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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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일반정보

신라삼보(新羅三寶)는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象),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천사옥대(天賜玉帶) 등 신라의 세 가지 보물을 가리킨다.

전문정보

신라삼보(新羅三寶)는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象),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천사옥대(天賜玉帶) 등 신라의 세 가지 보물을 가리킨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조와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서는 고려(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하였으나, 신라에는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象),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 등 삼보(三寶)가 있어 침범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모략을 중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5년(921)조에도 고려(高麗)로 파견되었던 신라 사신 김율(金律)이 신라 삼보와 관련하여 경명왕에게 보고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고려왕 왕건(王建)은 김율에게 신라에는 소위 장육존상(丈六尊象), 구층탑(九層塔), 성대(聖帶)라고 일컫는 삼보(三寶)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성대(聖帶)도 지금까지 남아 있느냐고 물었는데 김율이 이 질문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교에서 삼보(三寶)는 일반적으로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귀의처가 되는 불(佛)·법(法)·승(僧)을 말한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5년(528)조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전하는데, 향(香)은 향기를 통해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하게 하는 것이며,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고, 삼보가 곧 불타(佛陀), 달마(達摩), 승가(僧伽)라고 부연하고 있다. 여기서 설명된 불타, 달마, 승가의 삼보 중 불타는 “깨달은 자”라는 뜻의 범어 “Buddha”의 음역(音譯)이고, 달마는 부처님이 설법한 사상 또는 진리를 뜻하는 “Darma”의 음역으로 “법”으로 의역되며, 승가는 “Shanga”의 음역으로 불교수행을 하는 집단 또는 개인 승려를 뜻한다.(塚本隆善 외, 1980)

신라삼보는 이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서 개연(開演)한 것으로, 이는 단순한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종교적 관념을 배경으로 한 현세적(現世的) 호국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정중환, 1973)

신라삼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象)은 경주 황룡사(皇龍寺)에 조성되었던 불상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 의하면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불상을 조성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인연이 있는 땅에 가서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며 금과 구리와 모형 석가삼존상을 배에 띄워보냈으니, 마침내 진흥왕 35년(574) 신라 땅에서 조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진흥왕은 장육존상 조성을 통해 자신의 위신을 더욱 높이 세우고 이를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고 볼 수 있다.(김영태, 1992)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역시 경주 황룡사(皇龍寺)에 조성되었던 탑으로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 의하면 자장(慈藏)의 건의로 선덕왕(善德王) 12년(643)에 짓기 시작하여 선덕왕(善德王) 14년(645)에 완성되었다.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으로 추정되며, 왕족인 용춘(龍春)에게 감독을 맡겨 탑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탑의 조성이 국가적 관심 속에서 진행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役事)는 당시 여왕이 다스린다고 하여 업신여기던 풍조와 신라 선덕왕(善德王) 11년(647) 백제의 침략으로 인해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며, 국가를 수호하고 나아가 통일 의지를 나타낸 노력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남동신, 2001)

천사옥대(天賜玉帶)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眞平王) 원년(579)에 천사(天使)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주었다는 옥대(玉帶)로,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0년(937)조에서는 금을 새겨서 옥을 박아 만든 네모난 판형 62과(銙)를 연결한 요대(腰帶)로 길이가 10위(圍)였다고 전한다. 옥대를 전해 준 “천사(天使)”는 불교의 제석(帝釋)(안지원, 1997), 혹은 전통적인 천(天) 관념으로 이해되며 진평왕은 이들에 의해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채미하, 2008)

그러나 신라삼보는 신라 전시기를 통해 호국보(護國寶)로 존숭되었던 것이 아니라 신라 통일 이후 그 기능이 약화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까닭으로는 우선, 황룡사장육존상의 경우 호국보(護國寶)로서 기여한 구체적인 사료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천사옥대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조에서 진평왕(眞平王)이 돌아가시고 난 뒤 남고(南庫)에 보관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왕들이 몸에 착용하고 다니지는 않은 까닭에 후대 왕들의 인식에서 옥대는 차차 사라져 갔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중대 왕권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신문왕(神文王)대에 새로운 국보로 만들고 있으며, 또한 중고의 천사옥대가 아닌 흑옥대(黑玉帶)를 새롭게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대 무열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신라 중고기의 불교적인 정치이념에 의한 삼보를 신라 중대의 유교이념의 보물로 새로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다.(김상현, 1999)

그러나 중고기의 삼보와 중대의 보물은 나뉘어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이는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5년(921)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신라 하대에서도 여전히 천사옥대가 왕권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신라 중대의 보물로 상징되는 만파식적 설화가 파생되는 연대도 중대의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대가 아니라 중고기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대부터였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신종원, 2007)

참고문헌

정중환, 1973, 「新羅聖骨考」『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신구문화사.
塚本隆善 외, 1980, 『望月佛敎大辭典』2, 世界聖典刊行協會.
김영태, 1992, 「皇龍寺丈六尊像의 緣起說話」『佛敎思想史論』, 민족사.
안지원, 1997, 「新羅 眞平王代 帝釋信仰와 王權」『歷史敎育』63.
김상현, 1999, 「新羅三寶의 불교사상적 의미」『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남동신, 2001, 「新羅 中古期 佛敎治國策과 皇龍寺」『皇龍寺의 綜合的 考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신종원, 2007, 「신라의 세 보물과 만파식적·거문고」『일연과 삼국유사』, 신서원.
채미하, 2008, 「신궁제사와 중고기 왕권」『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銙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第二十六白淨王 諡眞平大王 金氏 大建十一年己亥八月卽位 身長十一尺 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 王之所創] 踏石梯 二石幷折 王謂左右曰 不動此石 以示後來 卽城中五不動石之一也 卽位元年 有天使降於殿庭 謂王曰 上皇命我傳賜玉帶 王親奉跪受 然後其使上天 凡郊廟大祀皆服之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讚曰 雲外天頒玉帶圍 辟雍龍袞雅相宜 吾君自此身彌重 准擬明朝鐵作墀

하늘이 내려준 옥대[청태 4년 정유(937) 5월에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치니, 길이가 10위요, 새겨 넣은 장식이 62개였다. 이것은 진평왕(眞平王)이 하늘에서 받은 띠라고 한다. 고려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서 내고(內庫)에 두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579) 8월 왕위에 올랐는데 키가 11척이었다. 내제석궁에 행차하여[또한 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 돌계단을 밟으니 돌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들에게 보여라”고 하였으니, 성 안에 있는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즉위 원년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명하여 옥대(玉帶)를 전해주라 하였습니다.”하니 왕은 친히 꿇어앉아서 받았다.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옥대를 착용하였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장차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고 하니,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입니다.”하고 이에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찬하여 말하였다. 구름 위의 하늘이 옥대를 내리니, 임금의 곤룡포에 알맞게 둘렀구나, 우리 임금 이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엔 쇠로써 섬돌을 만들까 하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
皇龍寺九層塔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 感文殊授法[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是天竺刹利種王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 故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 泣血而退 經由中國太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藏答曰 求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 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 歸鄕 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 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福 予亦報之德矣 言已 遂奉<玉>而獻之 忽隱不現[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 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一云龍樹]幹蠱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 及太和寺塔 以副池龍之請[太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也 皇龍丈六 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遂寢其謀 周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貞觀十九年乙巳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六月 霹靂[寺中古記云 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 無戊戌] 第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顯>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 第五重成 又<獻>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二十五>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宇皆災

황룡사구층탑
신라 제 27대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즉위 5년인 정관(貞觀, 627-649)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서쪽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주는 법을 받아 감응하였다.[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전한다.] 문수보살이 또 말하기를, “너희나라 왕은 천축(天竺) 찰리종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법문(法文)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민(萬民)이 화평한 것이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자장(慈藏)은 이것이 바로 대성(大聖)이 변화한 것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법사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문득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와서 묻기를,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라고 하니 자장(慈藏)이 대답하기를, “보리(깨달음)를 구하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절을 하고 또 묻기를,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왜인(倭人)과 접해있으며, 또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적들이 어지러우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으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이 까닭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고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자장(慈藏)이 묻기를, “고국에 돌아가면 장차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말하기를, “황룡사(皇龍寺)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해 질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남쪽 가에 정사(精舍)를 지어 나의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나 역시 그 은덕을 갚겠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옥을 바치고는 홀연히 형체를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절 기록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圓香) 선사의 처소에서 탑 세울 까닭을 받았다고 한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왕(善德王)이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백제로부터 공장(工匠)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으로써 백제에 (공장을) 청하였다. 아비지(阿非知)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일을 주관하여 소장(小匠) 2백명을 인솔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공장(工匠)은 꿈에서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工匠)은 마음 속으로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해지는 가운데 늙은 승려 한 명과 장사(壯士) 한 명이 금당 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승려와 장사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찰주기(刹柱記)」에서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이고, 그 이하는 1백 83척이다.”라고 하였다. 자장(慈藏)이 오대산(五臺山)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그(황룡사구층탑) 기둥 속과 아울러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태화사(太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로써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부합하였다.[태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후 천지가 태평해지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이 후에 고려(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황룡사의 장육존상과 9층탑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이름이니, 드디어 그 모략을 중지하였다. 주(周)나라에 9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북방을 엿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이다. 찬한다. “귀신이 부축한 듯 서울을 막아 지키니, 휘황한 금색과 푸른색의 대마루는 날아갈 듯, 올라서 굽어볼 제 9한(九韓)만 항복하랴, 천하라도 평정할 것을 이제야 알겠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신라 제 27대에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9한(九韓)이 침노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日本)이요, 제2층은 중화(中華)요, 제3층은 오월(吳越)이요, 제4층은 탁라(托羅)요, 제5층은 응유(鷹遊)요, 제6층은 말갈(靺鞨)이요, 제7층은 단국(丹國)이요, 제8층은 여적(女狄)이요,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 또 『국사(國史)』와 절의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계유(553)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 19년 을사(645)에 탑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제 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즉위 7년 성력(聖曆) 원년 무술(698) 6월에 벼락을 맞아[절의 고기에서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때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때는 무술년이 없다.] 제 33대 성덕왕 때의 경신년(720)에 다시 탑을 수축하였으며,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742-765) 때인 무자(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다. 본조(本朝,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아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13년 신유(1021)에 네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으며, 또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아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갑진년(1064)에 다섯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다. 또 헌종(獻宗, 재위 1094-1095)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肅宗, 재위 1095-1105)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수축하였으며, 또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25년(1238) 무술 겨울에 서산(西山)의 병화(兵火, 몽고의 침입)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타버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