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가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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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서북쪽 경계로 알려져 있는 산이며, 가야와 관련된 많은 지명을 남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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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서북쪽 경계로 알려져 있는 산이며, 가야와 관련된 많은 지명을 남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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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국유사』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서는 “나라의 이름은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고 하였는데, 곧 육가야(六伽耶)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오가야(五伽耶)의 임금(主)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으로는 창해(滄海), 서북쪽으로는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耶山)으로 경계(境界)를 하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濸海 西北以地理山東 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고 하였다. 여기서는 가야국의 동북쪽 경계에 가야산(伽耶山)이 있다고 하여 가야의 영역을 표현하는데 가야산이 중요한 기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야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권28 경상도 성주목(星州牧) 산천(山川)조에서 “가야산(伽倻山)[성주 서남쪽 48리에 있다. 또 합천(陜川)에 보인다.](伽倻山[在州西南四十八里 又見陜川])”라고 하였으며, 권30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 산천조에서는 “가야산(伽倻山)[일명 우두산(牛頭山)이며, 야로현 북쪽 30리에 있는데 서쪽으로 뻗어서 월류봉(月留峯)이 되었다.](伽倻山[一名牛頭山 在冶爐縣北三十里 西迤爲月留峯])”고 서술하고 있다. 즉, 가야산은 현재 경북 성주군, 고령군, 경남 합천군 가야면 등에 걸쳐있는 가야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야산은 주봉인 상왕봉(象王峯, 1,430m)과 두리봉(1,133m), 남산(南山, 1,113m) 등 해발 1,000m 이상의 능선이 감싸고 있고, 그 가운데에 해인사와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가야산이 있는 합천·고령 지방이 대가야의 영역으로서 신라가 복속한 뒤에 처음에는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불렸는데,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고 가야국의 기원을 전하는 전설도 남아 있기 때문에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인도의 불교 성지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에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된 산의 이름이 가야시르샤(Gajasirsa, 伽倻尸利河)라고 불렸는데, 약칭하여 가야산(伽倻山)이라고 불렀고 여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서수생, 1974) 또한 가야산이 일명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불리는데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으나, 인도에서 가야산을 코끼리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김영태, 1993) 그리고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기 때문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된 뒤 범어로 ‘가야’가 소를 뜻하며, ‘가야산’은 불교 성지이므로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의 ‘상왕(象王)’은 『열반경(涅槃經)』에서 언급되는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역시 불교에서 유래된 명칭이라는 것이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가야산과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해인사(海印寺)와 관련된 기록들이다. 『삼국유사』권4 의해(義解)5 의상전교(義湘傳敎)에서는 “의상(湘)이 10개의 사찰에 교를 전하게 하니 태백산(太伯山)의 부석사(浮石寺) … 가야산(伽耶)의 해인사(海印寺) … 등이 그것이다.(湘乃令十刹傳敎 太白山浮石寺 … 伽耶之海印寺)”라고 하여 가야산(伽耶)에 해인사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다. 이러한 내용과 유사한 것이 『최문창후전집(崔文昌候全集)』에서 최치원이 찬술한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에서 “해동의 화엄종 대학의 장소로 10개의 산이 있다. 강주(康州) 가야산(迦倻山) 해인사(海印寺) …(海東華嚴大學之所 有十山焉 … 康州迦倻山海印寺)”라고 하여 가야산(迦倻山) 해인사가 언급되었다. 이와 같이 가야산에 해인사가 있다는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哀莊王) 3년(802)조 기사에 “8월에 가야산(加耶山)에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였다.(八月 創加耶山海印寺)”는 기록이 있고, 권46 열전(列傳)6 최치원(崔致遠)전에서 최치원이 “최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았다.(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는 기록도 확인된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9 경상도(慶尙道) 고령현(高靈縣) 건치연혁(建置沿革)조에서는 최치원(崔致遠)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인용한 내용이 있다. 여기서는 가야산신(伽倻山神)인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天神)인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하여, 대가야(大伽倻)의 왕인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가야산신과 천신이 감응하여 대가야와 가락국의 왕을 함께 낳았다고 하여 『가락국기』의 내용과는 다른 설화를 전하고 있는데, 역시 가야산(伽倻山)이 설화의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 설화를 대가야의 시조와 성산(聖山)인 가야산신(伽倻山神)과 결부시킴으로써 그 연원을 높이고 불교를 진흥하기 위해서 불교 전래의 유구함을 강조한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 가야산에 해인사와 같은 대사찰이 창건하면서 이를 계기로 이 지역의 불교 진흥을 위해서 가야산 주변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던 대가야의 시조 및 세계에 불교적인 윤색을 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백승충, 2001)

한편 가야산신(伽倻山神)과 관련된 설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30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 사묘(祠廟)조에서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해인사 안에 있다. 속설에는 대가야국 왕후 정견이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正見天王祠[在海印寺中 俗傳大伽倻國王后正見 死爲山神])”는 부분이 보이는데, 가야산신인 정견모주는 정견천왕으로도 불린 것도 확인된다. 또한 『삼국사기』권32 잡지1 제사 소사(小祀)조에서 소사의 하나로 “가량악(加良岳)[청주(菁州)]”이 언급되었다. 여기서 가량악은 가야산을 지칭하는 것이며, 소사의 신사가 바로 정견천왕사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현재 해인사 해탈문(解脫門) 앞에 있는 국사단(局司壇)을 정견천왕사의 흔적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서 정견천왕사가 해인사의 창건연기와 관련하여 축조된 것이지만, 역으로 해인사를 가야산의 현 위치에 창건한 것은 기존에 대가야의 산신에 대한 제장을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였다.(김태식, 2002)

참고문헌

서수생, 1974, 「伽耶山 海印寺 硏究(Ⅰ) -特히 伽耶山 海印寺의 語義와 海印三昧에 대하여-」『語文學』30.
陜川郡誌編纂委員會, 1981, 『陜川郡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영태, 1993, 「伽耶의 국명과 佛敎와의 관계」『伽倻文化』6.
백승충, 2001, 「가야 건국신화의 재조명」『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1, 푸른역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爲君后 爲玆故降矣 爾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著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裹>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 <裹>著抱持而歸我刀家 寘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則殷之天乙 顔如龍焉則漢之高祖 眉之八彩則有唐之<堯> 眼之重瞳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濸海 西北以地理山東 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俾創假宮而入御 但要質儉 茅茨不剪 土階三尺 …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윽고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9간(九干)이 있어 추장(酋長)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니 무릇 1백호에 7만 5천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산과 들에 자리 잡고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경작하여 먹었다.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 임인(壬寅) 3월 계욕일(禊欲日)에 그들이 사는 곳 북쪽의 구지(龜旨)[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거북이(十朋之龜)가 엎드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무리 이삼백 인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의 소리와 같은 것이 나는데 그 형상은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없느냐?”라고 하였다. 구간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을 무엇이라 하느냐?”고 하였다. 대답하길, “구지(龜旨)입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시기를 이곳을 다스려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 하셨는데, 이러한 이유로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에서 흙을 파서 노래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구간 등이 그 말과 같이 모두 기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자색(紫色)의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아있었는데,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열어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무리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몸을 펴서 백번 절하였다. 얼마 있다가 다시 싸가지고 아도(我刀)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榻) 위에 두고 각기 흩어졌다. 열이틀(浹辰)이 지나고 다음날 동이 틀 무렵(平明)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 상자를 여니, 여섯 개의 알이 변화하여 사내아이(童子)가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이윽고 평상에 앉히고 무리들이 하례의 절을 올리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서 십 여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이나 되니 은(殷)의 천을(天乙)을 닮았고, 얼굴은 용과 같으니 한(漢)의 고조(高祖)를 닮았으며, 눈썹의 팔채(八彩)는 당(唐)의 요(堯)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즉위(卽位)하였다. 처음으로 나왔으므로 이름(諱)을 수로(首露)라 하였는데,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다[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諡號)이다] 나라의 이름은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고 하였는데, 곧 육가야(六伽耶)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오가야(五伽耶)의 임금(主)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으로는 창해(滄海), 서북쪽으로는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耶山)을 경계(境界)로 하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임시궁궐(假宮)을 짓게 하여 들어가 살았는데 질박하고 검소하려 하여 (지붕의) 이엉(茅茨)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