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문무왕릉

전 문무왕릉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능으로 전하는 무덤

지 정 명 : 문무대왕릉
지정번호 : 사적 제158호
위 치 :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17

일반정보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능(陵)으로 전하는 무덤으로 대왕암(大王岩)이라도 한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인근 바다에 위치하고 있다.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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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능(陵)으로 전하는 무덤은 현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21년(681)조에 실린 문무왕의 유조(遺詔)에 따르면 “죽고 나서 10일이 지나면 곧 고문(庫門) 바깥뜰에서 서국(西國)의 예식에 따라 화장(火葬)하라.(屬纊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책 같은 조에는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羣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라고 기록하였다. 즉 문무왕의 유해는 그가 사망한지 10일 후에 천자(天子)의 오문(五門) 가운데 하나인 고문 바깥뜰에서 화장(火葬)된 뒤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내진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유사』 권1 왕력편에서 왕의 능(陵)이 “감은사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在感恩寺東海中)”라고 한 것이나, 같은 책 권2 기이2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와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서 각각 “동해 중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葬於東海中大巖上)”, “장골한 곳은 대왕암이라 하였다.(藏骨處 名大王岩)”라고 한 것은 같은 사실을 달리 서술한 것인 듯하다.

한편 조선 중기의 학자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편찬한 『간재집(艮齋集)』에도 대왕암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대왕암. 항간에 이르길, 용이 그 바위 위에서 보였는데 신라왕과 더불어 서로 보았으므로 이로 인해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大王巖也 諺曰 有龍見於此巖上 與羅王相見云 故因名云)”라고 하여 대왕암의 유래에 대해 다만 용이 나타난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대왕암을 문무왕릉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왕암이 문무왕릉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반인들에게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한 괘릉(掛陵)이 문무왕릉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괘릉과 관련하여 민간에 “왕의 유해를 수면 위에 걸어 안장하였다.”라는 식의 속설이 전하여 수장(水葬)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었으며, 그 구조 또한 경주 지역에 위치한 신라 왕릉 중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괘릉의 피장자를 삼국을 통일한 군주 문무왕에 연결시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괘릉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외동면 말방리 토함산 기슭 절터에서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비(崇福寺碑)」의 비편이 발견되었고, 이로 인하여 괘릉은 문무왕릉이 아닌 원성왕릉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괘릉이 문무왕릉이라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사료의 내용에 근거하여 오늘날의 경주시 감포읍의 대왕암에 문무왕릉을 비정하게 된 것이다.(유석우, 1971)

문무왕을 장사지냈다고 전하는 대왕암(大王岩)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나오고 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동쪽으로 나있는 수로(水路)를 통해 물이 들어온 뒤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용이하도록 인위적으로 수로를 파낸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내부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석관(石棺)을 상징적으로 처리한 것처럼 남북으로 길고 넓적한 큰 바위가 놓여 있다.(이근직, 2006)

그동안 학계에서는 중앙의 큰 바위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의문은 2001년 3월 한국방송(KBS)의 역사 다큐멘터리 “역사스페셜”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역사 스페셜 제작팀은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 아래를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왕암의 내부 또는 아래 부분에는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었다.(정종목, 2002)

한편 대왕암을 왕릉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대왕암을 문무왕릉으로 보는 시각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립된 것으로, 그 본질적 성격은 해안가에서 흔히 발견되는 대왕바위신앙일 뿐 문무왕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신종원, 2004)

참고문헌

유석우, 1971, 「文武王陵-大王石과 掛陵-」『경주시지』, 경주시사편찬위원회.
정종목, 2002, 『KBS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사.
신종원, 2004, 『『삼국유사』 새로 읽기』1, 일지사.
이근직, 2006, 『新羅 王陵의 起源과 變遷』,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 文武王[名法敏 大宗之子也 母訓帝夫人 妃慈義一作訥王后 善品海干之女 辛酉立 治二十年 陵在感恩寺東海中]
제30 문무왕[이름은 법민으로 태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훈제부인이다. 비는 자의, 혹은 자눌왕후라고 하는데 선품 해간의 딸이다. 신유년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다. 능은 감은사 동쪽 바다 중에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만파식적)
萬波息笛
第三十一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爲聖考文武大王 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 排金堂砌下 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 旋繞之備 蓋遺詔之葬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明年壬午五月朔[一本云 天授元年 誤矣] 海官波珍<飡>朴夙淸奏曰 東海中有小山 浮來向感恩寺 隨波往來 王異之 命日官金春質[一作春日]占之 曰 聖考今爲海龍 鎭護三韓 抑又金公庾信 乃三十三天之一子 今降爲大臣 二聖同德 欲出守城之寶 若陛下行幸海邊 必得無價大寶 王喜 以其月七日 駕幸利見臺 望其山 遣使審之 山勢如龜頭 上有一竿竹 晝爲二 夜合一[一云 山亦晝夜開合如竹] 使來奏之 王御感恩寺宿 明日午時 竹合爲一 天地振動 風雨晦暗七日 至其月十六日 風霽波平 王泛海入其山 有龍奉黑玉帶來獻 迎接共坐問曰 此山與竹 或判或合如何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王驚 以五色錦彩金玉酬賽之 勅使斫竹出海 時山與龍忽隱不現 王宿感恩寺 十七日到祗林寺西溪邊 留駕晝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 皆眞龍也 王曰 汝何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 駕還 以其竹作笛 藏於月城天尊庫 吹此笛 則兵退病愈 旱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至孝昭大王代天授四年癸巳 因失禮郞生還之異 更封號曰萬萬波波息笛 詳見彼傳
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며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에 있는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으로 짓다가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를 파헤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내었으니,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이름하였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이듬해 임오(壬午, 682) 5월 초하루에[어떤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690)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기를, “동해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또는 춘일(春日)]에게 점을 치도록 하였다. 그가 아뢰길 “돌아가신 부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보배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했더니,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 같고 그 위에는 한 줄기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일설에는 산도 역시 밤낮으로 갈라지고 합침이 대나무와 같았다고 한다.] 사자가 와서 그것을 아뢰니, 왕이 감은사로 가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천지가 진동하며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도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흑옥대(黑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이 영접하여 함께 앉아서 묻기를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용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으니, 이 대나무라는 물건은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셨는데, 두 성인이 같은 마음으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를 내어 저를 시켜 이를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놀라서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니 이 때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祇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즉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라고 물으니 태자가 아뢰기를 “쪽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보면 보이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왼쪽의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 하였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대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癸巳, 693)에 실례랑(失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로 해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봉하여 이름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