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

대무신왕

분류 문학 > 국가 > 고구려

기본정보

고구려 제3대 왕.
생몰년: 4-44
재위기간: 18-44

일반정보

고구려의 제3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8년∼44년이다. 일명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 또는 미류(味留)라고 전하며 어머니는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11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5세에 즉위하였는데, 27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국가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에 큰 공헌을 했다. 시호가 대무신왕(大武神王)인 것은 재위 중에 주위의 많은 나라를 공격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대무신왕 본문 이미지 1
대무신왕 본문 이미지 2

전문정보

고구려의 제3대 왕으로 일명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 또는 미류(味留)라도 전하며 유리왕의 셋째아들로 어머니는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삼국유사』에는 대호신왕(大虎神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혜종의 이름 “무(武)”의 피휘(避諱)이다. 아들로는 차비(次妃)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호동(好童)이 있고, 그리고 후에 제5대 모본왕(慕本王)이 된 해우(解憂)가 있다.

왕자 호동(好童)은 얼굴이 수려하여, 대무신왕의 총애를 받아 이름을 “호동(好童)”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갈사국왕(葛思國王)의 손녀로,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였다. 호동은 대무신왕 15년인 서기 32년 4월 옥저를 유람하다가 순행(巡幸)하던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를 만나, 함께 낙랑으로 가서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런데 당시 낙랑에는 적이 침입해 오면 스스로 울어 위기를 알리는 자명고(自鳴鼓)가 있어,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하기 어려웠다. 이에 호동은 최리의 딸로 하여금 몰래 자명고(自鳴鼓)를 파괴하게 하고 고구려 군대를 이끌고 낙랑을 정복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하여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이한 후,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병기를 파괴하게 한 것이라고도 한다. 호동은 그 뒤 대무신왕의 원비(元妃)의 모함으로 부왕의 의심을 사게 되자 자결하였다고 한다.

호동왕자 전설에 등장하는 낙랑에 대해서는 중국 군현의 하나인 낙랑군으로 보지 않고, 평양에 근거를 둔 독립세력인 낙랑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즉 한무제(漢武帝)의 침략에 항거하여 고조선의 유민이 요하(遼河)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설치한 국가로 본 것이다. (윤내현, 1989) 그런데 이에 대하여 대동강유역의 한군현(漢郡縣)과는 구별되면서도 그 위성세력으로 기능하던 군장사회의 사회체로 파악하기도 하며(박경철, 1996) 전한 말에서 후한 초에 한나라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였던 최리(崔理)가 영동7현(嶺東七縣)에 세웠던 정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劉子敏, 2001)

대무신왕은 11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5세에 즉위하였는데, 27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국가체제 정비와 영토확장에 큰 공헌을 했다. 재위 5년(22) 동부여를 공격하여 왕 대소(帶素)를 죽였다. 이 여파로 부여왕의 아우가 분열되어 나와 갈사국을 세웠고, 부여왕의 종제(從弟)는 고구려에 항복하고 그 무리 1만 명은 연나부에 안치되었다. 재위 9년(26)에는 압록강 상류 방면의 개마국(蓋馬國)을 정복하여 군현으로 삼고, 이어서 구다국(句茶國)의 항복을 받았다. 재위 11년(28)에는 한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의 침략을 물리쳤고, 재위 15년(32)에는 호동왕자(好童王子)의 활약으로 낙랑의 항복을 받는 등 영토를 널리 확장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을두지(乙豆智)·송옥구(松屋句) 등 많은 인물을 등용하였고, 부정씨(負鼎氏), 낙씨(絡氏), 대실씨(大室氏) 등 성씨를 하사하는 사성(賜姓)정책으로 지배층의 세력을 재편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김현숙, 1994) 또한 부여에서 온 1만명을 연나부에 안치시키고, 폭정을 행하던 비류부장을 교체하는 등 각 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임기환, 2004) 특히 대무신왕 때에 5나부(那部) 가운데 가장 강한 계루부(桂婁部), 비류부(沸流部), 연나부(椽那部)가 이미 등장하고 있어, 태조왕 때에 이루어지는 5나부체제의 기본틀이 이 때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김현숙,1994). 아울러 처음으로 좌·우보체제(左右輔)를 설치· 확립시켜 이들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형성을 위한 첫 단계를 만들었다.(이종욱, 1979)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주몽과 유리와 함께 특별히 비문에 그의 이름을 새기고, 그를 가리켜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라고 한 것과, 조선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의 대무신왕 27년조 말미에 "뛰어나게 지혜롭고 총명하며, 위엄이 있고 씩씩한데다 인재를 알아 잘 위임했으며, 땅을 널찍하게 개척하여 나라의 형세가 더욱 융창해졌다.(王英明武威 知人善任 恢拓王宇 國勢愈昌)"라고 찬사를 보낸 것은 이러한 활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무신왕은 재위 27년(44)에 사망하였으며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이종욱, 1979, 「高句麗 初期의 左·右輔와 國相」『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윤내현, 1989, 『한국고대사신론』,일지사.
김현숙, 1994, 「高句麗의 解氏王과 高氏王」『大丘史學』16.
박경철, 1996, 『高句麗의 國家形成硏究』, 고려대박사논문.
劉子敏, 2001, 「“崔氏樂浪”考辯」『北方文物』2001-2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 大武神王 [名無恤 一作味留 姓解氏 瑠璃王第三子 戊寅立 理二十六年]
제3 대무신왕 [이름은 무휼 또는 미류라고도 한다. 성은 해씨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무인년에 즉위하여 26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