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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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경주 분황사와 황룡사지 사이에 해당하는 지명 혹은 건물

일반정보

경주 분황사와 황룡사지 사이에 해당하는 궁궐의 명칭이나 습지나 원지의 명칭이거나 혹은 용신제를 거행한 장소를 지칭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3 아도기라(阿道基羅)에서는 불법이 전해지기 이전 시기[前佛時代]의 일곱 개의 절터[七處伽藍]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첫째는 금교(金橋)의 동쪽 천경림(天鏡林)-흥륜사(興輪寺), 둘째 삼천기(三川岐)-영흥사(永興寺), 셋째 용궁(龍宮)의 남쪽-황룡사(皇龍寺), 넷째 용궁의 북쪽-분황사(芬皇寺), 다섯째 사천미(沙川尾)-영묘사(靈妙寺), 여섯째 신유림(神遊林)-천왕사(天王寺), 일곱째 서청전(婿請田)-담엄사(曇嚴寺)가 확인된다. 여기서 용궁의 남쪽에 황룡사가 있으며, 용궁의 북쪽에 분황사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기록에 의하면 용궁은 분황사와 황룡사 사이의 어느 지점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한편 『삼국유사』 권3 탑상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조에는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및 제가(諸家)들의 전기를 인용하여, 신라의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고 하였다. 그 곳은 곧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절터이고, 지금 황룡사의 지역은 일곱 가람의 하나라고 하여 역시 용궁의 남쪽에 황룡사가 위치하고 있다는 동일한 내용을 전하며 동시에 월성의 동쪽에도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용궁은 월성의 동쪽, 분황사의 남쪽, 황룡사의 북쪽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향의 해석에 있어서 용궁의 위치나 그 성격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우선 용궁(龍宮)의 “궁(宮)”의 용어는 왕궁의 하나이거나 중요한 왕족의 거처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직관지에서는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 동궁(東宮), 영창궁(永昌宮), 영명궁(永明宮), 월지궁(月池宮) 등의 건물들이 확인되며, 발굴조사를 통해서 궁(宮)자가 새겨진 기와편도 확인되었다.(국립경주박물관, 2002) 용궁도 이들 이외의 하나의 궁으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혹은 이들 중 어느 궁궐의 별칭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삼국사기』 권39 잡지8 직관 중에서 동궁의 소속 관아로 월지전(月池典), 월지악전(月池嶽典)이 등장하고 있으므로, 동궁의 별칭이 월지궁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분황사와 황룡사 사이의 140m정도 되는 공간에 궁이라고 불리는 정도의 규모있는 건물이 들어서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강종훈, 1989)

한편 용궁을 황룡사와 분황사의 사이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서 용궁을 궁궐이 아니라 다른 지점으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 초기의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황룡사의 서북쪽에 있는 논을 용궁으로 파악한 것인데, 용이 물속에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습지를 이루고 있는 경작지의 연못의 자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김정기, 1980) 이렇게 용궁과 물을 관련시킨 견해는 주목되지만, 이후의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지 일대는 늪지대를 매립하고 건물을 만든 곳이 확인되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1984) 즉, 황룡사 전체가 과거의 습지에 해당하며, 현재 경작지를 기준으로 한 비정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5 명랑신인(明朗神印)조에서는 명랑이 당에 갔다가 돌아올 때, 해룡(海龍)의 청에 의하여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즉, 용궁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바다 혹은 큰 연못이 연상되는데, 황룡사지 일대가 원래 늪지대였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칠처가람이 천경림, 삼천기, 사천미, 신유림, 서청전으로 숲, 내, 밭 등의 자연물을 기준으로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용궁은 황룡사가 건립되기 이전에 있던 저습지를 지칭하던 용어로 파악한 견해가 나왔다.(강종훈, 1989) 이와는 달리 용궁을 특정한 지점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즉 말 그대로의 연못일 가능성이 높아 용궁이라는 용례는 바로 연못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박방룡, 2001)

한편 분황사 동쪽편에 이웃한 지점에서 구황동 원지유적(九黃洞 苑池遺蹟)을 통해서 만약 용궁을 분황사의 남쪽에 해당하고 황룡사의 북쪽으로 범위를 국한한다면, 이 유적이 용궁과 관련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용궁의 동쪽 구역이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구황동 원지유적의 남쪽에 이어진다면, 위치상 이 곳이 용궁일 가능성을 전혀 배재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8)

이처럼 용궁의 성격과 위치를 용과 물과의 관계로 설명하려는 연구들과 달리, 신앙과 제의의 측면에서 접근한 연구도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조에는 『국사(國史)』를 인용하여 진흥왕(眞興王) 즉위 14년 개국(開國) 3년 계유(癸酉, 553) 2월에 월성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는데, 그 터에 황룡(皇龍)이 나타나므로 왕이 이상하게 여겨 바꿔 황룡사로 삼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국사』는 『삼국사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4년(553)에는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 곳에서 나타났으므로 왕이 이상하게 여겨 바꿔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寺)”라는 동일한 내용을 전한다.

이 사료를 통해서 황룡사가 창건된 지역에서 용이 나왔고, 결국 용궁의 남쪽에 있는 황룡사의 창건에 용이 밀접하게 관련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은 인간의 영역과 천상의 영역과 물을 통하는 신성한 존재이므로 황룡사 위치에 신성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으며, 불법의 수호자이고 왕권을 상징하는 용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용궁은 용신신앙에서 용신제(龍神祭)를 지내는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가 있다. 한편 용궁을 포함한 칠처가람의 원래 위치에는 원시적 제장이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신라는 이러한 제장에 새로운 종교 사원을 설치함으로서 새로운 종교를 선포함과 동시에 과거의 신성한 제장의 종교적 의미를 계승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신동하, 2001)

참고문헌

김정기, 1980, 「皇龍寺址 發掘과 三國遺事의 記錄」『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1-三國遺事의 新硏究-.
국립문화재연구소, 1984, 『皇龍寺遺蹟發掘調査報告書』Ⅰ.
강종훈, 1989, 「현재 발굴중인 황룡사 위치는 재검토되어야 한다」『역사비평』6.
박방룡, 2001, 「皇龍寺와 新羅王京의 造成」『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皇龍寺의 綜合的 考察-』22 -皇龍寺의 綜合的 考察-.
신동하, 2001, 「新羅佛國土 思想과 皇龍寺」『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皇龍寺의 綜合的 考察-』22 -皇龍寺의 綜合的 考察-.
국립경주박물관, 2002, 『國立慶州博物館敷地內 發掘調査報告書 -美術館敷地 및 連結通路敷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8, 『慶州 九黃洞 皇龍寺址展示館 建立敷地內 遺蹟 -九黃洞 苑池 遺蹟-』.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時 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崛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崛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歧[今永興寺 與興輪開同代] 三曰龍宮南[今皇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七曰婿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道禀敎至雞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 彡麽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三年 時 成國公主疾 巫醫不効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歧 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 驗矣 據此 本記與本碑 二說相戾不同如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晋末太元之間 則二道法師 以小獸林甲戌 到高麗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又若在<未>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 雞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 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乃阿道危行避諱 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 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躋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 <蓋>自訥祗之世 抵乎丁未 无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贗難詳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晉孝武太元(九)年末 齎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盖高麗聞道之始也 義熙初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晉末 朔方匈奴赫連勃勃 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晉赦沙門 悉皆不殺 始於是潛遁山澤 修頭陁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爲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太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慚懼 遂感癘疾 崔寇二人 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弘>佛法 始 後不知所終 議曰 曇始以太元末年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陁 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著毛郞宅裏梅

아도(阿道)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제4에 이르기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군(郡)사람 모례(毛禮)[혹은 모록(毛祿)이라고 한다.]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안치(安置)하였다. 이때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주었다.[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에서 원표(元表)란 사승(使僧)을 보내고 명단(溟檀)과 불경․불상[經像]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군신(君臣)이 그 향(香)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보고 말하기를,‘이는 향이란 것인데,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어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는 것이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發願)하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눌지(訥祗)는 진(晉)․송(宋)시대에 해당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왕녀(王女)가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서원을 표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후하게 예물을 주었는데, 조금 있다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재위 479-500)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명은 남아있으면서 경문(經文)과 율법(律法)을 강독하니 왕왕 신봉자가 있었다.[주(注)에 이르되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傳記)와 다르다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축인(西竺人)이라 하였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曺魏)사람 아(我)[아(我)는 성(姓)이다.]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가 출생하여 5세에 그의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 나아가 배웠다. 19세에 또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가 이르기를,‘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개월이 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곳의 가람(伽藍)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로, 금교는 서천교(西川橋)이니 속어(俗語)로 잘못하여 솔다리[松橋]라고 한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인데,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정미(丁未, 527)에 이르러 처음 열었고, 을묘(乙卯, 535)에 크게 개창(開倉)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에 마쳤다.],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興輪寺)와 동시에 개창하였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黃龍寺)이다. 진흥왕 계유(癸酉, 553)에 처음 개창되었다.],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갑오(甲午, 634)에 처음 개창되었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 을미(乙未, 635)에 처음 개창되었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지금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기묘(己卯, 679)에 개창되었다.],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으로서 모두 전불(前佛) 시대의 가람(伽藍)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르던 땅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東)으로 향하리라.’하였다.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우거(寓居)하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 재위 262-284)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대궐에 들어가서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록(祿)은 예(禮)와 형태가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란 이름을 모르고 아두삼마(阿頭彡麽)라 하였다. 삼마(彡麽)는 향언(鄕言)으로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彌)라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이 지났을 때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의(巫醫)의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의사를 구하였다. 법사가 급히 대궐에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 소원을 물었다. 대답하기를,‘빈도(貧道)는 백에 구하는 바가 없고, 다만 천경림에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고 거주하면서 강연(講演)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그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하였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어 또한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짓고 거주하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국인(國人)들이 법사를 해하려하여 법사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제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 재위 514-540)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즉위하여 불교[釋氏]를 일으켰는데, 미추왕 계미(癸未)와 252년 떨어졌다. 고도령이 말한 3천여 개월이 들어맞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본다. 양(梁)․당(唐)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여(麗)․제(濟)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376-396)이라고 하였으니 이도(二道, 순도와 아도)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 전(傳)은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 때에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여 년을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모두 이렇지는 않다. 또한 신라의 불교신봉이 이렇게 심하게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에 들어온 갑술년보다도 100여 년 전이 된다. 그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오지 않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 불합리하다. 설령 잠시 일어났다가 곧 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을까. 하나는 어찌 그리 뒤지고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을까. 생각컨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는 형세가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즉, 눌지왕대는 소수림왕대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란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고 지목한 말일 것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하고 진나라에서 석도안(釋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다. 즉 아도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아도의 두 이름으로써 두 사람을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더구나 아도의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같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그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傳)이 다 잘못하였으므로 이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며,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 때로부터 (법흥왕) 정미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칭한 것은 거짓인 듯 하나 자세하지 않다. 또 북위[元魏] 석담시(釋曇始)[혜시(惠始)라고도 한다.]전(傳)을 살펴보면,“담시는 관중(關中)사람으로 출가한 뒤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晉)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삼승(三乘)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가 불도(佛道)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 405-418)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三輔)를 개도(開導)하였다.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진흙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진나라 말기에 삭방(朔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격파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이때에 담시도 화(禍)를 만났으나 칼이 해하지 못하니 발발(勃勃)이 탄식하여 널리 사문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가 이에 몰래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陁)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 재위 423-452)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서 위엄을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에 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 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지위가 보(輔)가 되어 탁발도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설득하기를, ‘불교는 무익하고 민생에 유해하다.’고 하여 폐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태평(太平, 556-557) 말년에 담시가 바야흐로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일에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듣고 참(斬)하라고 명하였다. 여러번 참하되 상하지 아니하므로 탁발도가 스스로 그를 참하였으나 역시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에게 주었더니 역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탁발도가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리었다. 탁발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 문족(門族)을 죽이고 국내에 선언하여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의 후에 끝난 바는 알 수 없었다. 논하여 말한다. 담시가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머무른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의 역사에 기록이 없으리오. 담시는 이미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 묵호자, 난타와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명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의심된다. 찬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時 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崛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崛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歧[今永興寺 與興輪開同代] 三曰龍宮南[今皇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七曰婿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道禀敎至雞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 彡麽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三年 時 成國公主疾 巫醫不効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歧 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 驗矣 據此 本記與本碑 二說相戾不同如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晋末太元之間 則二道法師 以小獸林甲戌 到高麗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又若在<未>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 雞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 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乃阿道危行避諱 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 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躋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 <蓋>自訥祗之世 抵乎丁未 无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贗難詳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晉孝武太元(九)年末 齎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盖高麗聞道之始也 義熙初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晉末 朔方匈奴赫連勃勃 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晉赦沙門 悉皆不殺 始於是潛遁山澤 修頭陁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爲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太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慚懼 遂感癘疾 崔寇二人 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弘>佛法 始 後不知所終 議曰 曇始以太元末年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陁 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著毛郞宅裏梅

아도(阿道)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제4에 이르기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군(郡)사람 모례(毛禮)[혹은 모록(毛祿)이라고 한다.]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안치(安置)하였다. 이때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주었다.[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에서 원표(元表)란 사승(使僧)을 보내고 명단(溟檀)과 불경․불상[經像]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군신(君臣)이 그 향(香)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보고 말하기를,‘이는 향이란 것인데,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어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는 것이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發願)하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눌지(訥祗)는 진(晉)․송(宋)시대에 해당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왕녀(王女)가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서원을 표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후하게 예물을 주었는데, 조금 있다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재위 479-500)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명은 남아있으면서 경문(經文)과 율법(律法)을 강독하니 왕왕 신봉자가 있었다.[주(注)에 이르되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傳記)와 다르다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축인(西竺人)이라 하였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曺魏)사람 아(我)[아(我)는 성(姓)이다.]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가 출생하여 5세에 그의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 나아가 배웠다. 19세에 또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가 이르기를,‘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개월이 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곳의 가람(伽藍)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로, 금교는 서천교(西川橋)이니 속어(俗語)로 잘못하여 솔다리[松橋]라고 한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인데,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정미(丁未, 527)에 이르러 처음 열었고, 을묘(乙卯, 535)에 크게 개창(開倉)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에 마쳤다.],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興輪寺)와 동시에 개창하였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黃龍寺)이다. 진흥왕 계유(癸酉, 553)에 처음 개창되었다.],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갑오(甲午, 634)에 처음 개창되었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 을미(乙未, 635)에 처음 개창되었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지금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기묘(己卯, 679)에 개창되었다.],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으로서 모두 전불(前佛) 시대의 가람(伽藍)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르던 땅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東)으로 향하리라.’하였다.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우거(寓居)하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 재위 262-284)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대궐에 들어가서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록(祿)은 예(禮)와 형태가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란 이름을 모르고 아두삼마(阿頭彡麽)라 하였다. 삼마(彡麽)는 향언(鄕言)으로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彌)라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이 지났을 때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의(巫醫)의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의사를 구하였다. 법사가 급히 대궐에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 소원을 물었다. 대답하기를,‘빈도(貧道)는 백에 구하는 바가 없고, 다만 천경림에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고 거주하면서 강연(講演)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그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하였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어 또한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짓고 거주하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국인(國人)들이 법사를 해하려하여 법사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제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 재위 514-540)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즉위하여 불교[釋氏]를 일으켰는데, 미추왕 계미(癸未)와 252년 떨어졌다. 고도령이 말한 3천여 개월이 들어맞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본다. 양(梁)․당(唐)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여(麗)․제(濟)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376-396)이라고 하였으니 이도(二道, 순도와 아도)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 전(傳)은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 때에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여 년을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모두 이렇지는 않다. 또한 신라의 불교신봉이 이렇게 심하게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에 들어온 갑술년보다도 100여 년 전이 된다. 그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오지 않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 불합리하다. 설령 잠시 일어났다가 곧 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을까. 하나는 어찌 그리 뒤지고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을까. 생각컨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는 형세가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즉, 눌지왕대는 소수림왕대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란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고 지목한 말일 것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하고 진나라에서 석도안(釋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다. 즉 아도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아도의 두 이름으로써 두 사람을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더구나 아도의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같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그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傳)이 다 잘못하였으므로 이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며,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 때로부터 (법흥왕) 정미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칭한 것은 거짓인 듯 하나 자세하지 않다. 또 북위[元魏] 석담시(釋曇始)[혜시(惠始)라고도 한다.]전(傳)을 살펴보면,“담시는 관중(關中)사람으로 출가한 뒤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晉)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삼승(三乘)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가 불도(佛道)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 405-418)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三輔)를 개도(開導)하였다.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진흙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진나라 말기에 삭방(朔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격파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이때에 담시도 화(禍)를 만났으나 칼이 해하지 못하니 발발(勃勃)이 탄식하여 널리 사문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가 이에 몰래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陁)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 재위 423-452)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서 위엄을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에 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 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지위가 보(輔)가 되어 탁발도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설득하기를, ‘불교는 무익하고 민생에 유해하다.’고 하여 폐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태평(太平, 556-557) 말년에 담시가 바야흐로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일에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듣고 참(斬)하라고 명하였다. 여러번 참하되 상하지 아니하므로 탁발도가 스스로 그를 참하였으나 역시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에게 주었더니 역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탁발도가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리었다. 탁발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 문족(門族)을 죽이고 국내에 선언하여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의 후에 끝난 바는 알 수 없었다. 논하여 말한다. 담시가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머무른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의 역사에 기록이 없으리오. 담시는 이미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 묵호자, 난타와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명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의심된다. 찬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