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 장육존상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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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 진흥왕(眞興王) 35년(574) 경주 황룡사(皇龍寺)에 조성되었던 불상

일반정보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은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로, 진흥왕 35년(574) 경주 황룡사(皇龍寺)에 조성되었던 불상이다.

전문정보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은 경주 황룡사(皇龍寺)에 조성되었던 불상으로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 삼보(三寶)로 일컬어진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 그 연혁이 전해져온다.

황룡사(皇龍寺)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14년(553)에 시작하여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에 완공되었으며 가람이 완성된 이후에도 탑상(塔像) 등이 새로 만들어지거나 수축되었다. 황룡사에 조성된 장육상에 대해서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는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불상을 조성하려했으나 실패하고 인연이 있는 땅에 가서 이루어 질 것을 기원하며 금·구리·모형 석가삼존상을 배에 띄워 보냈으니, 마침내 진흥왕 35년(574)에 장육상이 신라 땅에서 조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장육상의 무게는 35,007근인데 황금이 10,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구리 12,000근과 황금 10,136분이 들었다고 할 만큼 거구의 금동삼존불상으로 추측되며, 높이는 1장6척으로 4.5-5m 사이의 우람한 상으로 추측된다.

장육상은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5년조에 동일하게 574년 3월에 주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 세주(細註)에서는 「사중기(寺中記)」를 인용하여 진흥왕 34년(573) 10월 17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부분 진흥왕 34년(573)에 시작하여 진흥왕 35년(574)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이기백, 1986),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서 보이는 진평왕대의 연기설화와 진평왕 6년(584) 금당(金堂) 조성의 기사와 관련하여, 장육상의 완성이 574년일 경우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점은 의심스러우며 진평왕대 후반이 전제왕권의 성립기로 간주된다는 점을 들어 장육존상이 7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신종원, 1992)

장육상의 완성은 황룡사가 창건된 진흥왕 30년(569)에서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이 본존상 공백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러한 공백을 궁궐에서 사찰로 용도 변경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 장육의 석가삼존상을 최초의 본존상으로 보기도 한다.(남동신, 2001)

한편 장육상 이전에 본존상이 있었으며, 이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서처럼 인도에서 보내온 모형 석가삼존상을 잠시 모셨던 동축사(東竺寺)의 삼존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본존불이 황룡사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장육상을 고쳐 만들었다는 것이다.(이기백, 1986) 또한 용은 우리말로 “미르”라고 하며 이 “미르”는 “미륵(彌勒)”과도 연관되는 것에 착안하여, 곧 창건설화의 황룡 출현은 황룡사 창건이 미륵신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본존불 역시 미륵불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중국, 2000)

이 같은 장육존상 연기설화는 인도의 굽타양식 불상이 6세기 후반 아육왕상(阿育王像)이라는 이름하에 중국을 거쳐 신라로 전래된 사실을 반영한다는 견해가 있다.(김리나, 1997) 이러한 아육왕상 계열의 석가상을 조성한 데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의식이 작용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장육상을 조성한 진흥왕(眞興王)은 아육왕이 세 번씩이나 실패한 불상 조성을 단 한 번에 성공시킴으로써 아육왕을 능가하는 전륜성왕 군주임을 웅변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영태, 1992)

한편 아육왕상설은 선덕여왕(善德女王)대 자장(慈藏)이 신라가 불교인연의 국토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지어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장육상을 조성하던 진흥왕 당시에는 아육왕상설은 아직 생성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신동하, 2001) 또한 아육왕의 불행한 말년은 실질적으로 아육왕이 강조될 수 없는 내용으로 진평왕 6년(584)에 완성된 금당이 기존의 금당을 완전히 제거한 후 기반의 흙부터 새롭게 조성한 점을 들어, 이 시기에 석가불을 조성함으로써 기존의 신앙인 전륜성왕신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앙인 북조(北朝) 불교의 석가불신앙으로 재편하려 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즉 창건기의 황룡사는 전륜성왕신앙의 사찰로 창건되었지만, 장육존상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석가불신앙의 사찰로 변화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양정석, 2004)

참고문헌

이기백, 1986, 『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김영태, 1992, 『佛敎思想史論』, 민족사.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김리나, 1997, 『韓國古代佛敎彫刻史硏究』, 일조각.
노중국, 2000, 「新羅와 百濟의 交涉과 交流」『新羅文化』 17·18合.
남동신, 2001, 「新羅 中古期 佛敎治國策과 皇龍寺」『皇龍寺의 綜合的 考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신동하, 2001, 「新羅 佛國土思想과 皇龍寺」『皇龍寺의 綜合的 考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양정석, 2004, 『皇龍寺의 造營과 王權』, 서경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銙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第二十六白淨王 諡眞平大王 金氏 大建十一年己亥八月卽位 身長十一尺 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 王之所創] 踏石梯 二石幷折 王謂左右曰 不動此石 以示後來 卽城中五不動石之一也 卽位元年 有天使降於殿庭 謂王曰 上皇命我傳賜玉帶 王親奉跪受 然後其使上天 凡郊廟大祀皆服之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讚曰 雲外天頒玉帶圍 辟雍龍袞雅相宜 吾君自此身彌重 准擬明朝鐵作墀
하늘이 내려준 옥대[청태 4년 정유(937) 5월에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치니, 길이가 10위요, 새겨 넣은 장식이 62개였다. 이것은 진평왕(眞平王)이 하늘에서 받은 띠라고 한다. 고려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서 내고(內庫)에 두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579) 8월 왕위에 올랐는데 키가 11척이었다. 내제석궁에 행차하여[또한 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 돌계단을 밟으니 돌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들에게 보여라”고 하였으니, 성 안에 있는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즉위 원년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명하여 옥대(玉帶)를 전해주라 하였습니다.”하니 왕은 친히 꿇어앉아서 받았다.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옥대를 착용하였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장차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고 하니,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입니다.”하고 이에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찬하여 말하였다. 구름 위의 하늘이 옥대를 내리니, 임금의 곤룡포에 알맞게 둘렀구나, 우리 임금 이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엔 쇠로써 섬돌을 만들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