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랑

죽지랑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의 화랑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신라의 화랑으로, 김유신 등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하였다.

전문정보

죽지랑은 신라의 화랑으로서,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죽지랑(孝昭王代竹旨郞)조에 따르면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를 모량(牟粱)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차출하여 부역을 시키자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였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의 도움으로 득오를 데려올 수 있었다. 익선의 악행을 들은 화주(花主)는 익선을 벌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도망치자 그 아들을 대신 벌하였다.

『삼국유사』 효소왕대죽지랑(孝昭王代竹旨郞)조에 따르면 죽지랑의 이름은 죽만(竹曼), 지관(智官), 죽지랑(竹旨郞) 등 3가지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죽지랑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죽만과 죽지를 동음이기(同音異記)로 본 견해가 있다. 또한 죽지랑의 이름으로 보아 죽지령(竹旨嶺)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대-마루-고대”의 뜻을 가진 죽지령과 관련시켜 볼 때, 죽만의 만(曼)은 음차(音借) “만”, 죽지의 지(旨)는 훈차(訓借) “imagefontimagefont”로 유추되나, 당시 “만”과 “지”는 같은 독음을 나타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한편 지관은 죽지, 죽만과는 별개의 명칭으로 글자 그대로 “슬기로운 구실아치”라는 뜻으로서 죽지랑의 행적을 미화하여 붙인 한자 조어로 보았다.(황패강, 2001)

죽지랑과 익선 사이의 갈등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건 발생시점을 논함에 있어서 이견이 있다. 먼저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 입장에서 효소왕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본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이 기록은 죽지(竹旨)로 대표되는 노대화랑(老大花郞)과 익선의 갈등을 통해 통일 후 실권한 화랑과 권력을 쥔 관료들의 대결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이홍직, 1971) 또한 익선이 화랑집단의 낭도까지도 징발하여 부역시킨 것으로 보아 익선세력을 삼국통일 이후 점차 성장하고 있던 지역세력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신동흔, 1990)

그러나 만년의 죽지가 모량부의 익선에게 뇌물까지 바치며 득오의 휴가를 빌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보아 이 사건이 죽지랑 청년시기, 곧 통일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죽지랑이 익선아간보다는 하급자이고 득오급간보다는 상급자인 시기가 선덕왕 8년경(639)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죽지랑의 행적과 화랑의 주요 활동 연령을 대비해 볼 때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선덕왕대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서태수, 1971)

한편, 죽지랑이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에 기여하는 사실은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3년(649)조에 처음 보인 이후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하(下) 11년(671)조까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비록 『삼국유사』의 기사에 비해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죽지가 통일 전쟁에 공헌하였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진덕왕 5년(651)에 처음 설치된 집사부(執事部)의 장(長)인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 술종공은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를 지낸 인물로, 그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따르면 김유신과 함께 국사를 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술종공은 김유신과 함께 화백회의의 구성원이었으며, 술종공․죽지랑 집안이 김춘추․김유신 세력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한 세력이었다고 보기도 한다.(이종욱, 1986)

죽지랑의 생몰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죽지에 관한 기사에서 김유신은 대장군으로서 죽지를 비롯한 다른 장군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모두 비슷한 연배였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중에서 특히 대장군인 김유신의 나이는 10여세 정도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유신이 79세이던 문무왕 13년(673)에 죽었으므로, 이때 죽지의 나이를 60세 전후로 본다면 죽지는 진평왕 재위 중반 혹은 그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 이름이 신문왕 원년(681) 발생한 김흠돌의 난 이후로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신문왕대에 죽지가 죽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서태수, 1971)

득오곡은 죽지랑을 사모하여 모죽지랑가를 지었다. 그러나 그 지은 연대가 분명하지 않아 모죽지랑가의 제작시기에 관해서는 연구자간의 논의가 분분하다. 먼저 이 노래가 밝은 감정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죽지랑과 득오 사이의 일화가 미담으로 마무리 된 후 뿌듯한 승리감 위에서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익선으로 대표되는 지방 세력을 응징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강한 정치성을 띠고 모죽지랑가가 전승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모죽지랑가는 강한 정치성을 간절한 개인적 서정성에 용해시킨 전범적인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신동흔, 1990)

이와 달리 죽지랑 사후에 죽지랑에 대한 추모와 왕생 기원을 위해 지어졌다는 입장에서 볼 때, 모죽지랑가는 효소왕 초기에 왕권 보호와 국정 안정을 위해 힘을 기울이던 죽지랑이 돌아가자 낭도 득오가 지난날의 추억을 회고하며 지은 추모 노래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죽지랑가를 추모곡으로 볼 때, 이별에 대한 아쉬움을 담담한 어조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다분히 불교적인 색채를 지녔다고 한다.(황병익, 2007)

참고문헌

이홍직,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서태수, 1971, 「竹旨郞의 生存年代攷」『국어국문학지』10.
이종욱, 1986, 「三國遺事 竹旨郞條에 대한 一考察」『한국전통문화연구』2.
신동흔, 1990, 「慕竹旨郞歌와 죽지랑 이야기의 재해석」『관악어문연구』15.
황패강, 2001, 『향가문학의 이론과 해석』, 보광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
孝昭王代 竹旨郞[亦作竹曼 亦名智官]
第三十二孝昭王代 竹曼郞之徒 有得烏[一云谷]級干 隷名於風流黃卷 追日仕進 隔旬日不見 郞喚其母問 爾子何在 母曰 幢典牟梁益宣阿干 以我子差富山城倉直 馳去行急 未暇告辭於郞 郞曰 汝子若私事適彼則不須尋訪 今以公事進去須歸享矣 乃以舌餠一合酒一缸,<率>左人[鄕云 皆叱知言奴僕也]而行 郞徒百三十七人亦具儀侍從 到富山城問閽人 得烏失奚在 人曰 今在益宣田 隨例赴役 郞歸田 以所將酒餠饗之 請暇於益宣 將欲偕還 益宣固禁不許 時有使吏侃珍 管收推火郡能節租三十石輸送城中 美郞之重士風味 鄙宣暗塞不通 乃以所領三十石 贈益宣助請猶不許 又以珍節舍知騎馬鞍具貽之乃許 朝廷花主聞之 遣使取益宣 將洗浴其垢醜 宣逃隱 掠其長子而去 時仲冬極寒之日 浴洗於城內池中仍合凍死 大王聞之 勅牟梁里人從官者竝合黜遣 更不接公署 不著黑衣 若爲僧者 不合入鐘鼓寺中 勅史上侃珍子孫 爲枰定戶孫 標異之 <圓>測法師是海東高德 以牟梁里人 故不授僧職 初述宗公爲朔州都督使 將歸<治>所 時三韓兵亂以騎兵三千護送之 行至竹旨嶺 有一居士平理其嶺路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公赴州<治>隔一朔 夢見居士入于房中 室家同夢驚怪尤甚 翌日使人問其居士安否 人曰 居士死有日矣 使來還告 其死與夢同日矣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一軀安於塚前 妻氏自夢之日有娠 旣誕 因名竹旨 壯而出仕與庾信公爲副帥統三韓 眞德太宗文武神文四代爲冡宰 安定厥邦 初得烏谷 慕郞而作歌曰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 哭屋尸以憂音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 宿尸夜音有叱下是
효소왕대 죽지랑[또는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 죽만랑(竹曼郞)의 낭도 중에 득오(得烏)[또는 곡(谷)] 급간(級干)이 있었다.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출근하였다. 열흘 동안 보이지 않기에 낭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당전(幢典)인 모량(牟粱)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직(倉直)으로 뽑아갔는데, 빨리 가느라고 미처 낭에게 말씀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당신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이제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라고 하고, 이에 설병(舌餠)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고 하니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갔다. 낭의 무리 1백37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문지기는 답하기를,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져간 술과 떡을 대접하였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가려고 했으나 익선은 굳이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고 있었는데,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모를 아름답게 보고, 익선의 어리석은 고집과 융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또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말안장을 주니 그때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를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을 씻기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그때는 중동(仲冬)의 몹시 추운 날이었으므로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이내 얼어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칙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는 모두 쫓아내어 다시는 관서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도 종고(鐘鼓)를 단 큰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사에게 명하여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고 그를 표창하였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海東)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장차 임지로 가려 하는데, 이때 삼한에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3천 명으로 그를 호송하였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그 고개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이를 보고 찬탄하였고,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성함을 존대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다. 공이 주의 치소에 부임한 지 한 달이 더 되던 때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이튿날 사람을 보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는데, 그가 죽은 날이 꿈꾸던 바로 그날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불 한 구를 만들어 무덤 앞에 봉안하였다. 부인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부수(副帥)가 되어 유신공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였고, 진덕(眞德)․태종(太宗)․문무(文武)․신무(神武)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간 봄 그리워하매 못 살으사 울어 설워하더이다. 애달픔 나토시던 모습이 해 거듭하는 즈음에 가이더이다. 눈 돌이킬새 만나 뵙기 어찌 지으오리까. 낭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 다봊 마을에 잘 밤 있사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