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

장수왕

분류 문학 > 국가 > 고구려

기본정보

고구려 제20대 왕.
생몰년 : 394-491
재위기간 : 413-491

일반정보

이름은 신련(臣連)이며 아버지는 제19대 광개토왕이다. 중국의 남북조에 대하여 양면외교를 펼치면서 외교적 안정을 추구하였고 475년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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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이름을 신련(臣連)이라 하였으며 아버지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이다.『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즉위년조에 따르면 이름을 거련(巨連) 또는 연(璉)이라 하였다. 광개토왕 18년(408)에 태자가 되었고, 같은 왕 22년(412)에 광개토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장수왕대는 남하정책을 활발하게 펼친 시대로 인식된다.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장수왕 63년(475)에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였다. 한편 신라에 대해서도 왕 42년(454)과 77년(489)에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가하였다.

그 중에서도 475년 장수왕의 한성 공격은 고구려 남하정책의 중요한 사건으로 주목받고 있다. 종래에는 이 때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국제적 여건을 감안하여 고구려가 북위와 우호 관계를 맺고 평양 천도를 단행하여 요하 이서의 진출을 포기하고 남진을 추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천관우, 1977) 이와 비슷하게 장수왕대에 북수남진(北守南進) 정책을 수립하고 475년 한성 공격으로 인해 한강 유역을 영유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제 동맹군의 공격을 받는 551년까지 유지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며,(이호영, 1984) 고구려의 한강유역과 한반도 중부지역 장악을 장수왕대 남진정책의 총결산으로 보기도 한다.(박성봉, 1984)

그러나 고구려가 한성 공격 후에 포로들만을 취하고 물러났음에 주목하면서 당시 한성을 직할 영토로 삼지 않았음을 주장한 견해가 있다. 즉 장수왕이 돌아가면서 한성을 직접통치하기 위해 어떠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고 하는 직접적인 자료가 보이지 않음을 들면서, 고구려가 곧바로 물러간 이유를 5세기 중엽 이후 급격히 성장하는 신라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 계속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성을 함락시킨 위세를 배경으로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에게 국가존립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한수 유역의 진출을 꾀했을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즉 아산만 이남 지역에 있어서 백제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 이북지역에서는 고구려의 진출을 허용하는 선에서 협약이 맺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박찬규, 1991)

그 외에 475년에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하였더라도 경기도 광주, 성남 방면에서 공격해오는 백제군을 방어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곧바로 한강 건너편으로 철수하여 보루를 축조하고 장기간 백제와 대치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또한 한강 유역 일대에 고구려 보루들이 존재해도 평안․황해도 일대의 고구려성과 같은 규모로 전환하지 않았던 것은 이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 사실상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이인철, 2000)

한편 고구려의 한성 강습에 대해서 요하 이서선(以西線)을 지향하던 국가 팽창 정책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던 백제에 군사적 타격을 가하려는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즉 백제와 접한 남부 전선의 안정화를 꾀하고자 함에서 비롯된 공세적 방어전략 개념에 입각한 저돌적 군사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475년 한성 공격 당시 고구려군이 한강 북안의 아차산을 기습적으로 제압하고 이 곳을 전진기지로 하여 한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박경철, 2003)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한성을 계속 지켰으며 고구려 역시 신라의 구원군과 대적하는 것을 피하고 신라마저 제압한 이후에 안정되게 영토 확장을 시도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에 한성에서 철군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김병남,2004) 그리고『삼국사기』지리지에서 한강 하류를 옛 고구려의 영역으로 기록한 것을 사실의 표현이라기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이 반영된 관념의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백제의 건국세력도 고구려의 한 지파임을 상기시키면서 홀(忽)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지명은 4~5세기에 이루어진 고구려의 진출에 따른 부산물이 아니라, 그 전에 백제에 의해 사용된 지명일 가능성을 시사하였다.(김낙기, 2005) 그 외에도 고구려군이 한성에서 곧바로 철수한 원인을 당시 북위와의 긴장된 관계 때문으로 파악하면서 장기전이 될 경우 따를 수 있는 북위의 개입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본 견해도 있다.(노태돈, 2005)

『삼국사기』에 나오는 아단성(阿丹城)에 대해 검토하면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한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한 견해도 있다. 즉 장수왕은 한성 공격 이후 곧 퇴군하였으며, 웅진과 사비 시대 백제의 대고구려 관련 기록을 보아도 한강 유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는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강 하류 지역의 고구려 유적들이 모두 단기적으로 사용된 군사유적이었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또한 백제의 아단성과 고구려의 아단성을 구분하지 않은 것이 한강 유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가 장수왕 이후 나제동맹군의 공격을 받을 때까지 유지되었다고 본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하였다.(김영관, 1998) 이후 이러한 견해를 심화시켜 고구려 함성 점령설의 토대가 된 일본서기 흠명천황 12년조의 고구려로부터 회복한 한성 등 6군의 땅은 성왕 7년(529)에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것을 성왕 29년(551)에 되찾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475년 장수왕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즉 웅진시대 백제의 북쪽 국경은 아산만 일대가 아니라 한강 이북지역이었으며, 황해도 지역까지 진출한 적도 있음을 말하였다.(김영관, 2000)

한편 고고학적인 자료를 바탕을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 진출했음을 주장한 견해가 있다. 그 증거로 임진강 북안의 여러 산성이나 한강 북안의 고구려 군사유적을 들고 있으며, 특히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음을 근거로 이 곳에 고구려군이 장기간 주둔했음을 주장하였다.(최종택, 1998) 그러나 경기 남부 지역에 고구려의 유적,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을 들면서 고구려의 한성 공격이 한강 유역을 통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을 드나들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고 한강을 건너오는 백제 등의 세력을 차단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김낙기, 2005)

그리고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을 검토하면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몇몇 중요 거점을 확보하고 중요 교통로를 통해 한반도 중부 지역을 경영하는 군사적 거점 중심의 지배 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한강 이북의 북한산군과 국원성(충주)이 대표적 거점이었는데 한강 이북과 이남에 나타나는 고고학 자료의 양상으로 보아 고구려의 군사적 방어 역시 한강 이북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고 하였다.(임기환, 2002)

장수왕은 재위 79년(491)만에 죽었는데, 손자 나운(羅雲)이 뒤를 이어 고구려 제20대 문자명왕(文咨明王)이 되었다.『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79년조(491)에는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는데,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태부(太 傅) 요동군(遼東郡) 개국공(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추증 책봉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고 한다. 장수왕의 능에 대해서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輯安)에 있는 장군총(將軍塚)을 장수왕릉으로 파악하기도 하고(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집안시박물관, 2004), 평양의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을 장수왕릉으로 보기도 한다.(조영현, 200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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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우, 1975,「濼河 下流의 朝鮮」『史叢』21.22합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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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집안시박물관, 2004,『輯安高句麗王陵-1990~2003년 輯安高句麗王陵 調査報告』
조영현, 2004,「傳東明王陵의 墓主 比定」『科技考古硏究』10.
김낙기, 2005,「京畿 남부 지역 소재 高句麗 郡縣의 의미」『高句麗硏究』20.
노태돈, 2005,「고구려의 한성 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鄕土서울』66.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 長壽王 [名臣(連) <癸>丑立 治七十九年 丁卯 移都平壤城]
제20 장수왕 [이름은 신련이다. 계축년에 즉위하여 79년간 다스렸다. 정묘년에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