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문사

초문사

분류 문학 > 국가 > 고구려

기본정보

이불란사와 함께 세워진 고구려 최초의 절

일반정보

고구려 최초의 절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소수림왕 대에 이불란사(伊弗蘭寺)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성문사로, 초문사는 성문사의 잘못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초문사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초문사는 고구려 최초의 사찰로서, 『삼국유사』 권3 흥법3 순도조려(順道肇麗)조에 의하면 소수림왕 5년(375) 2월에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두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두었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5년조와 『해동고승전』 권1 석순도(釋順道)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그런데 『해동고승전』에는 초문사의 이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성문(省門)을 절로 만들었기 때문에 초문사가 아닌 성문사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초문사는 성문사의 잘못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성문사(초문사)의 위치에 대해 『삼국유사』 권3 흥법3 순도조려조 주에서 일연이 언급한 내용이 실려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승전』에서 성문사(초문사)와 이불란사가 각각 고려(高麗)대의 흥국사와 흥복사라 하였는데, 압록강 북쪽에 고구려의 첫 수도 안시성(安市城)이 있기 때문에 고려 수도 개성에 있는 흥국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오류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해동고승전』 권1 석순도(釋順道)전에서는 성문사(초문사)가 흥국사이고, 이불란사가 흥복사라 한 『승전』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성문사(초문사)와 이불란사의 위치를 명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 두 사찰이 원래 국내성에 있었는데 뒤에 평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일연은 흥국사와 흥복사를 개성에 있었던 절로 생각하여 『승전』의 기록이 오류라고 하였지만, 『고려사』 권13 예종 4년(1109) 4월조 을유일에 “동지추밀원사 허경(許慶)을 시켜 평양 목멱(木覓)의 동명(東明) 신사에 제사를 지내는 한편 흥복(興福), 영명(永明), 장경(長慶), 금강(金剛) 등 절들에 문두루(文豆屢) 도량을 설치하게 하였다.(遣同知樞密院事許慶 祭平壤木覓東明神祠 又設文豆屢道場 于興福永明長慶金剛等寺)”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개성 외에도 평양에 같은 이름의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 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1 평양부 고적조 등을 이용하여 위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였다.(신동하, 1988)

그러나 개성의 십찰(十刹)은 평양의 구사(九寺)를 그대로 모방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고 국내성의 성문사(초문사)와 이불란사가 흥국사와 흥복사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수평적으로 이동되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국내성은 수도 기능만 이전되었을 뿐이지 완전히 폐도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문사(초문사)와 이불란사는 그대로 국내성에 있을 것이고, 다만 두 사찰의 기능만 흥국사와 흥복사로 이전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 위치에 대해 성문사(초문사)는 국내성 동문 밖 5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동태자(東台子) 건물지에 있었을 것이며, 이불란사는 집안현 남쪽 500m에 있는 석주(石柱) 건물지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문명대, 1998)

참고문헌

신동하, 1988, 「高句麗의 寺院 造成과 그 意味」『韓國史論』1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문명대, 1998, 「高句麗 初創佛敎寺院 “省門寺·伊佛蘭寺”의 考察」『講座 美術史』1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순도조려)
順道肇麗
順道肇麗[道公之次 亦有法深義淵曇嚴之流 相繼而興敎 然古傳無文 今亦不敢編次 詳見僧傳]
高麗本記云 小獸林王卽位二年壬申 乃東晉咸安二年 孝武帝卽位之年也 前秦符堅 遣使及僧順道 送佛像經文[時堅都關中 卽長安] 又四年甲戌 阿道來自晉 明年乙亥二月 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高麗佛法之始 僧傳作二道來自魏云者 誤矣 實自前秦而來 又云肖門寺今興國 伊弗蘭寺今興福者 亦誤 按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 在遼水之北 遼水一名鴨淥 今云安民江 豈有松京之興國寺名 讚曰 鴨淥春深渚草鮮 白沙鷗鷺等閑眠 忽驚柔櫓一聲遠 何處漁舟客到烟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순도공(順道公)의 다음에 법심(法深), 의연(義淵), 담엄(曇嚴)의 무리가 서로 계속하여 불교를 일으켰다.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기사가 없으므로 지금 여기서 함부로 편차(編次)하지 않는다. 『승전(僧傳)』에 자세히 보인다.] 고구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기를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즉위 2년 임신(壬申)(372)은 즉 동진(東晉) 함안(咸安) 2년이니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가 즉위하던 해였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그때 부견은 관중(關中)에 도읍하였으니, 즉 장안(長安)이다.] 또 4년(374) 갑술(甲戌)에 아도(阿道)가 진(晉)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乙亥) 2월에는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두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두었으니 이것이 고구려[高麗] 불법의 시초이다.”라고 하였다. 『승전(僧傳)』에 순도와 아도가 위(魏)에서 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전진(前秦)에서 왔다. 또 초문사(肖門寺)는 지금의 흥국사(興國寺)이고, 이불란사(伊弗蘭寺)는 지금의 흥복사(興福寺)라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생각컨대 고구려 시대의 도읍(都邑)은 안시성(安市城), 일명 안정홀(安丁忽)이니 요수(遼水)의 북쪽에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으로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 한다. 송경(松京, 개경) 흥국사(興國寺)의 이름이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으랴. 찬(讚)한다. “압록에 봄이 깊어 물가의 풀빛 고운데, 백사장에 갈매기 한가롭게 조는구나. 부드러이 노 젓는 소리에 놀라 한 소리 길게 우니, 어느 곳 고깃배가 손님을 싣고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