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

분류 문학 > 국가 > 일본

기본정보

7세기 중반 이후 사용된 왜(倭)의 국호(國號)

일반정보

왜인(倭人)은 당(唐) 이전까지 자신들을 왜국(倭國) 혹은 왜(倭)로 불렀다. 그러나 6세기 중반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통해 왜(倭)나 대화(大和)와 구분하고 대외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마한조에서 일연이 언급한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는 신라 진평왕 대의 승려 안홍(安弘, 599-640)의 저술이거나 그의 전기(傳記)로 이해된다. 『논어정의』와 『해동안홍기』를 비교하면 구이(九夷)의 왜인(倭人)이 구한(九韓)의 일본(日本)으로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왜인의 나라를 왜국(倭國)이라 불렀는데 어느 시기엔가 일본(日本)으로 바뀐 것이다.

왜국(倭國)에서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변경한 시기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수서(隋書)』권81 열전46 왜국(倭國)전에 따르면 왜가 중국에게 보낸 국서에 “대업(大業) 3년(607)... 해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에 천자가 안녕하신지 글을 보낸다.(大業三年 ... 日出處天子致書 日沒處天子無恙)”라고 되어 있다. “해 뜨는 곳(日出處)”은 곧 일본의 어원이 된다. 국호의 변경은 『신당서(新唐書)』에 전하고 있다. 『신당서』 권220 열전145 일본전에 따르면 함형 원년(670)에 당나라에 간 왜의 사신이 “왜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워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咸亨元年 遣使賀平高麗 後稍習夏音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 國近日所出以爲名)”고 한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전하는데,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670)조에 따르면 “왜국(倭國)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 자체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라는 국호는 670년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5 대화(大化) 원년(645)조에 따르면, 고구려에 보내는 조서에 “명신인 천하를 다스리는 일본천황(明神御宇 日本天皇)”이라고 하였다.『일본서기』가 사료로서 많은 문제점이 있어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6세기 중반 다이카개신(大化改新) 이후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는 일본이라는 국호를 정하기 이전에 “야마토”라는 이름으로 나라 전체를 가리키고 이것에 왜(倭), 대왜(大倭), 대화(大和) 등의 한자를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다이카개신으로 개혁이 일어나자 야마토와 구분하고 대외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본서기』 편찬 이후로 이해되고 있다.(井上淸, 1977)

한편, 일본이 7세기 중반 다이카개신 후에 사용된 용어라면, 7세기 전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의 기사가 문제될 수 있다. 이 책이 신라 시대에 편찬되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구한(九韓)으로 열거된 나라들이 후대에 써진 것이거나 안홍이 구한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주석을 붙인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신종원, 1998)

참고문헌

井上淸, 1977, 『日本の歷史』, 岩波書店.
신종원, 1998, 『신라 최초의 고승들』, 민족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마한)
馬韓
魏志云 魏滿擊朝鮮 朝鮮王準率宮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開國 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 赫世勃興 於是 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遠云 馬韓麗也 辰韓羅也 [據本紀 卽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 以王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幷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 以馬韓爲百濟者 蓋誤濫也 麗地自有馬邑山 故名馬韓也] 四夷九夷九韓穢貊 周禮職方氏掌四夷 九貊者 東夷之種 卽九夷也 三國史云 溟州 古穢國 野人耕田,得穢王印獻之 又春州 古牛首州 古貊國 又或人云 今朔州 是貊國 或平壤城爲貊國 淮南子注云 東方之夷九種 論語正義云 九夷者 一玄菟 二樂浪 三高麗 四滿飾 五鳧臾 六素家 七東屠 八倭人 九天鄙 海東安弘記云 九韓者 一日本 二中華 三吳越 四乇羅 五鷹遊 六靺鞨 七丹國 八女眞 九穢貊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은 궁인과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했다.”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世)가 발흥하였으며, 이즈음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라고 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기원전 57)에 일어나고, 고구려는 그 후 갑신(기원전 37)에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東明)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아울렀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더러 금마산(金馬山)을 인정하여 마한이 백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으므로 마한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사이(四夷)는 구이(九夷) 구한(九韓) 예맥(穢貊)이니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하였다고 하는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으로 곧 구이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에는 “명주는 옛 예국인데 야인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인장을 얻어 바치었다.”고 하였다. 또 “춘주는 옛 (고구려 때의) 우수주로서 옛 맥국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오늘날의 삭주는 맥국이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다.”고 하였다. 『회남자(淮南子)』의 주에는 “동방의 오랑캐는 9종족이다.”고 하였으며,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는 1 현도(玄菟), 2 낙랑(樂浪), 3 고려(高麗), 4 만식(滿飾), 5 부유(鳧臾), 6 색가(素家), 7 동도(東屠), 8 왜인(倭人), 9 천비(天鄙)이다.”라고 하였고,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는 “구한(九韓)은 1 일본(日本), 2 중화(中華), 3 오월(吳越), 4 탁라(乇羅), 5 응유(鷹遊), 6 말갈(靺鞨), 7 단국(丹國), 8 여진(女眞), 9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