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국

이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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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현재 경상북도 청도군 지방에 위치했던 소국(小國)

일반정보

현재 경상북도 청도군 지방에 세력이 있었던 고대의 소국(小國)이다. 신라에 편입되어 이서군(伊西郡)이 되었다가 고려 때 고쳐 청도군(淸道郡)이 되었다.

이서국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경상북도 청도군 지방에 있었던 고대의 소국(小國)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이서국조에서는 “노례왕 14년(37)에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했다. 운문사(雲門寺)에서 예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를 보면 정관(貞觀) 6년 임진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가 밭을 바쳤다고 하였는데, 금오촌(今郚村)은 지금 청도(淸道), 즉 청도군은 옛 이서군(伊西郡)이다.(弩禮王十四年 伊西國人來攻金城 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 貞觀六年壬辰 伊西郡今郚村零味寺納田 則今郚村 今淸道地 卽淸道郡 古伊西郡)”라고 하였다.

이서국의 금성 공격에 관한 기사는 이외에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죽엽군조와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14년(297)조에도 실려있다. 그러나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한 시기가 『삼국유사』 이서국조에서는 노례왕 14년(37)인 반면 다른 기사에서는 유례이사금 14년(297)으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다른 두 기사를 살펴보면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죽엽군조에서는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를 설명하는 점,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14년조에서는 이서국을 이서고국(伊西古國)이라 표기한 점,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이라 쓴 점에만 차이가 있을 뿐 두 기사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두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제14대 유례왕 때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하여 신라측 군사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홀연히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이들이 나타나 함께 적을 무찌르도록 도와준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으나,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있음을 보고, 이것이 미추왕의 음덕(陰德)인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삼국유사』 권1 기이1 이서국조와 미추왕죽엽군조, 그리고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14년(297)조의 기록이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서국이 금성을 2번 공격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제3대 노례왕과 제14대 유례왕을 혼동하여 이서국의 침공이 두 번 있었던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삼노례왕(第三弩禮王)조에서는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혹은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한다].(朴弩禮尼叱今[一作儒禮王])”고 하고,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 이사금 즉위년조에도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고기(古記)에는 제3대와 제14대 두 왕의 이름을 같이하여 유리(儒理)를 또는 유례(儒禮)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儒禮尼師今 立 [古記第三第十四 二王同諱儒理 或云儒禮 未知孰是])”라고 전한다. 즉, 두 왕의 이름은 이전부터 혼동되었으므로, 한번 있었던 이서국의 공격을 두 왕대에 모두 일어난 것으로 착오하여 기록했다는 것이다.(三品彰英, 1975)

반면에 앞에서 살핀 이서국의 침공이 노례왕과 유례왕 때 모두 이루어졌다고 본 연구도 있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14년(297)조에서 신라를 침공한 것이 이서고국(伊西古國)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 때의 이서고국의 공격은 그 이전에 해체된 적이 있던 국의 토착세력에 의한 반격이라고 보았다. 이는 『강역고(疆域考)』에서 청도로 비정되는 마두성과 가소성(가성)이 파사이사금 8년(87)에 축조되는 것으로 보아 1세기 말에 이서국이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왔다고 보기 때문이다.(박대재, 2006)

옛 이서국이 위치했던 청도군은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으로 비정된다. 이서군의 연혁에 관하여 다른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양주 대성군조에 청도군이 언급된다. 그 기록에 “대성군(大城郡)은 본래 구도성(仇刀城)경역 안의 솔이산성(率伊山城)·가산현(茄山縣)[또는 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하였다.]·오도산성(烏刀山城) 등의 세 성이었다. 지금은 청도군(淸道郡)에 합쳐져 속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내용을 보면 대성군이 청도군으로 합쳐진 것으로 보이므로 이서군→대성군→청도군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대성군을 옛 이서국이 있던 지역과 연결시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 신라종묘지제(新羅宗廟之制)조에서는 “오악(五岳) 동쪽은 토함산(吐含山)[대성군(大城郡)]이다.”라고 전하여 토함산이 대성군에 있음을 전하는데, 위치로 보아 대성군이 지금의 청도군의 전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한다. 이런 혼란에 대해 일찍이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 권8 경상도 청도 연혁조에서 “『삼국사』 지리지에 오악 등 삼현을 합하여 대성군으로 삼았다는 것은 잘못이다.(三國史地理志 以烏岳等三縣合爲大城郡者誤)”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권1 기이1 이서국조에서도 이서국이 멸망하자 이서군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후 청도군으로 개명되기 전 대성군으로 불리었다는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대성군 관련 기록은 찬자의 착오였다고 이해하였다.(이형우, 2000)

한편, 이서국을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30 한(韓)조의 변진제국(卞辰諸國) 중 하나와 연결하여 보기도 한다. 변진의 우유국(優由國)은 오야, 오례, 오혜와 동음이므로 오야산현(烏也山縣)은 바로 우유국의 중심소재지였으며 이서국도 우유국의 별칭으로 청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이병도, 1976) 반면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양주 대성군(大城郡)조에서 구도성(仇刀城)이 뒷날 청도군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구도성은 대성이므로 “대성-큰기-근기”로 추측하여 변진의 근기국(勤耆國)이 이서국의 전신(前身)이라고 하였다.(천관우, 1991)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上, 塙書房.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천관우, 1991, 『加耶史硏究』, 일조각.
이형우, 2000, 『新羅初期國家成長史硏究』, 영남대학교 출판부.
박대재, 2006,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이서국)
伊西國
弩禮王十四年 伊西國人來攻金城 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 貞觀六年壬辰 伊西郡今郚村零味寺納田 則今郚村 今淸道地 卽淸道郡 古伊西郡
이서국(伊西國)
노례왕 14년(37)에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했다. 운문사(雲門寺)에서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를 보면 정관(貞觀) 6년 임진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가 밭을 바쳤다고 하였는데, 금오촌(今郚村)은 지금 청도(淸道), 즉 청도군은 옛 이서군(伊西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