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국

장산국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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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지금의 부산 동래지역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옛 지명

일반정보

장산국은 지금의 부산 동래지역으로 추정되며, 『삼국유사(三國遺事)』 영축사(靈鷲寺)조에서는 동래현 혹은 내산국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영축사(靈鷲寺)조를 살펴보면 신라 제 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영순(永淳) 2년(683) 계미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들판에서 머무르며 쉬었다고 한다. 여기서 충원공이 온천을 즐긴 지역으로 장산국이 등장하고 있다.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장산국과 관련된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경상도 동래현 건치연혁조에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동래는 옛날의 장산국(萇山國) 혹은 내산국(萊山國)이며, 신라가 점령한 뒤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고 한다. 그 후에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顯宗)이 울주(蔚州)에 예속시켰다고 했다. 즉, 장산국은 거칠산으로 개명이 되었고, 이 거칠산이 현재의 동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장산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해운대 근처에 장산이 있으며 또한 온천도 존재함을 들어 『삼국유사』 영축사조에 등장하는 장산국이 해운대 장산 근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경상도 동래현 산천조에 등장하는 온정(溫井)과 관련된 기록도 주목된다. 이에 따르면 동래현의 북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온정이 있는데 그 온도는 닭도 익힐 수 있는 정도이며, 병을 지닌 사람이 목욕만 하면 곧 바로 낫는다고 하였다. 또한 신라 때에 왕이 여러 번 여기에 오곤 하여 돌을 쌓고 네 모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웠는데, 그 구멍이 아직껏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라 온정의 위치를 동래 즉 지금의 온천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근열, 2008)

참고문헌

이근열, 2008, 「동래의 연원과 그 말밑」『韓國民族文化』31,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영축사)
靈鷲寺
寺中古記云 新羅眞骨第三十一主神文王代 永淳二年癸未[本文云元年誤] 宰相忠元公 萇山國[卽東萊縣 亦名萊山國]溫井沐浴 還城次 到屈井驛桐旨野駐歇 忽見一人放鷹而逐雉 雉飛過金岳 杳無蹤迹 聞鈴尋之 到屈井縣官北井<邊> 鷹坐樹上 雉在井中 水渾血色 雉開兩<翅> 抱二雛焉 鷹亦如相惻隱 而不敢攫也 公見之惻然有感 卜問此地 云可立寺 歸京啓於王 移其縣於他所 創寺於其地 名靈鷲寺焉

영축사
절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신라 진골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대 영순(永淳) 2년 계미(683)에[본문에 원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곧 동래현(東萊縣)이니 또는 내산국(萊山國)이라 이른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들판에 머무르며 쉬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매를 놓아 꿩을 쫓게 했는데, 꿩은 날아서 금악(金岳)을 지나갔다. 어두워서 종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방울소리를 듣고 그것을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아 북쪽 우물가에 이르렀다.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었는데 물이 핏빛으로 흐려졌다. 꿩이 두 날개를 열어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으니 매도 또한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지 함부로 움켜쥐지 않았다. 공(公)이 그것을 보고 측은한 느낌이 있어 이곳에 대하여 점을 쳐서 물었더니,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어, 그 현의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에 절을 지으니 이에 영축사(靈鷲寺)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