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입택

금입택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헌강왕대(875-886)에 왕경에 위치한 39개소의 대저택, 혹은 큰 건물에 대한 지칭

일반정보

신라 헌덕왕대(875-886)에 왕경에 위치한 39개소의 진골 귀족들의 저택으로 일반적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진골귀족의 대저택과 함께 궁궐, 이궁, 관청과 같은 큰 건물까지 넓게 파악하기도 하며, 금당과 탑을 가진 진골귀족 원찰(願刹)의 기능을 가진 저택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2 진한(辰韓)조에서는 “35개의 금입택(金入宅)[부윤(富潤)한 큰집을 말한다](三十五金入宅[言富潤大宅也])”라는 기사가 확인된다. 이어서 각각의 금입택을 나열하고 있는데, 35개의 금입택이라는 것과 다르게 실제로는 39개가 언급되고 있다. 열거된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남택(南宅), (2)북택(北宅), (3)우비소택(于比所宅), (4)본피택(本彼宅), (5)양택(梁宅), (6)지상택(池上宅)[본피부(本彼部)], (7)재매정택(財買井宅)[김유신공(金庾信公)의 조종(祖宗)], (8)북유택(北維宅), (9)남유택(南維宅)[반향사(反香寺)의 하방(下坊)], (10)대택(隊宅), (11)빈지택(賓支宅)[반향사(反香寺) 북쪽], (12)장사택(長沙宅), (13)상앵택(上櫻宅), (14)하앵택(下櫻宅), (15)수망택(水望宅), (16)천택(泉宅), (17)양상택(楊上宅)[양부(梁部)의 남쪽], (18)한기택(漢歧宅)[법류사(法流寺) 남쪽], (19)비혈택(鼻穴宅)[위와 같다], (20)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 (21)별교택(別敎宅)[천(川)의 북쪽], (22)아남택(衙南宅), (23)김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梁官寺)의 남쪽], (24)곡수택(曲水宅)[천(川)의 북쪽], (25)유야택(柳也宅), (26)사하택(寺下宅), (27)사량택(沙梁宅), (28)정상택(井上宅), (29)이남택(里南宅)[우소택(于所宅)], (30)사내곡택(思內曲宅), (31)지택(池宅), (32)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 (33)임상택(林上宅)[청룡(靑龍)이라는 절의 동쪽에 연못이 있다], (34)교남택(橋南宅), (35)항질택(巷叱宅)[본피부(本彼部)], (36)누상택(樓上宅), (37)이상택(里上宅), (38)명남택(椧南宅), (39)정하택(井下宅)

상기된 부분의 뒷부분에는 사절유택(四節遊宅)을 나열한 뒤에 “제49대 헌강대왕대 성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가 서로 닿아있고, 노래와 피리소리가 길에 가득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第四十九憲康大王代 城中無一草屋 接角連墻 歌吹滿路 晝夜不絶)”라는 부분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기사들을 하나로 묶어서 파악하여, 금입택이 정리된 시기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대라고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이병도, 1959)

그런데 금입택으로 분류된 집 들이 일시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김유신(金庾信, 595-673)과 관련된 (7)재매정택(財買井宅)의 존재와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黃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조에서는 경덕왕(景德王) 13년(754)에 (37)리상택(里上宅)이 존재한 것 등을 통하여 신라 중대부터 순차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이기동, 1984)

금입택의 성격에 대해서는 『삼국유사』편찬자의 “부윤(富潤)한 큰 집을 말한다”는 주석을 근거로 “부호대가(富豪大家)”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었다. 금입택을 풀어 보면 “쇠드리댁”, “금드리댁”을 말하는 것인데, 대토지를 소유하며 수입을 얻는 호족(豪族)들의 집을 지칭한다는 것이다.(이병도, 1959) 그리고『삼국사기』 권33 잡지(雜志)2 옥사(屋舍)조를 이용하여 논지를 보충한 견해도 있다. 이 기사에서는 흥덕왕(興德王) 9년(834)에 귀족층의 가옥에 대한 규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금입택은 이러한 규정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왕권에 비견되는 막대한 권세를 누리던 유력한 진골층 집이라는 것이다.(이기동, 1984)

또한 당시에 단순히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금입택으로 호칭된 것은 애매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고려사(高麗史)』권10 지리1과 신라 하대의 여러 금석문들에서 확인되는 “부(府)”라는 용례를 책봉 받은 진골 귀족이 지방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으로 파악하여, 금입택을 지방에 개부(開府)한 왕경에 있는 진골귀족들의 집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서의식, 1996)

그리고 중대 이후에 진골가문의 수가 증가한 것과 금입택에 거주하는 세력을 연결하여, 금입택의 소유세력은 종가(宗家)를 이루면서 진골을 재생산하는 중심세력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신라하대에 왕위쟁탈전에 군사적인 기반까지 제공하였다고 이해한 연구도 있었다.(이종욱, 1999)

이처럼 금입택을 권세를 가진 진골귀족의 집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다른 용도의 건물도 포함될 가능성이 함께 언급되었다. 특히 35금입택을 나열하면서 39개가 언급된 것에 대해서, (4)본피택(本彼宅)의 경우에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文武王) 2년(662)조 기사와 권39 잡지(雜志)8 직관(職官) 중(中)에 언급된 “본피궁(本皮宮)”과 연결 될 수 있고, (5)양택(梁宅), (18)한기택(漢歧宅), (27)사량택(沙梁宅)도 부(部)의 명칭과 일치하는 것이므로 “양궁(梁宮)”, “한기궁(漢歧宮)”, “사량궁(沙梁宮)”으로서 이궁(離宮)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었다.(三池賢一, 1971)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민애왕(閔哀王) 2년(839)에 왕이 “월유택(月遊宅)” 들어갔다는 기사와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권44 열전4 김양(金陽)전에서는 “이궁(離宮)”에 들어갔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이궁의 경우에 택(宅)으로 불린 경우가 있음을 보충하였다.(이기동, 1984)

또한 금입택은 쇠드리 혹은 금드리를 한 화려한 옥사(屋舍)로서 귀족의 집과 관청, 궁전 까지 포함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정한 연구도 있었다.(홍형옥, 1992) 이러한 주장과 유사하게 택(宅)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파악하여 진골층의 댁, 관청, 궁전 등을 포함한 유명한 큰 집들을 명사화 한 것이라고 파악한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삼국사기』 권39 잡지8 직관(職官) 중에는 “세택(洗宅)”이라는 관청이 경덕왕대에 중서성(中書省)으로 고쳐졌다가 복고되었다는 기사를 제시하여 관청이면서 택(宅)의 용례도 있음을 확인하였다.(양시호, 2007)

한편 금입택을 “금당(金堂)과 탑(塔)을 가진 주택”, 금인(金人, 불상)이 있는 “금당입택(金堂入宅)”, “금전입택(金殿入宅)”, “금인입택(金人入宅)”의 약칭으로 본 견해도 있다. 1993년에 경주시 북천(北川)의 건너편이면서 분황사(芬皇寺)의 정북쪽에 해당하는 동천동 삼성아파트신축부지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건물지와 관련된 44매의 초석과 석탑의 옥개석 2매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성격이 비록 명확하지는 않지만, 금입택 중의 하나인 (20)판적택(板積宅)[분황사의 상방(上坊)]일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1982년 동천동 폐사지의 탑지 주변에 대한 조사에서도 탑의 규모가 작은 소형사찰 구조임이 밝혀졌는데, 그 규모가 주택 내에 포함될 정도였으므로 금입택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고고학적인 성과를 결부시켜 금입택을 도성 내에서 개인의 원찰(願刹)을 보유한 주택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3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厭髑滅身)조에는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섰다(寺寺星張 塔塔imagefont行)”라는 기사가 확인되는데, 경주 시내에 20여 개소의 사지(寺址)로는 그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는 금당과 탑을 가진 금입택도 함께 언급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아울러 『삼국유사』에 금입택을 열거하면서 세주를 통하여 부(部), 사찰과의 위치관계를 자세하게 서술한 것은 금입택이 눈에 잘 보이는 탑과 금당을 가졌기 때문에 왕경 내에서 위치파악의 기준점 역할을 겸하였으므로 자료가 남아서 채록되었던 것으로 설명하였다.(이은석, 2004)

이와 같이 부족한 자료를 통해서 금입택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어왔지만, 금입택으로 나열된 각각의 택(宅)에 대한 언급은 부족한 편이다. 각각의 성격과 위치비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택(南宅) : 다른 금입택의 명칭은 특정한 명칭에 방향성이 부가되어 있지만, (2)북택과 함께 방위를 제시하는 명칭만 결합된 남택은 매우 저명한 건물이나 지명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2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3년(249), 5년(251),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7년(268),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7년(423), 권4 신라본기4 진평왕(眞平王) 7년(585)에서는 남당(南堂)이 확인된다. 신라초기의 정청(政廳)의 역할을 수행한 남당은 정무가 복잡해지면서 군신회의나 의식을 거행하는 기관으로 변질되는데, 남당이 폐지된 이후 어느 시점에 남택이 세워졌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이기동, 1984)

(2) 북택(北宅) : (1)남택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권3 탑상4 백엄사 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북택청(北宅廳)’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서, 북택이 들어서기 전에 관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권19 흠명기(欽命紀 ) 15년(554)조에서 백제 성왕(聖王)의 뼈를 뭍었다는 북청(北廳)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혹은 『삼국사기』권11 진성왕(眞聖王) 11년조와 『삼국유사』권2 기이2 혜공왕조의 ‘북궁(北宮)’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언급하였다.(이기동, 1984)

한편 금입택을 지방에 개부(開府)한 진골귀족의 집으로 파악한 견해에서는 상기된 ‘북택청(北宅廳)’을 북택이 관리하는 부(府)에 설치된 관청으로 파악하여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서의식, 1996)

(3) 우비소택(于比所宅) : 전남 담양군의 개선사(開仙寺) 석등(石燈)에 세겨진 명문 중에 “용기(龍紀) 3년(891) 신해 10월 어느 날 승녀 입운(入雲)은 서울에서 보내 준 조(租) 1백석으로 오호비소리(烏乎比所里)의 공서(公書)와 준휴(俊休) 두 사람에게서…(龍紀三年辛亥 十月 日 僧入雲 京租」一白碩 烏乎比所里 公書俊休二人」…)”라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 경주에 오호비소리(烏乎比所里)라는 지명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우비소택은 오로비소리의 명칭에서 붙여진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다.(鮎貝房之進, 1934)

(4) 본피택(本彼宅) :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文武王) 2년(662)조 기사 및 권39 잡지(雜志)8 직관(職官) 중(中)에 나오는 본피궁(本彼宮)과 관련될 가능성을 제기한 연구가 있었다.(三池賢一, 1971) 본피부에 있었을 가능성 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5) 양택(梁宅) : (4)본피택을 본피궁으로 비정한 것처럼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평왕(眞平王) 44년(622)조와 권39 잡지8 직관 중(中) 내성(內省)조에 언급된 양궁(梁宮)일 가능성을 언급한 견해가 있다.(三池賢一, 1971) 양부(梁部) 내에 있었을 가능성 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6) 지상택(池上宅) : 세주에서 언급된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다는 설명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단, 『삼국사기』 권8 성덕왕(聖德王) 14년(715)조에서 “임천사(林泉寺) 못 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祈雨於林泉寺池上)”라는 부분과 연결해 보고자한 연구가 있다. 『삼국사기』 권10 헌덕왕(憲德王) 18년(826)에 “(헌덕왕이 죽자) 천림사(泉林寺) 북쪽에서 장사를 지냈다(葬于泉林寺北)”에서 보이는 천림사(泉林寺)와 임천사(林泉寺)와 동일한 사찰이고, 경주시 동천동 80번지의 헌덕왕릉 동남쪽 북천가에 임천사지로 전하는 사지가 있으므로, 지상택이 이 근방일 것으로 추정하였다.(이기동, 1984)

(7) 재매정택(財買井宅) : 세주에서는 김유신(金庾信)의 조종(祖宗)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김유신 후손의 종가(宗家)로 설명한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이기동, 1984) 현재 경주시 교동 89-7번지가 재매정지(財買井址)로 전해지고 있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8) 북유택(北維宅) : 뒤에 언급되는 (9)남유택의 인근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9) 남유택(南維宅) : 세주에서 반향사(反香寺)의 하방(下坊)이라고 되어 있다. 반향사는 35금입택을 설명하는 부분 이외에는 사료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반향사의 북쪽에 있다는 (11)빈지택의 경우를 참고한다면 본피부(本彼部)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다.(이기동, 1984)

(10) 대택(隊宅) :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11) 빈지택(賓支宅) : 세주에서 반향사(反香寺)의 북쪽에 있다고 하고 있지만, 반향사에 대한 자료가 없다. 다만, 빈지(賓支)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서 “자산(紫山) 진지촌(珍支村)[혹은 빈지(賓之), 또한 빈자(賓子), 또는 빙(氷之)라고 한다] …이것이 본피부 최씨의 시조이다(紫山 珍支村[一作 賓之 又 賓子 又 氷之] 是爲本皮部崔氏祖)”라는 부분에서 확인되는 ‘빈지(賓之)’와 연결된다고 보아서 본피부에 있었을 가능성을 언급한 연구가 있다.(이기동, 1984)

(12) 장사택(長沙宅) : 『삼국유사』 권1 기이1 내물왕 김제상(奈勿王 金堤上)조에 “망덕사(望德寺) 문의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 이러한 일로 인하여 그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及至望德寺門南沙上… 因名其沙曰長沙)”라는 부분과 연결하여 장사택을 경주시 배반동 964에 위치한 망덕사 부근에 비정한 견해가 있다.

한편 전남 장흥군 보림사(寶林寺) 삼층석탑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탑지(塔誌)에서는 김수종(金遂宗)이 경문왕(景文王) 10년(870)에 탑을 세우는 것을 총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 鐵造毘盧舍那佛坐像)에 세겨진 명문에도 헌안왕(憲安王) 2년(858)에 무주(武州) 장사부관(長沙副官) 김수종(金邃宗)이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권1 왕력1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조에서 “(경명왕의) 비(妃)는 장사택(長沙宅)으로 대존(大尊) 각간(角干), 추봉된 성희(聖僖)대왕의 자식이며, 대존은 곧 수종(水宗) 이간(伊干)의 아들이다(妃長沙宅 大尊角干 追封聖僖大王之子 大尊卽水宗伊干之子)”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장사택(長沙宅)의 할아버지인 수종(水宗)은 보림사 불사에 관여한 장사현(長沙縣)의 부관을 역임한 김수종(金遂宗)과 동일한 인물로 파악된다. 그리고 경명왕의 비의 이름과 동일한 장사택은 김수종이 재직한 장사현의 지명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김수종의 집안은 계속해서 장사현을 경제적인 거점으로서 유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기동, 1984)

(13) 상앵택(上櫻宅) :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14) 하앵택(下櫻宅) :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15) 수망택(水望宅) : 전남 장흥군 보림사에 있는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에는 “당(唐) 선제(宣帝) 14년 2월에 … 교를 내려 망수(望水)․이남(里南)등의 택에서도 금 160분(分), 조(租) 2000곡(斛)을 내놓아 공덕을 꾸미는데 도와 충당하고…(唐宣帝十四年仲春 … 敎下望水里南等宅 其出」金一百六十分 租二千斛 助充裝餝功德…)라는 부분에서 (29)이남택과 함께 망수택(望水宅)의 용례가 확인된다. 여기서 망수택은 수망택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新羅史硏究會, 1998)

(16) 천택(泉宅) : 천(泉)과 관련된 명칭이라는 추정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17) 양상택(楊上宅) : 세주에서는 양남(梁南)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양부(梁部)의 남쪽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다.(村上四男, 1978) 그런데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 경덕왕(聖德王)조의 “능(陵)은 동촌(東村)의 남쪽에 있는데 양장곡(楊長谷)이라고 한다(陵在東村南 一云楊長谷)”라는 기사와 성덕왕(聖德王)조에서 “뒤에 양장곡으로 옮겨 장사지냈다(後移葬楊長谷中)”라는 기사에서 확인되는 양장(楊長)과 양상(楊上)을 같은 지명으로 파악하고, 현재 성덕왕릉으로 전해지는 경주시 정래동 일대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이기동, 1984)

(18) 한기택(漢歧宅) : 세주에서 법류사(法流寺)의 남쪽에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법류사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4)본피택을 본피궁으로 비정한 것처럼 한기궁(漢岐宮)일 가능성을 언급한 견해가 있다.(三池賢一, 1971) 그런데, (4)본피택(本彼宅), (5)양택(梁宅), (27) 사량택(沙梁宅)의 경우 다른 사료에서 각각 본피궁, 양궁, 사량궁이 확인되지만 한기궁의 용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한기부에 있었을 가능성 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19) 비혈택(鼻穴宅) : 세주에서 (18) 한기택과 같다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한기부(漢歧部)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0) 판적택(板積宅) : 『삼국사기』 권48 열전8 향덕(向德)전에서 향덕이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熊川州 板積鄕人)”이라고 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판적택이 판적향을 지방의 경제적인 거점으로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이기동, 1984)
판적택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세주에서 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분황사의 북쪽은 북천과 근접하여 건물이 배치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북천의 건너편에 위치한 동천동 삼성아파트부지 유적을 판적택과 관련시키고자 한 견해가 있다.(이은석, 2004) 한편 분황사의 동편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원지를 비롯한 거주지가 확인이 되어 판적택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게 되었다. 분황사를 기준으로 상하(上下)를 남북(南北)이 아닌 동서(東西)의 개념으로 놓고 가정해 본다면 분황사의 동쪽의 구황동 유적이 상방인 판적택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서를 상하의 개념으로 대입한다는 것이 어색하며, 원지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판적택은 역시 북천의 북쪽에 해당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8)

(21) 별교택(別敎宅) : 세주에서 천(川)의 북쪽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여기서 언급된 개천이 어느 곳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元聖大王)조에서는 원성왕(김주원)의 “집이 천북(川北)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家在川北 忽川漲不得渡)”라는 내용과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즉위년(785)조에는 “김주원의 집이 서울의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마친 큰 비가 내려 알천(북천)이 불어서 김주원이 건너지 못했다(周元宅於京北二十里 會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천북(川北)’의 용례는 북천의 북쪽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으므로, (24)곡수택의 경우도 북천의 북쪽에 있었을 것이라는 언급이 있었다.(이기동, 1984) 한편 이러한 견해를 인용하여 북천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설명할 정도라면 대부분의 금입택은 북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이기봉, 2003)

(22) 아남택(衙南宅) : 명칭이 관아가 밀집한 지역의 남쪽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육부에서 중심적인 세력이었던 사량부(沙梁部)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이기동, 1984)

(23) 김양종택(金楊宗宅) : 김양종택(金楊宗)은 헌덕왕(憲德王) 2년(810)-3년(911)에 집사부(執事部)의 시중(侍中)을 역임한 김양종(金亮宗)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즉, (7)재매정택(財買井宅)처럼 김양종을 시조로 하는 가문의 택호일 가능성이 높다(이기동, 1984) 그런데 세주에서는 양관사(梁官寺)의 남쪽에 있다고 하는데, 양관사는 본 사료 외에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24) 곡수택(曲水宅) : 세주에서 천(川)의 북쪽이라고 되어 있는데 (21)별교택(別敎宅)과 동일하게 북천의 북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25) 유야택(柳也宅) :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26) 사하택(寺下宅) :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27) 사량택(沙梁宅) : (4)본피택을 본피궁으로 비정한 것처럼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진평왕(眞平王) 44년(622)조와 권39 잡지8 직관 중(中) 내성(內省)조 및 권48 열전8 검군(劒君, ?-628)조에 언급된 사량궁(沙梁宮)일 가능성을 언급한 견해가 있다.(三池賢一, 1971) 사량부 내에 있었을 가능성 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28) 정상택(井上宅) : 우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느 곳을 지칭하는지 알 수없다.

(29) 이남택(里南宅)[우소택(于所宅)] : (37) 리상택(里上宅)과 같이 방리제에 의한 기준점으로 나누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리남택은 금석문을 통해서 용례가 확인된다. 전남 장흥군에 있는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에는 “당(唐) 선제(宣帝) 14년 2월에 … 교를 내려 망수(望水)․이남(里南)등의 택에서도 금 160분(分), 조(租) 2000곡(斛)을 내놓아 공덕을 꾸미는데 도와 충당하고…(唐宣帝十四年仲春 … 敎下望水里南等宅 其出」金一百六十分 租二千斛 助充裝餝功德…)라는 부분에서 리남택이 등장한다. 여기서 리남택은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금입택이 부윤대택(富潤大宅)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新羅史硏究會, 1998)

(30) 사내곡택(思內曲宅) : “사내(思內)”를 사뇌가(詞腦歌)의 “사뇌(詞腦)”와 동어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또한 사절유택의 하나인 동야택(東野宅)의 경우에도 동쪽 방향(東方)의 들(野)이라고 풀어서 동야(東野)는 “Sai Nai”로 읽을 수 있으므로 『삼국유사』 권1 기이2 신라시조 혁거세(新羅始祖 赫居世王)조에서 보이는 “사뇌야(詞腦野)”와 글자가 다른 같은 말이며, 사내곡택(思內曲宅)과 중복일 수도 있다고 파악하였다.(三品彰英, 1975)

(31) 지택(池宅) :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32) 사상택(寺上宅) : 대숙택(大宿宅)이라고도 불린다는 세주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33) 임상택(林上宅) : 청룡이라는 절(靑龍之寺)의 동쪽에 연못이 있다는 세주가 붙어있다. 현재 청룡사(靑龍寺)와 관련된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34) 교남택(橋南宅) : 명칭을 통해서 유명한 다리의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느 다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료를 통해서는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9 경덕왕(景德王) 19년(760)기사에서 “궁(宮)의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세웠다(又宮南蚊川之上 起月淨春陽二橋)”라는 내용이 유일하게 확인된다. 따라서 월정교와 춘양교의 남쪽에 위치한 경주시 인왕동 지역에 교남택이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이기동, 1984)

(35) 항질택(巷叱宅) : (6)지상택과 마찬가지로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다는 설명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36) 누상택(樓上宅) : 명칭을 통해서 유명한 누각(樓閣)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권5 신주(神呪)6 월명사 도솔가(月明師 兜率歌)조의 “청양루(靑陽樓)”,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2년(655)의 “고루(鼓樓)”, 『삼국사기』권 11 신라본기11 경문왕(景文王) 11년(871)의 “월상루(月上樓)” 등 많은 누각이 사료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루상택이 어떠한 누각과 관련되는지는 알 수 없다.

(37) 이상택(里上宅) :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黃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조에 “신라 35대 경덕대왕이 천보(天寶) 13년 甲午(754)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했는데 … 장인(匠人)은 리상택(里上宅) 하전(下典)이다(新羅第三十五代 景德大王 以天寶三年甲午 … 匠人里上宅下典)”이라는 부분에서 리상택의 용례가 확인된다. (29)리남택(里南宅)과 같이 방리제를 의한 기준으로 붙여진 명칭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38) 명남택(椧南宅) : 홈통의 의미를 가진 명(椧)의 명칭을 통해서 북명사(北椧寺)와 연결한 견해가 있다. 현재 경주 남산지역에 해당하는 내남면 명계리에는 북명사(北椧寺)로 전하는 사지와 탑재가 남아있는데, 명남택은 북명사 인근인 남산 동남편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이기동, 1984)

(39) 정하택(井下宅) : (28)정상택(井上宅)과 마찬가지로 우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참고문헌

鮎貝房之進, 1934, 『雜攷』6-上篇 俗文攷. 朝鮮印刷株式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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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文化遺蹟總覽』.
村上四男, 1978,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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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진한)
辰韓[亦作秦韓]
後漢書云 辰韓耆老自言 秦之亡人 來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戶 稱國 又崔致遠云 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云沙涿漸涿等[羅人方言 讀涿音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三十五金入宅[言富潤大宅也] 南宅 北宅 于比所宅 本彼宅 梁宅 池上宅[本彼部] 財買井宅[庾信公祖宗] 北維宅 南維宅[反香寺下坊] 隊宅 賓支宅[反香寺<北>] 長沙宅 上櫻宅 下櫻宅 水望宅 泉宅 楊上宅[梁南] 漢歧宅[法流寺南] 鼻穴宅[上同] 板積宅[芬皇寺上坊] 別敎宅[川北] 衙南宅 金楊宗宅[梁官寺南] 曲水宅[川北] 柳也宅 寺下宅 沙梁宅 井上宅 里南宅[于所宅] 思內曲宅池宅 寺上宅[大宿宅] 林上宅[靑龍之寺東方有池] 橋南宅 巷叱宅[本彼部] 樓上宅 里上宅 椧南宅 井下宅
진한(辰韓)[또는 진한(秦韓)이라 함]
『후한서』에서 이르기를 “진한의 늙은이가 스스로 말하기를 ‘진의 망명인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어 서로 부르기를 도라 하며, 진나라의 말과 유사하므로 혹은 그것을 이름하여 진한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12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각각 만 호씩으로 국이라 칭하였다. 또한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의 사람들이 망명한 것이기 때문에 탁수의 이름을 취하고 살고 있는 읍리를 사탁․점탁 등으로 칭한다”고 하였다.[신라인의 방언에 탁을 도로 읽기 때문에 지금은 혹 사량이라 쓰고 양 또한 도라고 읽는다] 신라전성기 서울에는 17만 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개의 급입택(金入宅)[부윤한 큰 집을 말한다]이 있었다. 남택(南宅), 북택(北宅), 우비소택(于比所宅), 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본피부(本彼部)], 재매정택(財買井宅)[김유신공의 조종(祖宗)],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반향사(反香寺)의 하방(下坊)], 대택(隊宅), 빈지택(賓支宅)[반향사(反香寺) 북쪽],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상택(楊上宅)[양부(梁部)의 남쪽], 한기택(漢歧宅)[법류사(法流寺) 남쪽], 비혈택(鼻穴宅)[위와 같다], 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 별교택(別敎宅)[천(川)의 북쪽], 아남택(衙南宅), 김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梁官寺)의 남쪽], 곡수택(曲水宅)[천(川)의 북쪽],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里南宅)[우소택(于所宅)], 사내곡택(思內曲宅), 지택(池宅), 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 임상택(林上宅)[청룡이라는 절(靑龍之寺)의 동쪽에 연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항질택(巷叱宅)[본피부(本彼部)], 누상택(樓上宅), 이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 정하택(井下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