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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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충왕의 첫 번째 아들로, 신라에 투항한 후에 귀족으로 활약함
생몰년 : ?-588

일반정보

세종(世宗)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충왕의 장남으로서, 신라에 투항한 후에 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라의 신하로서 활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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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서는 “구충왕(仇衝王). 김씨이다. 정광(正光) 2년(5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42년이다. …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爾叱)의 딸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이며,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다.(仇衝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 王妃分叱水尒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여기서 세종(世宗) 각간(角干)의 아버지는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충왕(仇衝王, 재위 521-532년)이고 어머니는 계화(桂花)이며 장남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법흥왕(法興王) 19년(532)조에서는 “금관국(金官國) 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고 하였다. 즉, 『삼국유사』에서 세종(世宗)으로만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서는 노종(奴宗)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세종과 노종의 종(宗)은 고대 남자 인명에 흔히 사용되는 것인데, ‘보’혹은 ‘부’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세(世)’는 ‘누리’의 한자 표현으로 세상의 남자 혹은 세상을 다스릴 남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세종이 신라에 투항한 이후의 세종의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각종 금석문 자료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어서, 가락국의 왕손으로서 신라에 투항한 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이 확인된다.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서는 ‘내례부지(內禮夫智)’로 표기되어있고,「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에서는 ‘내부지(內夫智)’로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지왕(眞智王) 2년(577)조에서는 『삼국유사』와 동일하게 ‘세종(世宗)’으로 표현되지만, 권4 신라본기4 진평왕(眞平王) 원년(579)조에서는 ‘노리부(弩里夫)’로 나오고, 권44 열전4 거칠부전에서는 ‘노부(奴夫)’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의 차이는 ‘누리부’의 음을 빌리거나 한역하여 표현한 것이다.(김태식, 2002)

세종과 관련된 각종 사료들을 종합해 보면,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의하면 가락국의 왕족으로서 신라에 투항한다. 그리고「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를 통해서 세종이 신라에 투항하고 약간 시간이 흐른 진흥왕 11년(550)에는 탁부(喙部)출신으로 제5등인 대아찬(大阿湌)에 해당하는 대아간지(大阿干支)가 되었음이 확인된다.(이기백, 1978)
이어서 『삼국사기』권44 열전4 거칠부전에서는, “(진흥왕) 12년(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湌)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比台角湌耽知非西奴夫波珍湌西力夫波珍湌比次夫大阿湌未珍夫阿湌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진흥왕 12년(551)에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를 벌일 때 세종은 제4등인 파진찬이 되어 8장군의 한 명으로 출전하는 것이 확인된다.
이후 568년 무렵에 건립된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에서는 ‘□척간(□尺干) 내부지(內夫智)’로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에서는 ‘탁부(喙部) 내부지(內夫智) 이간(伊干)’으로 왕의 어가를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같은 시기의 금석문이라는 점에서 이간(伊干)을 근거로 □척간(□尺干)은 일척간으로 추정되는데(노중국, 1992), 제2등 이찬으로 관등이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지왕(眞智王) 2년(577)조에는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였으므로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일선군 북쪽에서 쳐서 깨뜨리고 3천7백여 명을 목 베었다.(冬十月 百濟侵西邊州郡 命伊湌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는 세종이 이찬의 관등으로서 백제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음이 확인된다. 또한 권4 신라본기4 진평왕(眞平王) 원년(579)조에는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八月 以伊湌弩里夫爲上大等)”고 하여 세종이 상대등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10년(588)조에서는 “겨울 12월에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다.(冬十二月 上大等弩里夫卒)”고 하여 상대등의 지위에서 세종이 사망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종은 멸망한 가락국의 왕족으로 신라에 투항한 이후에 신라의 대외적인 팽창 등의 일에서 공적을 쌓아가면서 계속해서 관등이 높아져 이찬에 오르고 결국 상대등의 지위에 까지 오른 뒤에 사망하게 된다. 즉, 세종은 후에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신라 귀족사회에서 신김씨(新金氏)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이기백, 1978, 「丹陽赤城碑 發見의 意義와 赤城碑 王敎事 部分의 檢討」『史學志』12.
노중국, 1992, 「磨雲嶺 新羅眞興王巡守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 가락국사적개발원.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1, 푸른역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居登王 父首露王 母許王后 <建>安四年己卯三月十三日卽位 治三十九年 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 王妃泉府卿申輔女慕貞 生太子麻品 開皇曆云 姓金氏 蓋國世祖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爾
麻品王 一云馬品 金氏 嘉平五年癸酉卽位 治三十九年 永平元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 王妃宗正監趙匡孫女好仇 生太子居叱彌
居叱彌王 一云今勿 金氏 永平元年卽位 治五十六年 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 王妃阿躬阿干孫女阿志 生王子伊品
伊尸品王 金氏 永和二年卽位 治六十二年 義熙三年丁未四月十日崩 王妃司農卿克忠女貞信 生王子坐知
坐知王 一云金叱 義熙三年卽位 娶傭女以女黨爲官 國內擾亂 雞林國以謀欲伐 有一臣名朴元道 諫曰 遺草閱閱 亦含羽 況乃人乎 天亡地陷 人保何基 又卜士筮得解卦 其辭曰 解而<拇> 朋至斯孚 君鑑易卦乎 王謝曰 可 擯傭女 貶於荷山島 改行其政 長御安民也 治十五年 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 王妃道寧大阿干女福壽 生子吹希
吹希王 一云叱嘉 金氏 永初二年卽位 治三十一年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 王妃進思角干女仁德 生王子銍知
銍知王 一云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 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 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尒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議曰 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摠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왕후(許王后)이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9년이었으며,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기를,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게 세조(世祖)가 황금 알에서 난 까닭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한다.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에 즉위하여 치세는 39년이며, 영평(永平) 원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인 호구(好仇)인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영평(永平) 원년(291)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56년이며, 영화(永和) 2년 병오(丙午, 346) 7월 8일에 죽었다. 왕비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인 아지(阿志)인데,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이다. 영화(永和) 2년(346)에 즉위하여, 치세는 62년이며,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월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인 정신(貞信)으로, 왕자인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407)에 즉위하였다. 용녀(傭女)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그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림국(雞林國)이 그 틈을 이용하여 치고자 하였다. 이때에 박원도(朴元道)라고 하는 신하가 간언하기를, “시든 풀도 많이 모이면 비를 머금는데, 하물며 사람의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면, 사람이 어느 터전인들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복사(卜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말에 ‘엄지손가락을 풀면 벗들이 와서 성의껏 돕는다.’고 하였으니, 왕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사례하며 “옳다.”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을 보내었다. 그리고 정치를 고쳐서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이며,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 5월 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도령(道寧) 대아간(大阿干)의 딸인 복수(福壽)인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영초(永初) 2년(4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31년이며,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451)에 즉위하여 다음해에 세조(世祖)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와 왕후가 처음 만났던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고 이름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이며, 영명(永明) 10년 임신(任申, 492)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금상(金相) 사간(沙干)의 딸인 방원(邦媛)인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492)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0년이며,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인 숙(淑)인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이다. 정광(正光) 2년(5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42년이다.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同氣)인 탈지(脫知) 이질금(爾叱今)으로 하여금 본국에 머무르게 하고 왕자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爾叱)의 딸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이며,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서 이르기를,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건대, 구형(仇衡)은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 즉, 처음 수로왕이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계산하면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 532) 까지는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가 된다. 그러므로 다시 30년을 더하게 되면 총 520년이 된다. 여기에 두 설을 다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