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백

하백

분류 문학 > 문화 > 신화

기본정보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수신(水神)이며 주몽의 외조부

일반정보

하백은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수신(水神)으로서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의 외조부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구려조에서는 동부여의 왕 금와가 우발수가에서 발견한 여인을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라고 하였다.

『장자(莊子)』춘추편과 『산해경(山海經)』해내북경(海內北經) 곽박(郭璞)의 주에 따르면 하백은 황하(黃河)에 사는 신으로 사면으로 운거(雲車)를 타고 두 마리의 용을 부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몽신화에서의 하백을 단순히 하천의 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김상기, 1971)

유화가 동부여의 금와와 같은 집단 내에 거주하고 상당한 예우를 받은 것에 대해서 그들이 농경문화라는 문화적 동질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유화는 물의 신인 하백의 딸로서 생명의 근원인 물과 관련이 있는 지모신적인 존재였으며, 금와는 그 탄생과정에서 보듯이 다산(多産)의 생산성을 표상하는 동물인 개구리와 관련이 있으므로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김화경, 1998)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가 하백의 딸인 점에 주목하여 이를 지모신(地母神)신앙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할 때 자라와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외조부인 하백의 능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점은 하백의 딸인 유화와 관련되는 지모신신앙을 시사해 준다고 하였다. 또한 하백이 장마와 가뭄을 관장하고 있음은 그 자체가 지모신적 신앙을 강하게 내포한다고 하였다.「동명왕편」에는 유화와 그 부친인 하백의 나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웅심연(熊心淵)이나 청하(靑河) 또는 우발수 등과 관련된 하백의 신앙은 본래 지모신신앙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고 하였다.(김두진, 1999)

하백신앙을 부여신(夫餘神)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는 부여신과 고등신(高登神)을 모셨는데 부여신은 곧 유화이며 부인상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유화 시조전승이 하백신앙의 본 모습임을 나타낸다고 하였다.(김두진, 1999)

고대농경사회에서 수신(水神) 하백은 소 모양을 하고 있었음을 들며 물을 지배하는 신인 소는 농업신이자 풍요의 신이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칠성신앙, 수신신앙은 북아시아의 공통적인 문화요소 중 하나로서 중국의 수신신앙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즉 중국에서 수신의 성좌(星座)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북극성, 북두칠성, 금성 등과 연관되나 고구려에서는 칠성과의 관계만 확인되는 점이 다르다고 하였다.(강경구, 2001)

한편 하백의 딸인 유화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접촉을 각각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수신족(水神族)과 천신족(天神族) 사이의 접촉과 마찰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건국신화를 전하는 모든 자료에 건국의 시조인 주몽이 천제의 손이며 하백의 외손임을 자랑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두 족속의 관계는 살벌한 적대관계라기보다는 통합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찰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 태어난 주몽은 천신과 수신의 혈통을 아울러 지니고 있지만 그가 활약하는 단계에서는 수신 지향의 신성성이 퇴색하고 천신 지향의 신성성이 강화되었다고 하였다. 주몽 자신이 항상 천제의 손자임을 강조했고 여러 문헌에서 고구려가 해모수의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주몽의 집단은 해모수집단과 혈연관계를 가진 천신숭배부족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몽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물의 힘을 빌려 선주자 집단인 송양(松讓)을 항복시켰기 때문에 수신적인 권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서대석, 2001)

참고문헌

김상기, 1971, 「國史上에 나타난 建國說話의 檢討」『學術誌』5, 건국대학교 학술연구원.
김화경, 1998, 「高句麗 建國神話의 硏究」『震檀學報』86.
김두진, 1999,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일조각.
강경구, 2001, 『고구려의 건국과 시조숭배』, 학연문화사.
서대석, 2001, 『한국신화의 연구』, 집문당.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고구려)
高句麗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自言 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淥邊室中 <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有産子 名曰夫婁 今據此記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 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嶷異常 自作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 將謀害之 蒙母知之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是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玄菟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稟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稟離 乃夫婁王之異稱也]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혹은 지금 화주 또는 성주 등이라고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다. 『국사』고려본기에 이르기를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휘는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한 뒤 부루가 죽은 후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 유화인데 여러 아우들과 나와 놀고 있는데, 그 때 한 남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였다. 나를 웅신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속으로 꾀어 사통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단군기에서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고 부루라 이름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한 뒤에 주몽을 낳은 것이다. 단군기에서는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하였다하니,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것이다] 부모가 중매 없이 사람을 따른 것을 꾸짖어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가서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깊숙이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췄다. 몸을 이끌어 피하니, 해그림자가 또 쫓아와 비추었다. 그로 인해 잉태하여 한 개의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만 하였다. 왕이 그것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매우 영리하고 보통과 달라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번 쏘면 백번을 다 맞추었다. 나라의 풍속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금와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재주가 미치지 못하였다. 장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듣지 않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준마를 알아보아 적게 먹여 수척하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해하려고 모의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말하기를 “국인이 장차 너를 해하려고 하니 너의 재략으로 어디를 간들 못하겠는가? 마땅히 속히 도모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오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가다가 엄수[지금은 자세하지 않음]에 이르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하는데 쫓는 자가 거의 미치니 어찌하랴?”고 하니,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건너자 다리가 없어지니 뒤쫓던 기병이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주[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초가를 비류수 가에 엮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본래 성은 해씨이다.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햇빛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로서 성을 삼았다] 이 때 나이 12세였으니 한 효원제 건소 2년 갑신(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왕이라 칭하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21만 5백 8호였다. 주림전 제21권에는 “옛날 영품리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였는데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여 왕이 된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기운이 하늘로부터 와서 그 때문에 내가 임신한 것이다’고 하였다. 아이가 태어남에 미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굿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먹이어 죽지 않더니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 고 하였다.[곧 동명제가 졸본부여왕이 된 것을 말한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별도이므로 부여왕이라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