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대

이견대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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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만파식적을 얻은 곳
지 정 명 : 이견대(利見臺)
지정번호 : 사적 제159호
위 치 : 경북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

일반정보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따르면 이견대는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곳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따르면 이견대(利見臺)는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이후 신문왕은 이곳에 행차하였다가 감은사를 향해 떠내려오는 산으로 들어가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을 얻었다.

이견대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 권71 악지(樂志) 삼국속악(三國俗樂) 신라(新羅)의 이견대조에서도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 부자는 헤어져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상봉하게 되자 대(臺)를 쌓아서 부자상봉의 기쁨을 다하고 이를 지어 노래로 부르고 그 대를 이견이라고 불렀다. 이는 대개 주역(周易)의 이견대인(利見大人)에서 취한 뜻이다. 왕의 부자가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할 까닭이 없는데, 이웃나라에서 만났거나 혹은 질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世傳 羅王父子久相失 及得之 築臺相見 極父子之懽 作此以歌之 號其臺曰利見 盖取易利見大人之意也 王父子無相失之理 或出會隣國 或爲質子 未可知也)”라고 하여 이곳에서 신라왕의 부자가 상봉하였으며, 그 기쁨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이곳을 이견대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6 악고(樂考)17 속부악(俗部樂)1 신라악조에도 전하고 있다.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의 내용을 통해 이견대는 왕의 부자가 상봉한 곳이며, 이를 기뻐하여 이견대가(利見臺歌)를 지어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조의 내용에 근거하여,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고 기뻐하여 그 기념으로 이견대를 축조하고 “이견대가”를 지었다고 보기도 한다.(박노춘, 1969) 이외에도 이견대를 조선시대에 세운 건물로 보고 대왕암을 바라보기 위한 전망대로써 축조했다고 이해한 견해도 있다.(김복순, 1996)

한편 이견대라는 이름은 『고려사』를 통해 『주역(周易)』 건괘(乾卦) 제1의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이라고 한다.(문화재관리국, 1977)

현재의 이견대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건물지가 확인되어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1979년에 지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견대의 위쪽인 대본초등학교 언덕 뒷산을 원래의 이견대 자리로 본 견해도 있다.(황수영, 1996)

참고문헌

박노춘, 1969, 「利見臺雜考」『文湖』5.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文化遺蹟總覽』中.
김복순, 1996, 「『新增東國與地勝覽』卷21 慶州府 譯註」『新羅文化』13.
황수영, 1996, 「신라 낭산의 능지탑에 대하여」『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7.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
萬波息笛
第三十一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爲聖考文武大王 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 排金堂砌下 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 旋繞之備 蓋遺詔之葬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明年壬午五月朔[一本云 天授元年 誤矣] 海官波珍<飡>朴夙淸奏曰 東海中有小山 浮來向感恩寺 隨波往來 王異之 命日官金春質[一作春日]占之 曰 聖考今爲海龍 鎭護三韓 抑又金公庾信 乃三十三天之一子 今降爲大臣 二聖同德 欲出守城之寶 若陛下行幸海邊 必得無價大寶 王喜 以其月七日 駕幸利見臺 望其山 遣使審之 山勢如龜頭 上有一竿竹 晝爲二 夜合一[一云 山亦晝夜開合如竹] 使來奏之 王御感恩寺宿 明日午時 竹合爲一 天地振動 風雨晦暗七日 至其月十六日 風霽波平 王泛海入其山 有龍奉黑玉帶來獻 迎接共坐問曰 此山與竹 或判或合如何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王驚 以五色錦彩金玉酬賽之 勅使斫竹出海 時山與龍忽隱不現 王宿感恩寺 十七日到祗林寺西溪邊 留駕晝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 皆眞龍也 王曰 汝何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 駕還 以其竹作笛 藏於月城天尊庫 吹此笛 則兵退病愈 旱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至孝昭大王代天授四年癸巳 因失禮郞生還之異 更封號曰萬萬波波息笛 詳見彼傳
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며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에 있는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으로 짓다가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를 파헤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내었으니,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이름하였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이듬해 임오(壬午, 682) 5월 초하루에[어떤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690)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기를, “동해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또는 춘일(春日)]에게 점을 치도록 하였다. 그가 아뢰길 “돌아가신 부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보배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했더니,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 같고 그 위에는 한 줄기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일설에는 산도 역시 밤낮으로 갈라지고 합침이 대나무와 같았다고 한다.] 사자가 와서 그것을 아뢰니, 왕이 감은사로 가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천지가 진동하며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도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흑옥대(黑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이 영접하여 함께 앉아서 묻기를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용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으니, 이 대나무라는 물건은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셨는데, 두 성인이 같은 마음으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를 내어 저를 시켜 이를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놀라서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니 이 때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祇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즉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라고 물으니 태자가 아뢰기를 “쪽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보면 보이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왼쪽의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 하였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대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癸巳, 693)에 실례랑(失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로 해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봉하여 이름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