지 수 해 동안에 그 여인에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다시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그리운 정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갑자기 꿈 속에 김씨 낭자가 기쁜 얼굴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흰 이를 들어내면서 말하기를,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마음 속으로 사랑하여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딴 사람에게 시집갔던 것입니다. 이제는 한 무덤에 묻힐 반려자가 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으나,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변변치 못한 끼니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지독한 가난이 들어서 서로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草野)로 두루 다니니, 옷은 해져 몸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명주(溟州)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세 되는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우곡현(羽曲縣)[지금의 우현(羽縣)이다.]에 이르러 길가에 움집을 엮고 살았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10세 된 딸 아이가 밥을 빌러 돌아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려서 아픈 것을 호소하며 앞에 와 쓰러지니, 부모도 흐느끼며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부인이 머뭇거리면서 눈물을 닦고 갑자기 말하기를,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옷도 많고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라도 생기면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몇 자 되는 따뜻한 옷감도 당신과 나누어 입으며 함께 산지 50년에, 정(情)은 다시 없고 사랑도 얽히어 정녕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도 남에게 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집 문 앞에 걸식하는 그 부끄러움이 산과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어느 겨를에 부부 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처럼 사라졌고, 지란(芝蘭)같은 백년가약(百年佳約)도 버들가지가 바람에 날리듯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있어서 더 누가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에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여러 마리의 새가 다 함께 굶주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 잃은 난새[鸞鳥]가 되어 거울을 향하여 짝을 그리워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어려우면 버리고 좋을 때 가까이 하는 것은 인정으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나아가고 그치는 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청컨대 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라고 하니 조신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각각 아이 둘씩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아내가 말하기를, “저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라고 하였다.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이제 막 길을 떠나려는 참에 꿈에서 깨어나니, 타다 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하였다. 아침이 되자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히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다.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탐욕의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에 (관음보살의) 거룩한 모습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져 참회하여 마지않았다. 그는 돌아와서 꿈에 해현(蟹峴)에 아이 묻은 자리를 파보았더니 돌로 만든 미륵(彌勒)이 나왔다. (이를) 물에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셨다. 서울로 돌아가 장사(莊舍) 일을 그만두고 사재(私財)를 들여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백업(白業, 불도)을 닦았다. 그 후에 어떻게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논하건대, 이 전기(傳記)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調信) 스님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글을 지어 경계하고자 한다. “즐거운 한 시절도 한가롭더니, 어느덧 근심 속에 늙어버렸구나.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란 한 꿈인 줄을 깨달아라. 몸 닦는 것의 잘됨과 잘못됨은 먼저 성의(誠意)에 달렸거늘,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둑은 재물을 꿈꾸네. 어찌 가을날 맑은 밤의 꿈만으로, 이따금 눈만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르리.”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
臺山五萬眞身
<按>山中古傳 此山之署名 眞聖住處者 始自慈藏法師 初法師欲見中國五臺山文殊眞身 以善德王代 貞觀十年丙申[唐僧傳云十二年 今從三國本史]入唐 初至中國太和池邊 石文殊處 虔祈七日 忽夢大聖授四句偈 覺而記憶 然皆梵語 罔然不解 明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袈<裟>一領 佛鉢一具 佛頭骨一片 到于師邊 問何以無聊 師答 以夢所受四句偈 梵音不解爲辭 僧譯之云 呵囉婆佐曩 是曰了知一切法 達imagefont哆佉嘢 云自性無所有 曩伽呬伽曩 云如是解法性 達imagefont盧舍那 云卽見盧舍那 仍以所將袈裟等 付而囑云 此是本師釋迦尊之道具也 汝善護持 又曰 汝本國艮方溟州界有五臺山 一萬文殊常住在彼 汝往見之 言已不現 遍尋靈迹 將欲東還 太和池龍現身請齋 供養七日 乃告云 昔之傳偈老僧 是眞文殊也 亦有叮囑創寺立塔之事 具載別傳 師以貞觀十七年 來到此山 欲覩眞身 三日晦陰 不果而還 復住元寧寺乃見 文殊云 至葛蟠處 今淨嵓寺是[亦載別傳] 後有頭陁信義 乃梵日之門人也 來尋藏師憩息之地 創庵而居 信義旣卒 庵亦久廢 有水多寺長老有緣 重創而居 今月精寺是也 藏師之返 新羅 淨神大王太子 寶川孝明二昆弟[按國史 新羅無淨神寶川孝明三父子明文 然此記下文云 神龍元年開土立寺 則神龍乃聖德王卽位四年乙巳也 王名興光 本名隆基 神文之第二子也 聖德之兄孝照名理恭 一作洪 亦神文之子 神文政明字日照 則淨神恐政明神文之訛也 孝明乃孝照一作昭之訛也 記云 孝明卽位 而神龍年開土立寺云者 亦不細詳言之爾 神龍年立寺者乃聖德王也] 到河西府[亦今溟州及有河西郡是也 一作河曲縣 今蔚州非是也] 世獻角干之家留一宿 翌日過大嶺 各領千徒 到省烏坪 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 密約方外之志 不令人知 逃隱入五臺山[古記云 太和元年戊申八月初 王隱山中 恐此文大誤 <按>孝照一作昭 以天授三年壬辰卽位 時年十六 長安二年壬寅崩 壽二十六 聖德以是年卽位 年二十二 若曰太和元年戊申 則先於孝照卽位<壬>辰 已過四十五歲 乃太宗文武王之世也 以此知此文爲誤 故不取之] 侍衛不知所歸 於是還國 二太子到山中 靑蓮忽開地上 兄太子結庵而止住 是<曰>寶川庵 向東北行六百餘步 北臺南麓亦有靑蓮開處 弟太子孝明又結庵而止 各懃修業 一日同上五峰瞻禮次 東臺滿月山 有一萬觀音眞身現在 南臺麒麟山 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 西臺長嶺山 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北臺象王山 釋迦如來爲首五百大阿羅漢 中臺風盧山亦名地盧山 毗盧遮那爲首一萬文殊 如是五萬眞身一一瞻禮 每日寅朝 文殊大聖到眞如院 今上院 變現三十六種形 或時現佛面形 或作寶珠形 或作佛眼形 或作佛手形 或作寶塔形 或萬佛頭形 或作萬燈形 或作金<橋>形 或作金鼓形 或作金鐘形 或作神通形 或作金樓形 或作金輪形 或作金剛<杵>形 或作金甕形 或作金鈿形 或五色光明形 或五色圓光形 或吉祥草形 或靑蓮花形 或作金田形 或作銀田形 或作佛足形 或作雷電形 或(如)來湧出形 或地神湧出形 或作金鳳形 或作金烏形 或馬産師子形 或雞産鳳形 或作靑龍形 或作白象形 或作鵲鳥形 或牛産師子形 或作遊猪形 或作靑蛇形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各庵修道 淨神王之弟與王爭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到山迎之 先到孝明庵前呼萬歲 時有五色雲 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 排列鹵簿 將邀兩太子而歸 寶川哭泣以辭 乃奉孝明歸卽位 理國有年[記云 在位二十餘年 盖崩年壽二十六之訛也 在位但十年爾 又神文之弟爭位事國史無文 未詳] 以神龍元年[乃唐中宗復位之年 聖德王卽位四年也]乙巳三月初四日始改創眞如院 大王親率百寮到山 營搆殿堂 幷塑泥像文殊大聖安于堂中 以知識靈卞等五員 長轉華嚴經 仍結爲華嚴社 長年供費 每歲春秋 各給近山州縣倉租一百石 淨油一石 以爲恒規 自院西行六千步 至牟尼岾古伊峴外 柴地十五結 栗枝六結 坐位二結 創置莊舍焉 寶川常汲服其靈洞之水 故晩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 蔚珍國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窟神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眞詮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日窟亦無形 寶川驚異 留二十日乃還五臺山神聖窟 又修眞五十年 忉利天神三時聽法 淨居天衆烹茶供獻 四十聖騰空十尺 常時護衛 所持錫杖 一日三時作聲 遶房三匝 用此爲鐘磬 隨時修業 文殊或灌水寶川頂 爲授成道記莂 川將圓寂之日 留記後來山中所行輔益邦家之事云 此山乃白頭山之大脈 各臺眞身常住之地 靑在東臺北角下 北臺南麓之末 宜置觀音房 安圓像觀音 及靑地畫一萬觀音像 福田五員 晝讀八卷金經仁王般若千手呪 夜念觀音禮懺 稱名圓通社 赤任南臺南面 置地藏房 安圓像地藏 及赤地畫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像 福田五員 晝讀地藏經金剛般若 夜(占)察禮懺 稱金剛社 <白>方西臺南面 置彌陁房 安圓像無量壽 <及>白地畫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福田五員 晝讀八卷法華 夜念彌陁禮懺 稱水精社 黑地北臺南面 置羅漢堂 安圓像釋迦 及黑地畫釋迦如來爲首五百羅漢 福田五員 晝讀佛報恩經涅槃經 夜念涅槃禮懺 稱白蓮社 黃處中臺<眞>(如)院中 安泥像文殊不動 後壁安黃地畫毗盧遮那爲首三十六化形 福田五員 晝讀華嚴經六百般若 夜念文殊禮懺 稱華嚴社 寶川庵改創華藏寺 安圓像毗盧遮那三尊及大藏經 福田五員 長<閱>藏經 夜念華嚴神衆 每年設華嚴會一百日 稱名法輪社 以此華藏寺爲五臺社之本寺 堅固護持 命淨行福田 鎭長香火 則國王千秋 人民安泰 文<武>和平 百穀豊穰矣 又加排下院文殊岬寺爲社之都會 福田七員 晝夜常行華嚴神衆禮懺 上件三十七員齋料衣費 以河西府道內八州之稅 充爲四事之資 代代君王 不忘遵行幸矣

(오)대산의 5만 진신(眞身)
산 중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이 산을 참다운 성인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 진신(眞身)을 뵙고자 하여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때인 정관 10년 병신(636)에[『당승전(唐僧傳)』에는 12년(638)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를 따른다.] 당(唐)에 들어갔다. 먼저 중국 태화지(太和池)가의 문수보살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하였더니, 꿈에서 홀연히 대성(大聖)이 네 구절의 게(偈)를 주었다. 꿈을 깨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梵語)라 망연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갑자기 한 승려가 붉은 비단에 금점(金點)이 찍힌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한 개,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에 와서는 어찌하여 근심하는지를 물었다. 법사가 답하기를, “꿈에 받은 네 구절의 게(偈)가 범어라 이해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그것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가라파좌낭(呵囉婆佐曩)’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imagefont哆佉嘢)’는 자성(自性)은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낭가사가낭(曩伽呬伽曩)’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이해한다는 말이고, ‘달예노사나(達imagefont盧舍那)’는 곧 노사나불을 뵌다는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지고 온 가사 등을 맡기면서 부탁하기를, “이것들은 본사(本師)이신 석가세존의 도구인데, 그대가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그대의 본국(本國) 동북방 명주(溟州) 내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께서 항상 거기에 머무르고 계시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하고는 곧 사라졌다. (법사는) 영험한 유적들을 두루 찾아본 뒤 신라로 돌아오려 하였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 재(齋) 지내주기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하였다. 이에 (용이) 고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게(偈)를 풀이해 준 노승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것을 간곡히 부탁한 일은 별전(別傳,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조를 가리킴)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 17년(643) 이 산(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뵈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가 이곳이다.[역시 별전(『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에 실려 있다.] 후에 두타(頭陁) 신의(信義)는 범일(梵日)의 문인이었는데, 와서 자장법사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가 죽은 뒤 암자 역시 오래도록 폐하였다가 수다사(水多寺)의 장로인 유연(有緣)이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에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형제가[『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보천․효명 세 부자에 대한 글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다음 글에서는 신룡(神龍) 원년(705)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신룡은 곧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즉위한지 4년(705)인 을사(乙巳)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興光)이고 본명은 융기(隆基)이며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둘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형인 효조왕(孝照王, 재위 692-702)의 이름은 이공(理恭), 또는 이홍(理洪)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신문왕의 아들이다. 신문왕 정명(政明)의 자(字)는 일조(日照)이니 곧 “정신”은 아마도 신문왕 ‘정명’의 와전인 듯하다. “효명”은 곧 “효조” 또는 “효소(孝昭)”의 와전이다. 기록에서 효명이 즉위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신룡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한 것은 또한 자세한 말이 아니니, 신룡 연간에 절을 세운 사람은 성덕왕이었다.] 하서부(河西府)[또한 지금의 명주(溟州)에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혹은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는 이곳이 아니다.]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대령(大嶺)를 지나 각각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였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두 형제는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들어갈 것을 몰래 약속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고,[고기(古記, 『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는 “태화(太和) 원년(647) 무신 8월 초에 왕이 산속으로 숨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글이 크게 잘못된 듯하다. 살피건데, 효조왕 또는 효소왕은 천수(天授) 3년 임진(692)에 즉위하였는데, 그 해 나이가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702)에 죽었으니 나이가 26세였다. 성덕왕은 이 해에 즉위하였으니 22세였다. 만약 태화 원년 무신이라고 말한다면 효조왕이 즉위한 임진년보다 빠른 것이니 이미 45년이나 지난 것으로, 곧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세였다. 이로써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취하지 않는다.] 시위(侍衛)하던 자들은 따를 곳을 알지 못하여 이에 서울로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푸른 연꽃이 땅 위에 피어나니, 형 태자가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이를 보천암(寶川菴)이라고 하였다. 동북쪽으로 600여 보 가니 북대(北臺) 남쪽 기슭에도 역시 푸른 연꽃이 피어난 곳이 있어 아우 태자 효명도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며 각각 부지런히 불법을 닦았다. 하루는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예불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동대(東臺)인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었고, 남대(南臺)인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 서대(西臺)인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북대(北臺)인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 중대(中臺)인 풍로산(風盧山), 다른 이름으로 지로산(地盧山)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文殊菩薩) 진신(眞身) 등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의 진신(眞身)에게 일일이 예불을 올리니 매일 아침 인시(寅時, 3시 30분-4시30분)에 문수보살이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上院, 상원사)에 이르러서는 36가지의 형태로 변신하여 나타났는데, 어떤 때는 부처의 얼굴 형태로 나타나고, 혹은 보주(寶珠)의 형태, 혹은 부처의 눈 형태, 혹은 부처의 손 형태, 혹은 보탑(寶塔)의 형태, 혹은 만불(萬佛)의 머리 형태, 혹은 만등(萬燈)의 형태, 혹은 금교(金橋)의 형태, 혹은 금고(金鼓)의 형태, 혹은 금종(金鐘)의 형태, 혹은 신통(神通) 형태, 혹은 금루(金樓)의 형태, 혹은 금륜(金輪)의 형태, 혹은 금강저(金剛杵)의 형태, 혹은 금옹(金甕)의 형태, 혹은 금비녀의 형태, 혹은 오색광명(五色光明)의 형태, 혹은 오색원광(五色圓光)의 형태, 혹은 길상초(吉祥草)의 형태, 혹은 푸른 연꽃의 형태, 혹은 금전(金田)의 형태, 혹은 은전(銀田)의 형태, 혹은 부처의 발 형태, 혹은 뇌전(雷電)의 형태,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는 형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는 형태, 혹은 금봉황의 형태, 혹은 금까마귀 형태, 혹은 말이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닭이 봉황을 낳는 형태, 혹은 푸른 용의 형태, 혹은 흰 코끼리의 형태, 혹은 까치의 형태,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노는 멧돼지의 형태, 혹은 푸른 뱀의 형태 등이었다. 두 태자는 매번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다려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의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자 국인(國人)들이 그를 폐하고, 장군 넷을 산으로 보내 두 태자를 맞이하게 하였다. 먼저 효명암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이때 오색의 구름이 7일 동안 드리워져 덮었다. 국인들은 구름을 좇아 모두 이르러서는 의장을 벌여 열을 짓고 장차 두 태자를 맞이하여 돌아가고자 하였다. 보천은 소리내 울면서 사양하므로 이내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가 지나[기록에서 재위 20여 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죽었을 때 나이인 스물여섯이 와전되어서일 것이다. 재위는 단 10년 뿐이었다. 또한 신문왕의 동생이 왕위를 다툰 일은 『국사(國史)』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신룡 원년[곧 당(唐) 중종(中宗)이 복위한 해로, 성덕왕이 즉위한지 4년(705) 되는 해이다.] 을사 3월 초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眞如院)을 개창하였다. 대왕께서 친히 백료들을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殿堂)을 만들어 열고, 아울러 문수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건물 안에 안치하였다. 지식(知識) 영변(靈卞) 등 다섯 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매일 읽도록 하고, 이로 인하여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오래토록 공양할 비용은 매 해 봄․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현의 창(倉)에서 조(租) 100석과 정유(淨油) 1석씩을 공급하도록 하여 항상 규칙으로 삼았고,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보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니점(牟尼岾)과 고이현(古伊縣) 바깥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과 밤나무 숲 6결, 좌위(座位, 전답) 2결로써 장사(莊舍)를 세우도록 하였다. 보천은 항상 그 신령스러운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서 멈췄다.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 외기를 밤낮의 과업으로 삼았더니 굴의 신(神)이 몸을 드러내 말하기를, “나는 굴의 신이 된지 2천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의 참 도리를 들었으니 보살계(菩薩戒)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보살계를) 받고 난 다음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지니, 보천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20일을 머물고 난 뒤, 이내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왔다. 다시 도를 닦던 50년 동안 도리천(忉利天)의 신이 (하루에) 세 번 법을 들었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이 차를 다려 공양하였으며, 40명의 성중이 공중을 10척이나 날아 항상 호위하였다. 지니고 있던 석장(錫杖)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도니 이것으로 종(鐘)과 경(磬)을 삼아 때를 좇아 수행하였고, 때로는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成道)의 기별(記莂, 약속)을 주기도 하였다. 보천이 장차 입적하려고 하던 날, 뒷날 산중에서 행하는 것으로 나라에 도움을 주는 일들을 기록하여 남겼다. (기록에) 이르기를,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臺)에는 (불보살들의) 진신(眞身)이 항상 거주하는 땅이다. 청색의 방위인 동대(東臺)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대(北臺)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고,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으로는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金光明經)』․『인왕경(仁王經)』․『반야경(般若經)』․『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를 읽게 하고, 밤으로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케 하며, 이름은 원통사(圓通社)라고 칭하도록 하여라. 적색의 방위인 남대(南臺)의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금강사(金剛社)라 칭하게 하여라. 백색의 방위인 서대(西臺)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고, 원상의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와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8권의 『법화경(法華經)』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수정사(水精社)라 칭하게 하여라. 흑색의 방위에 해당하는 땅인 북대(北臺)의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고, 원상의 석가여래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五百羅漢)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백련사(白蓮社)라 칭하게 하여라. 황색의 방위에 위치한 중대(中臺)의 진여원 안에는 흙으로 빚은 문수부동(文殊不動)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36가지의 형태를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화엄경(華嚴經)』․『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화엄사(華嚴社)라 칭하여라. 보천암은 화장사(華藏寺)로 개창하고 원상의 비로자나 삼존불과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항상 『대장경』을 열람하게 하고, 밤으로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하게 하여라. 매년 화엄회(華嚴會)를 100일 동안 베풀고, 이름을 법륜사(法輪社)라 칭하여라. 이 화장사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社)로 삼아 굳게 보호하고 지키며 행실이 정결한 복전승들에게 명하여 오래토록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이 평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로울 것이다. 또한 더하여 하원(下院)의 문수갑사(文殊岬寺)를 열어 결사의 도회(都會)로 삼고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예참(華嚴神衆禮懺)을 행하게 하여라. 이상 37명의 재(齋)에 필요한 재료들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河西府)의 도(道)에 속한 여덟 주(州)의 세금으로써 네 가지 일에 드는 비용으로 충당하여라. 대대로 군왕들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일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